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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당신이 날 찾지 못하게 (126/151)


126. 당신이 날 찾지 못하게
2023.03.18.



 


“대신관님께서 깨어나셨다.”

그 말에 로벤과 에쇼, 난상토론을 벌이던 이들이 우르르 천막으로 만든 임시 병동으로 향했다.


“쿨럭.”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그를 간호하던 신관이 만류하자 알레한드로는 손을 저었다.


“조금만. 조금만 일으켜주게.”

등 뒤로 이불을 말아 대어주자 몸을 기댄 알레한드로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괴한에게 칼을 찔린 곳이 등이라 몸을 괴어주는 것도 아픈 듯했다.

로벤은 천막 안을 서성이는 다른 이들을 내보냈다.

지금부터 알레한드로가 할 이야기를 모두가 아는 건 아직 곤란했다.


“그레로사가 협곡의 물에 수장 된 건 아십니까?”

알레한드로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행히 무사히 대피했지만 우리가 머물 곳이 사라졌습니다.”

“내 뜻이 아니었다.”

로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주신들의 뜻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신이 이쪽저쪽 다른 말을 하는 일은 없다.

로벤도, 에쇼도, 엘리시아도 모두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엘리시아가 들을 수 있는 음성을 로벤, 에쇼가 모두 똑같이 듣지 못하는 것뿐.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다섯 주신의 빛무리가 떠오를 때 로벤이나 에쇼는 하나 또는 둘이 최대였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신탁을 듣지 못 한 지 오래였기에 로벤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암시……에 걸렸다.”

“뭐라고요?”

알레한드로의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소나텍이란 자에 의해.”

동시에 눈이 마주친 로벤과 에쇼는 경악했다.

***

수도로 돌아온 다음날.

대공비의 방에 딸린 커다란 욕조에서 피로를 풀고 푹 쉰 엘리시아는 한결 몸이 가벼웠다.

점심때가 되자 질리언이 제대로 된 갖춰 입은 차림새로 나타났다.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구나.”

부모가 자식을 보고 하는 말은 똑같았다. 엘리시아는 아버지의 팔에 손을 얹고 응접실로 안내했다. 딸이 하는 짓을 가만히 두고 보던 질리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벌써 대공가 안주인이 된 것처럼 구는 게냐.”

“아니에요.”

엘리시아가 뺨을 붉힐 때였다.


“그녀라면 대공가 안주인이 된 것처럼 굴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일레온!”

마음에 둔 이가 나타나자마자 냉큼 질리언의 팔을 놓고 일레온의 팔을 잡는 딸을 보며 질리언은 기가 찼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공 전하.”

“말씀을 낮춰주시지요. 제 장인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흠.”

하지만 오랜 세월 황족의 방계라 깍듯이 존대하던 것이 바로 편하게 내려오는 건 아니었다.


“차차 노력하도록 하지요.”

응접실에는 마찬가지로 옷을 갖춰 입은 레브가 앉아있었다.


“오느라 수고했네.”

“아닙니다. 황녀 전하. 그리 먼 길도 아니지요.”

레브가 차를 권하며 미소지었다.


“어제 황제 폐하께 오늘 공작과 함께 알현할 거라 전언을 넣었지.”

질리언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와의 혼담을 거절할 때 염두에 둔 혼사가 있다고 전하였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아마 대공 전하와 제 딸의 혼사 때문에 국혼을 청하려 한다는 걸 아실겁니다.”

오늘 마리엘라는 엘리시아와 함께 르발레인에 드레스를 보러 갈 예정이라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 혼사는 가주인 질리언이 결정할 문제이기도 했고 말이다.


「대공 전하와 둘이 사라지더니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마리엘라는 복잡한 심경인 듯 했다.

아무리 오데르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지만 과년한 딸을 대공저에 두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냐고 난리였다.


「한시라도 빨리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아요.」

 
달달 볶는 아내의 등쌀에 떠밀려 오늘 당장 황제께 자식의 혼사를 허해달라 청하러 갈 예정이었다.


“되도록 빠른 날을 희망한다고 말씀드리기로 하세.”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황제 폐하 성정에는 그보다는 한 달 후에 식을 올리길 희망하노라 전하는 게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그렇군. 황제 폐하께서는 애매한 것보다 그편이 나으실 거야.”

레브는 제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고 할 말을 또렷하게 전하는 유테르 공작을 보며 더욱 흡족했다.

서로 격이 쳐지지 않으니 얼마나 훈훈한 혼담인가.

게다가 아들이 저렇게나 행복해하니 말이다.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는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꼭 붙어 앉아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황궁으로 출발하기로 하세.”

“예. 황녀 전하.”

레브와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레온과 엘리시아도 따라 일어났다.


“예복은 품격있어야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일레온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당부를 하고 레브와 질리언은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가볼까?”

“좋아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엘리시아의 동그랗고 고운 이마에 입술을 한번 누르는 걸 일레온은 잊지 않았다.

***

콘스탄스 에비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레스 가게를 고르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소, 르발레인.

르발레인의 주인 에밀리는 감격해서 쓰러질 것 같은 상기 된 얼굴로 마리엘라를 맞았다.


“오랜만이군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열렬한 환대에 마리엘라가 미소지었다.


“그때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마웠어요. 내가 했던 약속 기억하나요?”

“절대로 잊지 않았답니다.”

에밀리는 의욕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나의 뮤즈.

엘리시아 유테르는 무한히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소재였다.

그녀가 이곳에서 옷을 맞추어간 건 기억을 잃고 대공가에서 일했다던 ‘로나’ 시절에 한 번, 그리고 언젠가 대공이 들이닥쳐 당장 입고 갈 수 있는 옷을 포함해 열여섯 벌의 드레스를 사간 날 그렇게 딱 두 번이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내내 상사병을 앓듯 엘리시아를 떠올렸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드레스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상상해낼 수 있을 것 같다가 드레스고 뭐고 그냥 엘리시아를 한 번만 가까이에서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아름다운 것이 영감을 부른다.

엘리시아 유테르는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고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그러면서도 화려하거나 독하지 않아서 질리지도 않는 매력이 있었다.


“너무 촉박한 일정이지요?”

마리엘라가 근심스레 물었다. 보통 품격있는 귀족가문의 결혼식 드레스는 반년 정도 전에 맞추는 게 보통이었다. 아무리 급하게 진행되는 혼사여도 석 달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한 달 안에 가능할지.”

말도 안 되는 일정이지만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맡겨주세요. 문제없답니다. 공작부인.”

혹여나 엘리시아 유테르가 다른 곳에서 맞춘 드레스를 입고 식을 올린다면 에밀리는 평생 땅을 치게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공작가에서 지불한 금액은 보통 드레스값의 몇 배는 되는 엄청난 액수여서 사람을 더 사서 쓰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에밀리가 호언장담할 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대공 전하. 엘리시아 님.”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엘리시아는 만개하기 직전의 꽃처럼 화사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사랑을 충만히 받는 여인 특유의 분위기 탓에 전에 봤을 때 보다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에밀리는 예비 대공 부부를 별실로 안내했다. 둥근 원형의 방 천장에 뚫린 천창으로는 오늘따라 날이 좋아 곱게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곳에 서서 이것저것 드레스용 레이스들을 대어 볼 엘리시아를 떠올리자 에밀리는 몹시 흥분했다.

그녀는 공들여 엘리시아의 치수를 쟀다.


“혹시 살이 빠지셨나요?”

“그래요?”

“허리가 더 가늘어지셨어요. 너무 마르셔도 보기 좋지 않답니다. 식사를 골고루 잘 하시는 게 중요해요.”

그러나 곧 에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닌가. 가슴은 전보다 커지셨는데요.”

 

 
무심코 중얼거리며 치수를 적은 에밀리의 눈에 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엘리시아와 일레온이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몸에 붙는 가벼운 차림새로 치수를 재는 엘리시아를 그린 듯한 자세로 앉아 감상하던 일레온이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엘리시아가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는 게 아닌가.

에밀리는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하지만 서로 열렬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고 흐뭇했다.


‘좋을 때지.’

엘리시아의 몸 위로 얇고 하늘거리는 흰 레이스들이 감겼다.

문제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한참을 이것저것 고르다 광택이 없는 레이스에 무지갯빛 작은 진주알로 덩굴무늬를 수놓아 장식하기로 결정이 났다.

반짝거려서 화려한 감이 있는 엘리시아의 블론드와 어울리는 것을 결정하고 나서야 에밀리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떨 것 같아요?”

“예뻐.”

“뭐예요. 성의 없게. 아직 천을 대보기만 한 건데.”

에밀리는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어 대공 전하. 자료실에서 드레스의 도안을 찾아오겠습니다. 잠시 편히 계시지요.”

“그러지.”

문을 닫는 틈새로 그녀가 별실을 벗어나자마자 소파에서 일어나 반쯤 비치는 레이스를 몸에 감고 있는 엘리시아에게 다가가는 일레온이 보였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 에밀리는 얼른 문을 닫았다.


“도안은 뭐가 좋으려나.”

자료실에서 되도록 천천히 좋은 것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일레온.”

의상실의 여주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일레온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찾았다.


“안 돼요. 여기서는.”

“문 안에서 잠갔어. 아무도 못 들어와.”

일레온은 애가 탄 듯 얇은 레이스를 숄처럼 두른 어깨와 팔을 쓸었다.


“아직 드레스 근처에도 못 갔는데 벌써 예쁘면 어떻게 해?”

따지는 말투에 엘리시아는 기가 막혔다. 저렇게 해놓고는 또 그녀에게 뭔가 내어달라고 조를 태세였다.


“그럼 내가 후줄근한 신부였으면 좋겠어요?”

순순히 당하고 싶지 않아서 한 방 쏘아붙이자 일레온이 몇 번이고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그럴 리 없잖아. 이런 천 조각을 걸치고 있어도 눈이 멀 것 같은데.”

“당신이 예복 입은 모습도 빨리 보고 싶어요.”

이렇게 둘이 함께 드레스를, 예복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기분이 들떠서 엘리시아는 자중하려 애썼다.


“한 달 안에 준비가 된다니 다행이군. 공작부인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어.”

일레온은 여태 마리엘라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웨딩드레스의 사전 계약 확정서를 써주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로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르발레인의 여주인에게 부탁했던 것을 말이다.

너무 좋아하는 그를 보니까 엘리시아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말하면 화낼 것 같은데.’

그렇지만 삶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 입어야 할 드레스를 이런 마음으로 맞춰선 안 될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일레온. 사실은 어머니께서 부탁하신 거예요.”

“뭘?”

“르발레인에 당신이 드레스를 가지러 왔을 때 로나가 환불하고 갔다던 것 말이에요.”

일레온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날 찾지 못하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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