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그대를 위해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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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그대를 위해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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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그대를 위해 만든 것
2023.03.15.
“증거 있어. 보여주면 되잖아.”
“그런 증거가 어디 있다고.”
그러면서도 엘리시아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일레온이 끄는 대로 그의 집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일레온은 그녀의 손을 놓고 열쇠로 집무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꽤 큼지막한 비로드 상자가 나오자 엘리시아가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이게 뭔데요?”
“그대를 만족시킬 만한 증거.”
일레온이 어서 와보라며 손짓하자 엘리시아가 멈칫하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보석일까? 뭐 보통 사랑의 증표이긴 한데.’
귀부인들이 가질 법한 고급스러운 상자에서 어쩐지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한 세트의 장신구가 놓여 있었다.
“와아.”
그것을 보자마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티아라였다.
백금으로 만든 프레임에 빈틈없이 가지런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핑크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했다.
“세상에 이런 건 처음 봐요.”
세트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귀걸이도 엄지손톱만 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그 와중에 따로 떼어서 보면 그 자체로 엄청난 귀물이라 여겨질 법한 귀걸이나 목걸이가 티아라와는 세트로서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보석인 줄 알았는데 보물이었네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일레온이 재밌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지금 해볼래?”
“이, 이런 걸 내가요?”
당황해서 얼결에 되묻자 일레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내가 할까?”
엘리시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너무 엄청난 물건인데 만져도 되나 해서.”
“얼마든지.”
일레온은 상자에서 티아라를 들어 올리고는 거울 앞에 그녀를 세웠다.
천천히 머리 위로 티아라가 놓이자 엘리시아는 목이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것 없어.”
일레온은 그녀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모아쥐게 하고는 그 아래로 날렵하게 손을 넣어 목걸이도 채워주었다.
“잘 어울려.”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이건 누가 해도 잘 어울릴 수밖에 없을걸요. 너무 예쁘잖아요.”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대를 위해 만든 것이니 달리 누가 어울리겠어.”
“뭐라고요? 이걸 만들었다고요?”
놀라는 그녀를 보며 일레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했잖아.”
“언제 이런 걸…….”
“그대가 내 구혼장을 거절하기 전에.”
일레온이 뒤에서 가만히 엘리시아를 끌어안았다.
“난 어떻게든 빨리 그대를 내 옆에 데려다 놓을 생각에 빠져 있었지.”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결혼식 날 티아라를 써야 할 텐데 그대는 머리카락에 황금빛 티아라가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거든.”
일레온은 대공저에서 보관하고 있는 대공비의 보관이 노란 황금빛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이걸 만들었다고.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야 할 그녀를 위해서 말이다.
엘리시아는 가슴 속에 따뜻한 무언가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마음에 드나?”
“응. 너무 예뻐.”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연신 귓가에 뺨에 입 맞추다가 흡족한 얼굴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일레온은 제 표정을 보고 있었다.
“결혼식 날 아침에 깜짝 놀래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한참 대치하듯 서로를 보던 중에 그가 아쉽다는 투로 말하자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훗.”
“왜 웃어?”
엘리시아는 여전히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선물을 주면서 자기가 더 좋아하면 어떡해요.”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천천히 뒤를 돌자 상기 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붉은 눈동자에 시선이 닿았다.
이제 삐죽하던 마음이 풀렸냐는 듯 제 눈치를 보는 그를 보자 엘리시아는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기분을 살피던 남자가 고개를 내려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제 믿나?”
“네.”
꼭 어울린다고 그가 몇 번이나 말을 하자 더는 티아라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놓인 자리에서 떼어놓는 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까 반지. 반지가 있었잖아요?”
구혼장을 가져온 날 분명히 그가 프러포즈용 반지도 보여주었었는데.
마리엘라 때문에 충격을 받아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를 거절했었다.
엘리시아가 그에게 왼손을 쫙 펴서 내밀었다.
“반지도 보여줘요. 응?”
반쯤 조르듯 그를 채근하자 일레온이 무척 기쁜 듯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반지는 안 돼.”
“왜요?”
“부정 탔어.”
엘리시아가 눈을 찌푸리자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었다.
“원래 기사들은 미신에 민감하다고.”
“나침반은 잘만 주더니.”
“무슨 소리. 그 나침반 덕분에 내가 그대를 데려올 수 있었으니 그건 절대 아깝지 않아.”
거울 앞에 서서 시시덕 거린지가 한참이었으나 그들의 대화는 끝을 몰랐다.
밖에서 몇 번인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서로에게 빠져든 둘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아직도 대답이 없나?”
식당의 상석에 앉은 레브가 묻자 집사는 난처했다.
이럴 때 주인의 사생활도 지키면서 황녀의 물음에도 매끄러운 대답은 뭐가 있을까?
“예. 전하. 송구합니다.”
그런 센스있는 대답은 없었다. 베르나르는 있는 그대로 고했다.
그걸 옆에서 들은 마리엘라가 민망한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냥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식사하지.”
레브가 잔을 들자 마리엘라와 그녀 곁에 앉은 이리스가 잔을 들었다.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축하연은 여인 셋의 수다로 무르익어갔다.
***
그레로사의 지상, 관리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임시 캠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하듄샤로 돌아가고 싶어요.”
“거긴 무너졌잖아.”
“모든 건물이 다 무너진 것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대신관님이 우리를 그레로사로 모은 이유가 뭐죠? 하마터면 다 같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잖아요?”
신관들의 쉼터, 낙원이라 불리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이 쫓겨난 기분을 두고 누군가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쫓겨난 타락 천사의 심경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멀쩡히 잘 살던 곳에서 책 속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또 한 번 버려진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삶의 터전, 돌아갈 곳을 거듭 잃은 이들의 마음은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로벤. 주신들께서 무어라 하시지 않나.”
“신탁으로 무언가 여쭤보는 게.”
“그래도 도망치라고 전언을 해주셨군. 천만다행이야.”
지하 그레로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신탁을 받다가 쓰러졌지만 로벤 덕분에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를 한 줄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본래 대신관은 신탁을 받을 수 있고 주신들의 말씀을 전언할 수 있는 자가 오르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주신들이 어여삐 여기던 어린 양 알레한드로가 어느 때부턴가 전혀 신탁을 받지 못하게 되어 신관들 사이에 ‘버림받은 양’ 또는 ‘찍힌 양’이라는 수군거림이 돌았다.
하듄샤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살펴도 신탁을 아예 받지 못하면 모르되, 갑자기 신들이 찾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서 이럴 때 난감했다.
알레한드로가 신전과 교단의 살림살이를 적절히 꾸려가고 문제없으니 이대로 좋다는 이들과 엘리시아를 새 대신관으로 빨리 교체하는 게 좋다는 이들이 걸핏하면 싸웠다.
어느 날 갑자기 책 속의 세계에서 눈을 뜬다는 건.
모두가 작은 확률의 기적을, 있을 수 없어 믿기 힘든 이적을 직접 겪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광적으로 다섯 주신을 섬기는 일에 매달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야 본래 세계로 돌아갈 것처럼.
“그런데 엘리시아 님을 데리고 수도로 향한 게 일레온 아니었어요?”
“카리나가 여주인데 여주가 엘리시아 님을 왜 죽이려고 한 거죠?”
로벤과 에쇼는 죽을 맛이었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알레한드로를 대신해서 계속 그들에게 무언가 대답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예요? 혹시 이거 엔딩이 망한 건가요?”
“일레온이 카리나랑 잘 되면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특히 이런 아주 예민하고 난처한 질문.
그러나 피하거나 변명하는 게 상책은 아니었다.
그레로사의 관리국은 지하에 식자재를 넣어주고 오가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많은 이들이 오래 머물도록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보니 대부분 노숙을 하고 있는데다 한정된 시설을 공유하니 생활이 아주 엉망이었다.
일레온이 손을 써서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차와 말을 보내주기로 했지만 콘스탄스 에비뇽에 돌아간다는 것 또한 난제를 안고 있었다.
일레온은 되도록 빨리 엘리시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작정이었고 그런 일은 한, 두 명도 아닌 빙의자들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된다.
빠르던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로벤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필 이걸 알리는 게 왜 내 몫이어야 하지?’
이런 역할을 맡게 된 게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산 채로 총알받이가 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무리 몇 번이나 생각해봐도 좀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일레온은 카리나와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로벤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뭐?”
“왜?”
“어째서?”
그 뒤를 이어 폭풍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뭐야? 주인공이 원작 탈주라도 했다는 거야?”
“그럼 우리는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간다는 말 아니야?”
“원작 엔딩이 뭔데?”
다들 수장고에 놓인 예언서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게 아니다.
본래도 얼마나 읽고 들어왔는지 차이가 컸으나 대충 신관으로 놀고 먹다 보면 엔딩 보고 돌아가리라 태평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듄샤라는 빙의자 커뮤니티가 그들을 나태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에 적응하고 제 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니 말이다.
“일레온이 황제 되고 카리나랑 결혼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 짧게 요약하자 다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일레온이 카리나와 이어지지 않을 거란 게 무슨 뜻이야? 로벤. 주신들이 그렇게 말해?”
그는 답답하게도 도망치라며 끔찍한 그레로사의 미래를 보여준 것을 끝으로 말이 없는 신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건 신의 뜻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린 어쩌라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 에쇼가 제 형 앞을 막고 나섰다.
“그걸 로벤에게 따져서 무엇해? 로벤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잖아.”
“아니. 우린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이 세계의 사람들도 살아 있는 사람이야.”
에쇼가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데 억지로 누굴 좋아하게 할 수 있어? 너희들은 그게 되냐고? 일레온이 카리나에게 반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집에 가야 하니까 억지로 그녀와 결혼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대공저로 보내줄게.”
그 말에 소란하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로벤! 에쇼!”
알레한드로의 수행을 맡은 신관이었다. 내내 병상에 누운 알레한드로의 간호를 하던 이가 다급하게 달려오자 갑자기 공기가 바뀌었다.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숨을 고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께서 깨어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