121. 클레벤트의 이름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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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클레벤트의 이름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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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클레벤트의 이름을 걸고
2023.03.01.
“가면 안 돼. 가지 말아요.”
엘리시아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레로사는 물에 잠겨요. 고대부터, 신들이 설계한 장치예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각하기도 전에 입으로 단어들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협곡의 물이 도시를 채울 거예요.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엘리시아는 헐떡였다.
“잠시만.”
일레온이 마차 문을 닫자 밖의 인원들이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엘리시아.”
“안 돼.”
“나 좀 봐봐.”
“일레온. 가지 말아요. 네?”
늘 그녀에게 무르고 관대하기만 한 남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았다.
“너무 위험해. 거긴 안 돼요. 이대로 같이 여기서 도망가요.”
“엘리시아.”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붉은 눈동자는 어둑한 동굴 길의, 더 어두운 마차 안에서도 묘하게 빛났다.
“금방 갔다 올게.”
기어이 바라는 바를 거스르는 대답을 듣고야 말았다.
“싫어요. 그럼 나도 갈래요.”
“안 돼. 너무 위험해. 나는 오데르잖아.”
“나는 당신의 짝이잖아요. 당신이 다치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대는 수련이 모자라서 안 돼. 이제 겨우 발소리를 감추는 정도밖에 안 되어놓고.”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두 손을 모아 쥐고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내가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어? 나는 돌아와.”
“……싫어.”
어린아이처럼 눈을 가련하게 뜨고 고개를 젓는 엘리시아를 일레온이 꽉 끌어안았다.
“예언서를 가져와야 하잖아. 조금만 참아. 응? 얼른 갔다 올게. 그리고 다시는 네 옆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원초적인 거부감이 온몸을 갉아대는 것만 같았다.
무조건, 무조건 안 된다고, 싫다고만 외치고 싶었다.
“엘리시아.”
머리의 아주 좁은 한구석에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아는데, 나머지는 부정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레로사를 채울 협곡의 물살에 이성이 씻겨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다녀오라고 해줘.”
한시가 급할 텐데 일레온은 침착하게 엘리시아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럼…… 이번 한 번만이에요.”
“그래. 클레벤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심장께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선언한 그가 고개를 숙여 엘리시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갔다 올게.”
마치 저택 후원에 꽃이라도 따러 갈법한 투로 말하고는 일레온은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세드릭! 자네만 나를 따라와.”
“예. 전하.”
일레온이 내리자마자 이리스가 올라탔고,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가 달리는 게 느껴졌다.
“일레온.”
엘리시아는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사지로 가는 그를 결국 붙잡지 못했다.
너무 큰 슬픔은 눈물이 나지도 않는다는 걸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
일레온과 세드릭은 말을 몰아 중앙 광장에 다다랐다. 어느새 물은 어른 허벅지 높이까지 차올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디 홍수라도 났나요?”
웅성대는 사람들은 계단으로 상점의 위층으로, 더 위층으로 향했다. 높은 곳으로 가면 물을 피할 수 있다는 상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드릭. 자네는 사람들을 대피시켜. 상주하는 인원들이 쓰는 말과 마차도 있을 테니.”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드릭의 낯이 어두웠다.
“관리국에서 내려올 때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하에 말들을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치 않으니 저희처럼 자력으로 신전 자산이 아닌 마차나 말을 몰고 오는 일은 거의 없고 관리국에서 신관들을 데려다주고 말을 회수한다고 합니다.”
“정말인가?”
“네. 전하. 도시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태워서 올라온다고 하더군요. 저희도 그레로사에 도착하면 인솔해서 행렬을 밖으로 다시 데려갈 생각이었습니다.”
“경사니까 완전히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어도 상관없어. 물을 피할 정도로만 올라가도 족하니. 출구가 물에 잠겨서 폐쇄되기 전에 서둘러.”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갈 곳이 방금 정해졌군.”
일레온의 눈이 지하도시의 가장 높은, 마켓 플레이스의 꼭대기에서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열기구를 향했다.
***
이천 년 제국사의 이면에서 비밀을 간직하던 지하도시에 낯선 물냄새가 밀려들었다.
발 아래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보며 알레한드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플랜B에 퇴로는 없습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플랜A가 실패했을 때 다른 빙의자들을 몰살할 거로 계획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을 받은 소나텍은 열기구를 띄울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아슬아슬한 퇴장이로군.”
“그림자가 흔들리면 그걸 통해 이동하기가 힘듭니다. 제 힘을 쓰기 곤란한데 탈출 방법이 있으니 다행이지요.”
그들의 열기구가 한껏 부풀어 올라 위용을 숨길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광장과 상점 아래층의 이들이 그것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이쪽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빙의자들은 역시 열기구를 보자마자 아는군.”
이 세계에서 열기구는 난쿠 대륙의 물건이었다. 평생 바다를 건너본 적도 없는 이들이 많은지라 보통 제국민들이라면 알 리 없었지만 바깥에서 온 이들에겐 달랐다. 보자마자 관리국과 이어진 터널이 아니라 숨겨진 제 2의 탈출구를 알아버렸을 것이다.
“서두르게.”
“거의 다 됐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알레한드로가 막 열기구의 바구니에 올랐을 때였다.
“이런 걸 준비를 다 했나?”
“대공.”
일레온의 목소리에 알레한드로는 일순 등골이 서늘했다.
“서둘러! 서두르라고 하지 않았나!”
“아아. 저 위로 나갈 셈이군.”
일레온은 여유 있게 손으로 짤막한 단검 하나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삐딱한 태도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서, 설마.”
알레한드로가 질린 얼굴을 할 때였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칼이 한창 예쁘게 부풀어 오른 열기구를 가르고 지나갔다.
파아악.
작은 단검에 실린 기운이 어마어마했는지 관통당한 벌룬이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터지듯 갈라지며 순식간에 쭈글쭈글해진 채 바구니 위로 덮였다.
“어헉.”
묵직한 잔해를 덮어쓴 알레한드로가 체면도 잊고 한 팔로는 예언서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거대한 풍선 조각을 벗어나려 허둥댔다.
일레온은 친절하게 그것을 거들어주었다.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손이 미끄러졌군.”
그러면서 불한당같이 거친 손길로 알레한드로의 품에서 예언서를 단번에 뺏었다. 기분이 좋아진 듯한 일레온의 얼굴에 몹시 질이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내가 챙기도록 하지. 대신관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니.”
“안 돼! 이리 내!”
하지만 알레한드로가 급히 휘두른 손은 허공을 지났다. 잔상처럼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뛰어오른 일레온은 상쾌하게 말했다.
“자네들이 말하는 플랜A와 플랜B가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혹시 또 아나? 나와 엘리시아가 맺어지는 원작이 플랜C가 될지. 그게 소나텍 자네가 멋대로 고치기 전의 원작이니 말이야.”
“예언서에 적힌 것만이 다가올 미래다.”
“그렇군. 그렇지만 내 눈은 엘리시아가 고쳤는걸.”
카리나가 아니라.
일레온은 일부러 그들을 도발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도시에 물을 채울 방법이 있다면 물을 뺄 방법도 있겠지.
더군다나 도시는 협곡의 급류보다는 조금 위쪽에 자리했다.
무리하게 신탁을 들은 에쇼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물을 위로 끌어다 잠기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었으니.
무언가 방법이 있다면 도시를 채울 물을 협곡 쪽으로 빼내는 건 더 쉬울 터였다.
‘협곡 쪽으로 물을 빼낸다고?’
일레온의 머릿속에 엘리시아와 잠입할 때 걸어들어왔던 환기구가 떠올랐다.
‘수십 개나 있어봤자 뭐해. 전부 도시의 상부에 뚫려 있으니 거기로 물이 빠질 때쯤이면 전부 물고기 밥이 되겠군.’
어른 허리춤까지 차오른 물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흐름이 되자 출구 쪽으로 탈출하지 못한 이들이 열기구를 보고 다들 건물 옥상을 향해 몰려왔다.
“어림없는 소리. 네가 맞이할 플랜C는 네 죽음으로 붕괴하는 세계다.”
소나텍이 이죽거리며 조소했다.
“넌 왜 여기 머물러 있는 거지? 그림자를 타고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일레온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아. 그림자. 그림자가 필요한 거군. 그런 전지전능한 능력이 이 어둑한 동굴 속에서 변변한 그림자가 없어서 쓸 수가 없다니. 뭐 그런 애매한 전능이 있나. 안타깝군.”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
자연적인 광원이 없는 지하동굴은 전체가 어두워 그림자와 어둠의 경계가 없었다.
“닥쳐.”
“소나텍. 넌 누구지?”
일레온이 물었다.
“존재하긴 하는 건가?”
흰 가면 아래의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 의지가 없군.”
그때였다.
“히이익!”
소나텍이 칼로 알레한드로의 목을 누르며 일레혼을 협박했다.
“대신관의 목이 잘리는 꼴이 보고 싶지 않다면. 거기 불을 붙여.”
“사, 살려줘!”
소나텍의 손에 들린 건 조금 전 열기구를 터트릴 때 일레온의 손을 떠난 단검이었다.
대신관의 목에서 실금처럼 흐른 피가 흰 신관복의 목덜미를 붉게 적셨다.
그 꼴을 보고 일레온은 기가 막혔다.
“둘이 한 패였던 게 아닌가.”
“한 패라니 누가? 나와 대신관이? 그럴 리가 있나.”
소나텍이 코웃음 쳤다.
“나는 신좌에 오르면 그걸로 족할 뿐이다. 궁금하지 않나? 신이 되어 이 세계를 내려다보면 어떨지.”
신탁을 받는 엘리시아가 편안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주신의 일상도 그리 녹록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일레온은 소나텍의 착각을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엘리시아를 배신하고 모욕한 대신관을 내가 구할 것 같아?”
“그래야지. 신의 후손인 네가 구할 수 있는 이를 외면할 수 있겠나?”
일레온은 짧게 숨을 내쉬고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여기다 불을 붙이면 되는 건가.”
“시간 끌려고 머리 굴리지 말고 얼른 불이나 붙여.”
불을 당기고 나면 그림자가 생긴다. 소나텍이 저 혼자 이 자리를 벗어날 게 아닌가.
일레온은 짧은 시간 어떻게 할까 바쁘게 경우의 수를 따졌다. 전쟁터를 벗어난 후로 이렇게까지 굴러야 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목숨이 걸려 있는 선택.
대신관 알레한드로 따위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쯤 지상을 향해 달리고 있을 엘리시아는 그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일레온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게 그의 앞에 놓인 난제였다.
일레온이 망가진 열기구에 붙어있던 화로에 불을 붙이자 열꽃이 일렁거리는 대로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그림자가 이리저리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제 대신관은 놓아줘.”
교단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였다.
알레한드로라면 분명 이곳을 빠져나갈 다른 방법이나 도시를 구할 방책을 가지고 있을 터.
“일레온 클레벤트. 넌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어떻게 이해를 하겠나. 사람 목숨 가지고 이런 짓을 벌이는 너희를.”
“아, 아아!”
소나텍의 칼날이 목을 죄자 알레한드로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신의 편애를 받아 우월하게 태어나 평생 굴욕도 비굴해 본 적도 없는 네가 귀환길이 끊긴 우리의 절망을 알까.”
“그렇다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우리는 평행선이겠군. 평생 마주칠 일이 없어 다행이야.”
가면 아래로 흐릿하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푸욱.
“아악!”
알레한드로가 비명을 질렀다.
“너 무슨 짓을…….”
저열한 목소리가 가면 아래에서 일레온을 비웃었다.
“살려서 놔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