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엘리시아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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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엘리시아가 아니면
2023.03.22.
“당신이 날 찾지 못하게 하려고.”
정작 입 밖으로 말해놓고 나니 엘리시아는 그에게 더 미안했다.
“황궁에 입궁해야 해서 급하게 드레스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절대로 대공저에서 일했던 게 알려지면 안 된다고. 추문이란 게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법이라고 하셔서.”
그녀는 일레온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해요.”
그가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찾았는지 이제는 알았다.
그때는 의식이 도피하고 있어서 제멋대로 일레온은 자신을 잊고 카리나와 꽃길을 가게 될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생각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굳어있는 일레온의 얼굴을 보니까 아차 싶기도 했다.
이렇게 서둘러서 드레스를 준비해줄 수 있는 곳이 없을 텐데 괜히 말해서 긁어 부스럼인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만약에 그래서 여기가 싫다면.”
엘리시아가 주저하며 말할 때였다.
포옥.
일레온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알고 있었어.”
“정말요?”
“공작부인께서 말씀해주셨지.”
그는 선선히 말해주었다.
「미안해요. 대공 전하.」
마리엘라는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엘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일레온은 그녀를 이해했다. 아니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감정적으로 먼저 받아들였다.
제가 주인공이라느니 그의 삶이 모두 정해져 있다느니 그런 말을 믿기 힘들었지만 엘리시아가 전제로 놓이면 달랐다. 그건 그렇다면 그러려니 여겨야 하는 일이었다.
“알고 있었구나.”
엘리시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고운 눈가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래놓고 모르는 척 내가 쩔쩔매는 걸 보고 있었어요?”
“귀여운 걸 어떻게 해?”
뻔뻔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엘리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레온. 당신은 이상해요.”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느낀 대로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영문을 모르겠군.”
나를 너무 귀여워한다. 난 다 큰 어른인데.
이렇게 말하면 유치해지기까지 할 것 같아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도 귀여워.”
끝이 없었다.
***
그 시각, 태양궁에서 황제가 알현실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레브와 질리언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폐하께서 늦으시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좀체 이런 일이 없는 분이신데.”
보통 국혼이라면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원하는 경우와 양쪽 가문에서 모두 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자라면 제국 정점인 황제에게 간청하면 합당하다 여겨질 때 직접 황제가 나서서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었다.
반대로 양쪽 가문 모두 원하는 경우에는 골치 아플 일이 없었다. 황실 방계로 황녀의 소생이자 황제의 유일한 조카이니만큼 국혼으로 거행하되 혼사 자체는 이미 가주인 일레온과 질리언이 합의한 일이므로 간략하게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그럼 의례적으로 황제가 그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런데 전날 미리 전령을 보냈는데도 제시간에 황제가 나타나지 않자 아무리 느긋한 성격이라도 질리언 조차 몇 번이고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어 들여다보곤 했다.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나자 시종이 아뢰었다.
“황녀 전하. 황제 폐하께서 편찮으셔서 오늘 뵐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뭐라고?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입궁하기 전에 말씀해주실 수도 있는 것을.”
“송구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시종에게 레브가 손을 저었다.
“자네가 송구할 일은 아니지. 공작. 이만 일어나야겠군.”
“네. 황녀 전하.”
레브가 멋쩍게 웃었다.
“얼마 전에 황제 폐하께서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조만간 입궁하라 하셨는데. 이리 오지 못하신 걸 보면 정말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야.”
“황제 폐하께서도 연세가 있으시니 예전 같지 않으시겠지요.”
질리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레브는 어폐를 느꼈다.
‘예전 같지 않다라.’
오데르는 본래 수명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길었다.
게다가 늙어서 죽기 전까지도 노화가 느려서 꽤 젊은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올해 마흔셋인 자신이 아직 삼십 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돌아가신 선황제를 떠올려봐도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보통 사람의 사십 대 중반의 중년 외모였던 게 기억이 났다.
‘오데르라면 병에 걸리지 않을 텐데.’
갑자기 확 늙어버린 것 같은 오라비의 모습을 떠올리자 무언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급히 서두르는 결혼이다 보니 아직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엘리시아가 유테르 가의 외동딸이니 그 애 몫의 재산이라던지 처리해야 할 것이 많군요. 괜찮으시다면 공작저로 모시겠습니다. 천천히 좀 더 이야기를 나누시면 어떨지요.”
예의 바르고 신분에 비해 겸손한 유테르 공작은 바람직한 사돈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브는 방금 전까지 하던 오라비에 대한 염려를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황제가 정말로 알현실에 올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못 가십니다.”
“황후!”
세라피나 황후는 고집스레 팔을 벌려 황제의 앞을 막았다.
“가시려거든 이 사람 목숨을 거둬가세요.”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양위를 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 우리 사비엘은 어쩌고?
황제 자신도 오데르가 아니면서 평생 황좌에 앉아 부귀영화를 다 누려놓고 왜 내 자식은 안 된다는 말인가?
세라피나의 분노는 머리꼭대기까지 닿아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오데르’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을 조금이라도 그러려니 여길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마크시스 황제의 비밀을 알고 나자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한참을 그런 대치를 이어가다 이내 황제가 지친 얼굴로 포기했다.
“알현실로 가 황녀와 유테르 공작에게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해라.”
“예? 폐하. 어째서냐 물으시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편찮아서 나가지 못하겠다 전하라.”
“예. 황제 폐하.”
시종장이 물러간 후에야 세라피나는 몸에서 힘을 빼었다.
“하아. 하아.”
지친 듯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보며 마크시스 황제는 안타까운 마음에 달래주려 손을 뻗었다.
탁.
그 손을 밀쳐낸 세라피나를 보며 마크시스 황제는 충격을 받았다.
얼어붙은 듯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한심해하며 세라피나는 몸을 돌렸다.
도저히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오늘 당장 황녀에게 양위하겠다고 말하는 걸 막으면 뭐 해?’
내일은?
그리고 또 모레는?
황제는 그럴 마음 만만이었다. 그리고 언제든 폭탄처럼 그녀의 황후 자리와 사비엘의 황태자 자리를 앗아갈 수 있었다.
‘일레온을 볼 때마다 그렇게 속이 뒤집히는 것 같더니.’
내 아들이 가졌어야 할 붉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아이.
아주 갓난아기일 때부터 세라피나는 일레온을 대하기가 어렵고 거북했다.
그것이 오데르를 낳지 못해서 갖는 주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 자식의 것을 빼앗을 놈이라 그랬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불쌍하고 딱한 아들의 거처로 향했다.
수정궁에 들어서 사비엘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황태자 전하. 무엇에 그리 골몰하고 있습니까.”
“황후 폐하.”
사비엘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골몰하긴요. 모처럼 여유가 있어 책을 읽던 참입니다.”
몇 번의 사고로 다친 아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자리보전하며 앓았다. 이제 기력을 회복한 듯 보이는 사비엘을 보며 세라피나는 마음이 아팠다.
‘저리 훌륭한 아이를.’
그놈의 오데르가 무어라고. 곧 저와 함께 아무것도 아니게 될지 모르는 아들의 미래를 그에 알려줄 수도 없고 세라피나는 답답했다.
그리고 제 자식이 불쌍했다.
어찌 자식 밥그릇을 뺏어 조카 줄 생각이나 하는 등신 같은 아비를 만났단 말인가.
그런 남편을 믿고 황후랍시고 제국을 다스리는 데 힘을 보탠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꽃밭을 가꿀 때는 곱게 꽃을 피워 자식에게 좋은 구경시켜주려 하는게 아닌가.
곡식을 기른다면 풍년을 이루어 내 새끼 배를 불려주려 애를 쓰는 게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좋은 황후가 되어 남편을 도와 제국의 안녕을 위해 애써왔는데.
사비엘에게 물려줄 게 아니라면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고생하고 힘든 일을 해왔을까.
뭇 사람들이 황제나 황후는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 여길진대, 실로 드넓은 제국을 다스리는 일은 까다롭고 해야할 일이 천지에 널려있었다.
심지어 너무 가물거나 비가 심하게 내려 강이 범람하는 사람의 힘을 벗어나 일어난 일까지도 모두 국민들이 살아가도록 다독이며 다스려주어야 했다.
그런 번거로운 것을 언젠가 사비엘이 잘 다스려두면 조금이라도 편하리라 생각하며 해왔던 것인데 세라피나는 허무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오늘 황녀와 유테르 공작이 알현실에 들었답니다.”
“두 분이요? 그분들이 어찌 함께 궁을 찾으신답니까.”
사비엘이 엘리시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아는 세라피나는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국혼을 청하겠다 하더군요.”
“뭐라고요?”
얼굴에서 온화한 기운이 가시고 굳은 표정을 하는 그를 보며 세라피나가 아들의 손을 잡았다.
“황제 폐하께서 건강이 좋지 못해 알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폐하의 윤허를 구하고자 온 것이 아니지요. 영지로 내려가면 얼마든지 국혼이 아니어도 혼인식을 치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구귀족들은 큰 영지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영지에서는 성주로, 왕과 버금가는 권력자로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지에서 영주의 혼인은 황제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클레벤트 대공이 가진 영지는 황제 직할령의 몇 배나 될법한 큰 땅이었다.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일일이 나서서 다스릴 수 없으니 차라리 황제령이 더 아담한 땅인 셈이었다.
일레온이 눈이 머는 바람에 전공을 제대로 따지지 못해 그렇지 지난 전쟁을 끝낼 때 그가 제국 영토로 만든 땅이 현재 제국 땅의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본래는 그 영토를 전부 일레온에게 주어야 합당하다고 귀족들과 대신들이 입을 모았었다.
‘그까짓 야만인들을 때려죽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세라피나는 일레온의 공을 폄하했지만 말이다.
“엘리시아 영애는 접어두세요.”
“황후 폐하.”
그녀의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주판알이 굴러다녔다.
지금은 마크시스 황제가 레브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하는 걸 막는 게 급선무였다.
엘리시아만한 신붓감이 흔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해링턴 백작가의 카리나 영애도 있지요. 그녀라면 엘리시아에 비해 기량이 처지지 않습니다. 또 엘튼 자작가의 로렌 영애나 키엘 공작가에서 황태자비 후보로 간택받으려고 양녀로 삼았다는 조세핀 영애도 상당하더군요. 조세핀 영애는 소문으로 듣던 것 보다 실제로 만나보니 대단히 빼어난 미인이랍니다. 황태자도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어머니.”
세라피나는 저를 어머니라 부른 사비엘의 목소리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엘리시아가 아니면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