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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여기서 키스할 거야 (129/151)


129. 여기서 키스할 거야
2023.03.29.



 


“오늘 본 반지들 전부 대공저로 보내주게.”

당황스러운 소리에 내려달라고 시위하던 말이 쏙 들어갔다.


“잠깐만요. 일레온.”

엘리시아가 그를 만류하려 할 때였다.


“내려줄 수 있는데 그 대신 여기서 키스할 거야.”

일레온이 작게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산 거 취소할 수 있는데 대신에 여기서 키스할 거야.”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선뜻 그에게 무어라 할 수 없어 조용해진 것일 뿐, 눈으로는 일레온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그가 엘리시아를 내려주었다. 발이 단단한 바닥을 딛자마자 엘리시아는 그를 타박했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뭐예요? 그리고 저걸 다 어쩌라고 저렇게 많이 사요? 너무 과해.”

말하는 동안 일레온은 그녀가 뭐라 하든 기세등등한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불어온 저녁 바람에 어스름하게 내리려는 어둠보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 아래로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선명하게 그의 마음을 내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태연하게 구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엘리시아는 무어라 하려던 말도 잊혔다.


“뭐예요. 정말.”

타박 같지도 않은 타박에 시종이 몰아온 말고삐를 받아쥐며 일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에게 과한 건 없어.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과분하거든.”

말이나 못 하면.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물이 드는 것처럼 그녀에게 옮았다.

그래서 마주 보고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함께 행복해졌다.


“말을 타게요?”

올 때 타고 온 마차 대신 말 고삐를 쥐고 있던 일레온이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나와 함께 말에 타주겠나?”

일레온의 손을 잡자 그는 가볍게 엘리시아를 말 위로 올려주고는 훌쩍 뒤로 올라앉았다.


“우와.”

잠깐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가게 앞의 번화가에 색색의 유리등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시야가 조금 높아진 것뿐인데 지척에 빛무리가 깔렸다. 일레온이 천천히 말을 몰자 환하고 예쁜 불빛들이 그들을 스쳐 갔다.


“너무 예뻐요.”

“야경을 볼 기회가 많지 않으니.”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온이 눈이 멀었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올 때 지났던 길은 이런 번화가가 아니었다.


“이렇게 깜깜해질 때 밖에 돌아다녀본 적은 별로 없어서요. 저번에 당신이랑 같이 식당에 갔던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때 갔던 곳도 예뻤는데.”

강제력이 불러온 불꽃이 그녀를 태우려 해서 데이트 도중에 쓰러졌었다.

같은 것을 떠올린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자 일레온이 고삐를 바짝 당기며 말의 옆구리를 찼다.


“이랴!”

자박자박 돌바닥에 편자가 닿는 소리를 내던 말이 그의 신호에 보폭을 넓히며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다물고 침착하게 안장의 앞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기절한 듯 잠에 빠져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일레온은 그레로사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를 안고 왔다. 꽤 긴 거리를 달리면서도 위험하게 한 적이 없으니 안심해도 좋을 터였다.


‘시원해.’

그렇게 마음을 놓자 쏜살같이 그들 옆으로 지나는 풍경이 빠르게 한적한 것으로 바뀌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빠르게 달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 걸음을 멈출 때쯤에는 엘리시아는 기분이 꽤 들떴다.


“여기가 어디예요?”

전에 갔던 식당의 운치 있는 자리에서 내려다보았던 것보다 반짝거리는 불빛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저택 뒤에 있는 산의 중턱 즈음.”

“정말요?”

엘리시아가 대공저가 보이는지 찾으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일레온이 픽 웃었다.


“대공저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워. 산세가 험해서 그쪽으로는 못 내려가. 반대편에서는 어느 정도 올라올 수도 있지. 사람들이 땔감이나 열매를 주우러 오기도 하고.”

“그렇군요.”

일레온이 고삐를 여유 있게 손목에 감더니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반지를 사서 나왔던 날. 그날도 오늘처럼 해가 저물고 어둑해질 때였어.”

등에 단단한 그의 가슴이 닿고 귓가에 까만 머리카락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도 어릴 때부터 기숙사에서 지냈고 전쟁터에 오래 있었으니 그런 걸 즐겨본 적은 없었거든.”

일레온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체향이 실린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수도 제일의 번화가라더니 꽤 장관이라 그대에게도 보여주고 싶더군. 신관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볼 일이 없었던 게 아닌가?”

“맞아요.”

“엘리시아. 그대가 혼란스러워했던 거. 나는 이해해.”

갑작스러운 말에 엘리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모른 척하거나 떠나려고 하거나 밀어내려 하는 그대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왜 그러는지, 어째서 내게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답답하게 구는지.”

“일레온.”

“지금은 알아. 그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야.”

엘리시아는 목 안쪽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일레온이 나직하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천히 상처가 가득한 심장에 닿았다.


‘잠깐은 미쳐 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엄마의 기억들을 그녀 자신의 전생으로 착각한 채 대공저에서 일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었다.

버티고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그냥 내 삶에 주어진 일이니까 하고 덤덤하게 무던히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이 도피할 정도로 진절머리가 났을까.


“누구인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 이 일이 끝나면 천천히 네 것이어야 할 것들을 모두 되찾게 될 테니까.”

“지금도 충분해요.”

그녀는 문득 일레온이 보고 싶었다. 등 뒤에서 단단하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처럼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듄샤의 신관 엘리시아로 살 때는 늘 자신이 허수아비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안 그러면 죽는다는 말에 더럭 겁을 집어먹고 타성에 젖어 살던 삶.

언젠가는 ‘엔딩’이 오긴 오는 걸까?

조난당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나무 파편에 매달리기라도 한 듯 자신의 의지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떠밀려갈 뿐.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원한 일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일레온을 사랑하고 그의 곁에 있고 싶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비어 있는 인생의 창고에 하나둘 가져다 쌓을 수 있겠지.

무언가를 제 뜻대로 거두어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게, 누구든 당연히 그렇게 살아왔을 일들이 엘리시아에게는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대되기도 했다.


“뭘 했다고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거야?”

일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제일 좋은 걸 가졌잖아요.”

“뭐?”

“당신이요.”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은 허를 찔린 듯한 숨소리를 냈다.


“음. 내가 그대의 것인가. 그래. 그렇지. 그렇긴 한데 그걸로 충분하다고 하기에는.”

일레온은 말할수록 무언가 애매한지 뒷말을 흐렸다.

엘리시아는 그런 그가 좋았다.

무엇이든 대단히 능숙하고 뛰어난 남자가 제게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말이다.


“얼른 돌아가요.”

둘만 있을 수 있는 데로.

작게 중얼거린 입속말도 귀신같이 알아들은 일레온은 빠르게 말을 몰았다.

어둑한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는 동안 무수히 많은 별이 뜬 밤하늘과 불야성을 이룬 수도의 야경이 한데 섞여 흔들렸다.

***

씻고 옷을 갈아입다 거울을 본 엘리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다. 나 왜 이렇게 낯설지?”

늘 보는 자신의 모습인데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있을 때면 무표정할 때가 보통이었다.


“일레온이 자꾸 그 표정이 싫다고 하니까 신경 쓰이잖아.”

그녀가 자신을 외면할 때의 얼굴이라면서 그가 질색한 탓에 엘리시아는 요즘 표정 관리에 힘쓰고 있었다.

입매를 조금 웃는 얼굴처럼 끌어올리자 거울 속의 자신이 은은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보였다.

제 외모가 상당히 예쁜 편이라는 걸 엘리시아도 알았다.

그걸 뿌듯해하거나 이점이라고 여겨본 적은 없었다.

왜냐면 신관으로 사는 은둔자의 삶에 예쁘거나 그렇지 않거나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척 신경 쓰였다.


“일레온이 너무 예쁘니까.”

누가 보았을 때 그와 자신이 잘 어울렸으면 했다.

데뷔탕트 날 아직 ‘로나’로 정신이 나가 있던 탓에 일레온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때도 귀부인들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소곤거린 걸 똑똑히 기억했다.

희고 고운 피부의 볼은 발그레하고 보랏빛 눈동자는 촛불의 불빛을 반사하며 빛을 냈다. 윤기 있게 흘러내린 블론드의 머리카락은 조금 전 곱게 빗질한 대로 허리께에서 찰랑거렸다.

거울을 보며 잠옷 앞섶의 끈을 묶으려던 엘리시아는 잠시 멈칫했다.

목덜미 아래쪽으로 긁혀있던 자리가 말끔해진 것이 보였고, 낫게 해달라는 제 말에 이 자리에 입술을 대던 일레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쳤어. 정말.”

어쩌자고 그에게 그런 도발을 했단 말인가.


“일레온이랑 있으면 점점 이상해져.”

야한 짓을 하는 그에게 이런 것도 옮는 건가 책임을 떠넘기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얼마 후면 정말 그와 결혼할 텐데.”

정식으로 혼인한 부부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밤의 의례가 이제는 목전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몇 번인가 일레온과 자신의 사이가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심이 대단한 남자였다.

선을 함부로 넘는 것이 그녀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한 일이라고 단정 짓고는 쏟아내고 싶은 애정을 누르며 참느라 애썼다.


“그라면 분명 내가 예쁘다고 하겠지만.”

엘리시아는 요즘 따라 평생 신경 써본 적이 없는 제 겉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귀족 아가씨라면 자신을 가꿀 텐데.”

갈아입을 옷과 거울이 놓인 욕실의 전실에는 화장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는 온갖 미용에 좋은 향유와 미용수가 두루 갖춰져 있었다.

하듄샤 신관의 일상에는 없었던 물건인지라 내내 손도 대지 않았지만 엘리시아는 은은한 장미향이 풍기는 미용수를 열어 얼굴에도 바르고 공작저의 하녀들이 시중을 들어주었던 걸 떠올리며 머리카락에도 조금 발랐다.


“좋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생기있어 보여 엘리시아는 만족했다.

대공비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시아는 자잘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일레온이 외출할 때마다 무언가를 사들이는 바람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금방 어디에 뭘 뒀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다 하듄샤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보퉁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안에서 나온 물건들은 아주 어릴 때 하듄샤에 들어간 그녀가 내내 써왔던 손때 묻은 물건이었다.

일레온은 뭐든 그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려고 했고 그것들 대부분이 사치스러웠다.

그러니 낡고 오래된 물건들을 두어도 쓸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정리해서 버리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고 망상노트.

<그와 함께하고 싶다. 일레온의 옆에 있고 싶다. 그런데 그가 실망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엘리시아는 고민하지만 곧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적어넣은 글을 보며 엘리시아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부끄러웠다.


“이런 걸 썼지? 하여튼 글은 나중에 보면 다 흑역사야.”

엘리시아는 책상에 엎드려 노트에 적힌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때는 이 태도가 잘못됐어. 그의 옆에 있고 싶다면서 하듄샤로 도망갔잖아.”

그레로사에서 일레온의 옆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또렷해졌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할 것.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적어놓고 보니 웬일로 흐뭇해서 배시시 웃다가 엘리시아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공비의 방으로 찾아온 일레온이 그것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깜찍한 짓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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