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낫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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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낫게 해줘
2023.03.11.
“내일 결혼할까요?”
어둑한 방 안에서 거리낌 없이 웃는 그녀의 얼굴은 흡사 저택 후원에 피는 달맞이꽃 같았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셔서 많이 심어놓은 노란 꽃은 달밤에 엘리시아와 그곳을 걸을 때마다 운치를 느끼게 해주었다.
환한 얼굴로 눈을 빛내는 엘리시아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 한쪽이 시큰할 정도였다.
“좋죠?”
일레온은 하마터면 ‘그래’ 하고 수긍할 뻔했다.
좋다. 좋아. 싫을 리가 없잖아.
그레로사에서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 마음에 둔 여자가 변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모르는 척할 때는 그녀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를 잊은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난 후로도 자신은 ‘로나가’ 아니라며 답답하게 굴 때는 언제고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너무 기뻐서 기절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싶었지만 오데르여서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안 돼.”
이지와 명민의 상징 오데르가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좋다고 할 뻔했다. 일레온은 홀린 듯한 기분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왜요? 왜 안 돼요?”
웃음기가 가신 엘리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눈이 이상해졌어.
엘리시아의 주변으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처럼 빛이 보이는데 착시인가.
일레온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시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은 거절하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평생 한 번뿐인데 클레벤트 대공비를 소홀하게 맞을 수는 없지.”
어찌 보면 정석적이고 딱딱한 대답이었으나 일레온은 진심이었다.
엘리시아는 분명 아름다운 신부가 되겠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지쳐 잠들어 있는데도 눈을 떼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제게 올 자격이 있었다.
“드레스도 손님 초대도 준비하려면 내일은 안 돼.”
“……아쉽다.”
투정 부리듯 작게 중얼거리는 엘리시아를 보며 일레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뭘 본거지?’
그녀가 투정을 부렸다고? 아니 어리광에 가까웠나?
익숙하지 않은 엘리시아의 모습을 갑자기 많이 봐서 그런지 몸이 이상해졌다.
심장이 뛰는 맥이 조금 불규칙하고 꽤 많이 더웠다. 오데르여서 평생 취해본 적이 없는데 술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게 어질어질하고 피가 머리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격 없이 평민들의 혼인처럼 꽃잎을 띄운 술 한 잔만 올려놓고 그녀를 데려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명색이 제국에 단둘뿐인 개국공신 공작 가문의 외동딸을 대공비로 맞으며 그럴 수 없으니 통탄스러웠다.
“공작가와 대공가의 혼사이니 황제 폐하께서 국혼을 주관하셔야 하고.”
“일레온.”
조금 전까지 품에서 내일 결혼하자고 조르던 여자가 그를 밀어내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핑계 같은 말 하지 말아요.”
“아니 핑계가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민망하잖아요. 너무 진지하게 안 된다고 하면.”
생글거리던 웃음이 가신 얼굴을 보며 일레온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싫은 건 당연히 아니지만 안 되는 걸 좋다고 하기도 좀 그러니까.”
“그만 해요. 안 되는 거 나도 알지만 그냥.”
뒷말을 웅얼거린 엘리시아는 작게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기까지 했다.
그 순간 일레온은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우읍.”
제 옆에 앉아 있던 엘리시아를 낚아채듯 끌어안고 세게 입술을 빨았다.
여자의 뺨을 볼록하게 채웠던 공기를 제 것을 안으로 밀어 넣어 휘저어 모두 빼냈다.
“흐으.”
놀란 듯 가느다란 소리를 내던 엘리시아의 손이 엉망으로 단추를 풀어놓은 탓에 일레온의 맨 가슴을 짚었다.
참을 수 없게 열이 올랐다.
이대로 불이 붙어 활활 타올라서 재만 남으면 뒤엉킨 그녀와 자신을 영원히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을 텐데.
그따위 미친 생각이나 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엘리시아는 붉은 눈동자를 한 채 그를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쁜 숨을 쉬며 오르내리는 가슴을 향해 일레온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한시라도 빨리 널 데려오고 싶다는 말은 내가 먼저 했는데.”
“읏.”
일레온은 손끝으로 엘리시아의 몸 선을 그려보았다.
배를 몰고 가 잡아 온 그녀를 끌고 갔던 날 같이 씻자며 같이 욕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 탓에 제대로 본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고 기억 속에 미화되어있었다. 아련한 기억 위로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곡선이 덧씌워졌다.
“말장난은 그만둬. 아닌 거 알잖아.”
이건 모두 엘리시아의 탓이다.
그녀가 원할 때, 바랄 때, 안아 달라고 허락할 때 그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작 남자의 마음이 위험해지는 선을 그녀만 몰랐다.
“알아도 듣고 싶잖아요.”
엘리시아가 사뭇 억울한 듯 작게 말했다.
“그래? 그럼 대답해줄게.”
일레온은 성급하게 셔츠를 벗어서 집어던졌다.
“내일 말고 지금 해.”
술 한 잔도 필요하지 않다면.
얇고 부드러운 드레스의 천 너머로 여린 온기가 느껴졌다.
“일레온.”
끌어안은 대로 안겨있던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것 봐.
이렇게 또 참고 있는 사람 건드리고 물러날 것처럼 굴면 나만 미치는 거지.
일레온은 삐딱해진 심정으로 그녀의 손을 가져다 제 팔에 대었다.
“여기도 다쳤어. 낫게 해줘.”
아까 겨우 긁힌 자리 손등에 입을 맞춰줄 때만 해도 엘리시아가 고마웠는데 지금은 숫제 원망스러웠다.
“어서.”
눈을 깜빡이던 엘리시아가 주춤하더니 그의 팔 아래에서 일어나 앉았다.
‘설마.’
일레온은 당황했다.
그러나 당혹감이 가시기도 전에 엘리시아의 입술이 팔을 길게 긁고 지나간 상처에 닿았다.
그는 숨을 들이쉬며 그대로 굳었다.
엘리시아를 구할 때 날카로운 바위에 긁혔다 여긴 열상이었다.
유독 깊게 상처가 난 자리가 있어서 엘리시아와 붙어 있어도 여태 핏자국이 남은 자리가 있었다.
예전처럼 온전히 오데르의 힘을 혼자 가지고 있었더라면 금방 아물었겠지만.
엘리시아가 많이 다쳤기 때문에 그녀가 빨리 낫길 바랐는데 그것이 회복에 영향을 주는 듯 했다.
그 자리를 엘리시아의 입술이 차근차근 물며 지났다.
분명 눈에 보이는 건 없는데 무언가 그 자리에 눌러 찍히기라도 한 듯 온기가 지나간 곳에 열이 돌았다.
“아.”
엘리시아의 경건한 치유 행위가 그의 욕심을 건드려서 일레온은 작게 신음했다.
“왜, 왜요? 아파요?”
손등에 엷게 남은 긁힌 자국으로도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아직 피딱지가 얹은 자리를 보고는 더욱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너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이성이 돌아왔다.
‘위험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그가 스스로 정한 약속이건 선이건 모두 뭉개버릴 것 같았다.
엘리시아를 안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중적이고 우습다.
원초적인 결합이 완전한 사랑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래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변심하는 모두가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믿기 위해서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짐해주길 원했다.
“엘리시아.”
일레온은 갈망으로 흔들리는 속을 억눌렀다.
“널 안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붉어진 엘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날 시험하지 마.”
모두가 축복하고 인정하기 전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취하길 바라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로나이던 시절, 눈이 먼 그에게서 언제든 떠날지 모른다고 할 때야말로 그녀를 품는 꿈을 꿀 정도로 관계에 목이 말라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엘리시아는 기억도 지위도 되찾았고 일레온은 얼마든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추적할 수 있지.
대공에 제국 최고의 기사로 양지와 음지에 고루 정보망을 가진 그가 엘리시아처럼 눈에 띄는 이를 찾지 못하고 놓칠 리 없었다.
머리와 눈 색을 거짓말 한 건 한 번은 통했지만 두 번 통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갖은 이유를 겹겹이 덧씌워 참고 있는 걸 엘리시아는 말 한마디로 엉망으로 뭉개놓았다.
“시험한 거 아닌데.”
어둑한 가운데 움직이는 작고 하얀 손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했다.
그것이 천천히 가 닿은 것은 그녀의 드레스 앞섶을 꿰어 여민 나풀거리는 리본이었다.
툭.
제 손으로 끈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며 일레온은 정신이 날아가는 걸 느꼈다.
느슨해진 옷 사이로 윗가슴이 조금 드러났다.
황궁 무도회에 무희들도 이보다는 훨씬 더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을 텐데 엘리시아가 그에게 스스로 다가온 느낌 탓에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 전 일레온이 했던 것처럼 그의 손을 끌어다 옷이 내려와 훤히 드러난 목에 가져다 대었다.
“나도 여기 낫게 해줘요.”
상처를 더 잘 보이게 하려는 듯 그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정리해 반대편으로 넘기는 모습이 아찔했다.
고개를 숙여 엘리시아의 목에 다가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일레온은 자신이 목줄에 걸려 끌려가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알았다. 저곳에 입술을 대고 나면 그녀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을 거란 걸.
예의와 도덕 같은 것들이 아직도 얄팍하게 남아 그를 만류했다.
그렇지만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목에 입술을 대고 이를 세웠다.
“아앗.”
그에게 목을 물린 사냥감이 파르르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물러날 수 없었다.
끝을 보기 전에는, 만족하기 전에 정신을 다시 차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리본이 풀린 탓에 옷이 흘러내려 가녀린 날개뼈가 온전히 등을 감싼 손끝에 만져졌다.
데뷔탕트 날 등을 반쯤 드러낸 흰 드레스를 입은 엘리시아를 봤을 때도 미치는 줄 알았는데.
그녀가 긴장한 대로 날갯짓을 할 것처럼 움직이는 선을 따라 그는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리다 허리를 잡아 제게 더 가까이 끌어 당겼다.
목을 내어준 엘리시아가 그의 귓가에 달콤한 숨을 토했다.
“일레온.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러자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제 속을 어수선하게 들쑤시는 만큼 그녀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던 유치한 짐승이 어디론가 물러갔다.
일레온은 그녀에게서 떨어져 손수 옷을 정리해주었다.
그가 리본을 도로 꽉 동여매는 걸 보며 엘리시아가 입을 벌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옷을 도로 입혀주는데 벗을 때 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나도 사랑해. 엘리시아.”
일레온은 침착해졌다.
여태 어떻게 참았는데 인제 와서 이럴 순 없었다.
“그러니까 참아볼게.”
엘리시아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참아서 다행인 건지 서운한 건지 아껴줘서 기쁜 건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봐준 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신은 정말 못됐어요.”
“내가?”
일레온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누가 할 소린데!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맞아요?”
그러나 엘리시아의 표정이 불안해해서 입을 다물었다.
“증거 같은 거 없으니까. 안다고 생각해도 자꾸 확인하고 싶어져서.”
“난 그대가 구혼장을 받아주기 전에도 혼자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어.”
“거짓말.”
그때 무언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증거 있어. 보여주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