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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렇게 닿아 있으면 (123/151)


123. 이렇게 닿아 있으면
2023.03.08.



“당했어요. 소나텍이 예언서를 가져갔어요.”

책을 어루만지는 마리엘라의 손이 떨렸다.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레한드로 대신관이 목숨처럼 끌어안고 있던 것을 빼앗아 온 겁니다.”

“그게 함정일 수도 있고요.”

마리엘라가 일레온에게 물었다.


“이 책이 빛을 잃은 건 언제였죠?”

엘리시아가 기억하기로는 소나텍과 알레한드로가 대신관의 방에서 비밀 공간 안에 숨어 있을 때도 빛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저랑 대공 전하가 비밀 공간을 찾아냈는데 작은 제단 위에 책이 놓여 있었어요. 그 안에 소나텍과 대신관님이 계셨는데 그때도 책에서 빛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예언서는 늘 신비한 황금빛을 흘리고 있었다.


“예언서에서 빛이 나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수장고의 보호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수장고 밖으로 빼낸 책에서 빛이 나는지에 대해서는 본 적이 없어서.”

“그 빛은 미래에서 오는 거예요.”

마리엘라가 한숨을 쉬며 책을 펼쳤다.


“예언서는 대공 전하의 삶을 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적혀 있죠. 대공 전하께 그 사건이 일어나면 서술 시점이 지나게 돼요.”

그녀는 책의 앞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그렇게 지나간 부분은 이렇게 회색으로 변한답니다. 과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리엘라가 책을 맨 뒤로 넘기자 책의 일부가 뭉텅이로 뜯긴 자리가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분만 뜯어서 가져갔어요.”

“……이럴 수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탄식했다.


“애써주셨는데 고생이 물거품이 되었어요. 소나텍의 손에 예언서도, 책을 수정할 펜도 쥐어져 있으니 말이에요.”

마리엘라는 낙담한 듯 한숨을 쉬더니 이내 얼굴을 폈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알레한드로 대신관이 그런 말을 했다니 추궁해볼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카리나 영애도 그렇고. 무엇보다.”

마리엘라가 엘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스러우니.”

“실망시켜드렸군요. 예언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그런 부분을 살펴야 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레온의 명민한 머리가 소나텍이 알레한드로를 찌르던 그 순간을 복기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알레한드로에게서 책을 빼앗고, 소나텍이 알레한드로를 찌르고 도주할 때까지 너무 순식간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그 자리에서 소나텍이 책을 뜯어간 걸 알았다 하더라도 검은 후드 안을 뒤질 틈은 없었다.

그제야 일레온은 실패에 대해 온전히 납득했다.


“아 참. 이리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제게요?”

이리스가 고개를 빼자 일레온은 주머니에서 접힌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사락.

손수건을 조심스레 풀자 가루로 된 초록빛 모래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해독제를 만들 줄 안다고 공작부인께서 말씀하셨지.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약에 섞어봐야 알겠지요.”

레브가 궁금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엇이지?”

“이번에 신전에서 저와 엘리시아를 노렸던 마비독인데 예전에 그녀가 수정궁으로 납치됐을 때 사비엘이 썼던 것과 같은 거로 보입니다.”

일레온의 말에 레브와 마리엘라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뭐라고요?”

엘리시아가 부연했다.


“대공 전하 말씀이 맞아요. 그보다 전에 배에 납치를 당했을 때도 분명히 같은 냄새였어요.”

“이걸 방에 피워서 밀어 넣고 있던 건 소나텍의 분신이었습니다. 제가 함정을 파서 쓰러트리고 가면을 벗기려 했는데 순식간에 돌이 되어 금이 가는 것처럼 변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건 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예요. 하지만 분신을 무한정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분신을 만든 본체에 타격이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유심히 손수건에 싸인 가루를 살피던 이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약은 만드는 사람마다 재료도 방식도 달라요. 해독제를 만들어보았으니 이 약을 조사해볼게요. 만약에 전에 아가씨가 당했던 그게 맞다면 소나텍이 황태자 쪽에도 닿아있는 거로 생각해야겠지요.”

이야기가 끊기자 모두의 눈이 쓸모없어진 예언서로 향했다.

마리엘라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손뼉을 쳤다.


“자아. 다들 피곤할 텐데 일단 쉬기로 해요. 한숨 푹 자고 저녁을 들지요. 풍성하게 준비시킬테니.”

일레온이 그런 마리엘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부끄럽군요.”

“앗. 제 집도 아닌데 주제넘었네요. 실례했습니다.”

문가에서 복도를 단속하던 베르나르가 손을 들었다.


“괜찮습니다. 공작부인. 곧 엘리시아 님의 거처가 될 저택인지라.”

익살스러운 그의 태도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아니. 얘가 어딜 갔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시아가 보이지 않았다.


“일레온도 같이 빠져나간 것 같은데.”

레브의 말에 마리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기 전인데. 하지만 오데르의 반려인지 의식까지 치러놓고 혼사를 엎자고 할 일은 없겠지?’

예비 사윗감의 불타는 눈빛을 보아도 불안한 것이 딸 가진 어미의 심정이었다.

***

일레온을 대공비의 방으로 끌고 간 엘리시아는 커튼을 쳤다.

그녀가 하는 짓을 보고 있던 일레온은 한쪽 입술을 비스듬하게 올렸다.


“대낮부터 그건 왜…….”

일레온의 목에 두 팔로 매달린 엘리시아가 그가 키를 낮춰주자 저돌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평소 수줍어하거나 끈덕지게 조르면 한 번 협조적으로 대해주던 그녀와 달랐다.

일레온은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거리는 걸 느꼈다.


“옷 좀 벗어봐요.”

그를 침대에 앉힌 엘리시아가 진지한 얼굴로 조끼와 셔츠 단추를 차례로 풀었다.

예전에 눈이 멀었을 때 엘리시아가 가끔 그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아주아주 가끔 말이다.

왜냐면 단추를 잠그거나 할 때 코앞에서 풍기는 체리블라썸의 달콤한 냄새를 맡고도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단추가 달린 앞섶을 만지작거리다 그의 피부를 스치는 엘리시아의 손끝이 미칠 듯이 그의 음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엘리시아는 일개 고용인으로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 일레온은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그토록 강렬하게 무엇을 욕망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단추를 채워주는 거였는데 이렇게 제 옷 단추를 풀어 헤집는 엘리시아를 보게 되다니.

눈을 뜨길 잘했어.

일레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옷은 왜 벗으라는 거야? 나는 이대로 쉬어도 괜찮은데. 불편하면 그대도 내가 벗겨줄까?”

나도 벗고 엘리시아도 벗으면 좋지만 일단 겸양해보았다.


“좀 봐봐요. 정말 괜찮은지.”

돌아올 때 엘리시아는 반은 일레온의 말에 함께 탄 채 기절했고, 나머지는 이리스와 둘이 마차를 탔다.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그러다 보니 둘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붙어있을 시간이 부족하긴 했다. 그렇지만 저택으로 귀환하자마자 엘리시아가 이토록 적극적일 줄이야.

일레온은 그를 애지중지하며 어디 다친 데가 없을지 살피는 엘리시아를 감상했다.

일순 아름다운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거 봐봐요.”

“……어?”

너무 기꺼운 나머지 그녀를 보느라 바빠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지만 엘리시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의 손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기 상처가 있잖아요. 이거 이번에 다친 거 맞죠?”

일레온이 보기에 어디선가 날카롭게 긁힌 자국이 손등에 대각선으로 보였다. 손에 난 상처인데도 이제까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아플 것 같아.”

엘리시아가 그렇게 말해주니 갑자기 다쳐서 속상하기도 하고 엄청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리 줘봐요.”

그녀가 두 손으로 손을 잡아당기기에 그러려니 마음대로 하라고 손을 내어줬을 때였다.

촉.

엘리시아가 눈을 감고 그의 손등에 살포시 키스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한 그가 더듬거리며 묻자 엘리시아는 눈도 뜨지 않은 채 그의 상처에 입술을 누를 뿐이었다.


“이렇게 닿아 있으면 빨리 낫는다면서요.”

일레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레로사 좋은데?

까짓것 한 번 더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엘리시아는 그 후로도 일레온의 벗은 상체에 자그마한 상처라도 보이면 그 자리에 입술을 대었다.


‘원래 빨리 아물곤 했는데.’

오데르의 체질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일레온은 슬쩍 편지봉투 자르는 칼로라도 손끝에 상처를 만들어오고 싶다는 정신 나간 생각까지 다다랐다.

엘리시아의 엄숙하고 진지하고 경건한 얼굴이란.

일레온을 더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엘리시아.”

“으응?”

“부족해.”

그가 다친 곳을 찾아 입술을 문지르는 바람에 흰 얼굴에 입술만 붉어진 여자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여태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들이 전부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일시에 근질거렸다.


“제대로 해줘. 응?”

일레온이 팔을 벌리자 엘리시아는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하아. 살 것 같아.”

가느다란 목덜미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일레온은 중얼거렸다. 그녀의 체향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 중에 하나라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귀 뒤, 목덜미에 키스하는 걸 좋아했다.

죽을뻔한 자리에서 살아 돌아와 엘리시아를 안고 있자니 온몸이 그녀를 빨리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레온은 한참 동안 엘리시아에게 빠져있었다.

술독에 빠진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그는 그녀가 주는 달콤함에 젖어 허우적거렸다.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게 엘리시아가 변했다.

예전이라면 얼마쯤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도 그만하라며 그를 밀어내곤 했었는데.

오늘 엘리시아는 예전에 딱 자르던 선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 차이에 일레온은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어머니들께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뒷전이 될 정도로.

지금 엘리시아를 품에서 놔주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는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저녁 먹어야지.”

일레온은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저녁을 먹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제 귀로 들어봐도 의미심장한 투였다.


“싫어. 더 해요.”

그레로사에서 콘스탄스 에비뇽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틈만 나면 엘리시아는 그를 끌어안고 버텼다.

품에서 그를 놓아주면 일레온이 사라질 것만 같다며 불안을 호소하는 엘리시아가 어찌나 귀엽던지.

그렇게 말 몇 마디로도 충분히 행복했건만 지금은 침대를 벗어나면 그 행복이 깨질 것 같으니 어쩌면 좋을까.

일레온은 어둑한 방 안에서 붉게 빛나는 엘리시아의 눈동자를 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직 그녀는 오데르의 반려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와 오래 닿아 숨을, 체온을 나누고 나면 적안으로 변하는 걸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녀에게 제가 나누어준 오데르의 힘이 녹아들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 기적 같아서.


“엘리시아. 우리 빨리 식을 올려야겠어.”

붉은 루비처럼 달아오른 눈동자가 커졌다.


“하루라도 더 빨리 같이 있고 싶다.”

그의 말에 엘리시아가 환하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결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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