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깜찍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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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깜찍한 짓
2023.04.01.
“깜찍한 짓을 하네.”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깔고 엎드린 노트를 살살 빼내어 앞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푸훗.”
노트에 적힌 글귀를 살피다 일레온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어느 날 엘리시아는 사고로 기억을 잃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일레온과 마주친다.>
재빨리 소리를 죽이자 엘리시아는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레온은 기억을 잃은 엘리시아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해줬다. 방은 따로 썼다.>
어쩐지 글자의 사이사이에서 삐죽삐죽 엘리시아의 반항심이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반항 노트군.’
아주 어릴 때부터 하듄샤에 들어가기 위해 마리엘라에 의해 강제로 빙의자인 척 했다던 엘리시아. 그런 그녀가 마리엘라가 절대 안 된다 하지 말라 질색할 것들만 모아서 적어놓은 듯 했다.
‘이렇게라도 속풀이를 해야 했겠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을 안고 감정도 생각도 없는 사람인 양 인형 같은 눈동자로 그를 보던 엘리시아를 떠올리자 가슴이 쓰렸다.
여전히 편할 리 없는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있는 엘리시아의 머리카락을 살짝 거두어 귀 뒤로 넘겨주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으응.”
미약한 소리를 내고는 다시 조용해진 여자를 보며 일레온은 펜을 집어 들었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할 것.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엘리시아가 마지막으로 적어넣은 문장 아래에 유려한 글씨가 휘갈겨졌다.
<좋아. 잘하고 있군.>
이 노트를 훔쳐보았다는 걸 그녀에게 비밀로 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가 적은 글귀를 보고 펄쩍 뛸 엘리시아를 생각하면 벌써 소리 내어 크게 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방을 따로 썼다니? 어려서 뭘 몰랐군.”
마리엘라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이 노트의 쓸모라면 무조건 한 방을 같이 썼다고 적었어야 했을 텐데.
“나의 바람이기도 하고.”
일레온은 조심스레 의자를 뒤로 빼고 엘리시아를 안아 올렸다.
“레이디가 저어하던 일을 저지르러 가볼까?”
일레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안고 제 침실로 향했다.
내일 아침에 제 옆에서 눈을 뜬 엘리시아가 무어라 할지 생각하면 오늘 밤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
「난봉꾼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일레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매우 금욕적인 편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로 떠나 사내들만 득실거리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바로 기사단장이 되어 전쟁터로 향했기 때문에 여인들과 접점이 별로 없는 생활이었다.
사춘기의 혈기왕성한 나이에도 그다지 이성에 대해 호기심과 충동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일레온은 자신이 오데르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신의 선택받은 후손에게 나타나는 우월함의 증명.
그는 보통 아이들이 떼를 쓰고 울 법한 나이에도 또렷한 이지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이든 남들보다 빨리 깨닫고 인지했고 몸의 발달과 성장도 빨랐다.
그러니 또래들이 가질 호기심 따위 궁금하기도 전에 이치로 깨달아버린 데다 어떤 여인을 보아도 마음이 동하는 기분이 전혀 없는 건 어쩌면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로 저를 낳아놓은 어머니 레브를 탓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요즘 들어 연애하거나 사랑을 속삭이고 있거나 뭐 그런 꿈을 자주 꾸는데 그것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욕구불만의 발로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꿈속의 자신이 하는 짓이 어느 정도여야지 영 제가 할 것 같지 않은 행동만 골라 하니 꿈에서 깰 때마다 자괴감이 느껴져서 기분이 별로였다.
일레온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가 제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까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자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독 창백해 보이는 흰 피부가 보였다.
그 아래 검고 단정한 눈썹과 남자 치고 또렷하고 긴 속눈썹 아래로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적안이 보였다.
「정말 안 어울리는군.」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자신이 조금 전 꿈에서 잠든 여인을 제 방 침대로 옮겨 눕혀놓으며 그녀의 이마에 뺨에 입을 맞추며 듣지도 못할 이에게 속삭였던 밀어를 떠올리자 등과 팔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필 오데르인 탓에 우월한 그의 머리는 잠에서 깨어도 무슨 말을 했는지 잊지도 않았다.
거울에서 눈을 뗀 일레온은 새삼 제 침실을 돌아보았다.
「너무 생생해.」
그래서 더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꿈이 아니라 진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선명한데 이 공간에서 꿈에 나오는 그 여자. 엘리시아 유테르만 지워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보다 왜 자꾸 그 여자가 나오는 거지?」
그저 욕구불만이나 충동이라면 다른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치 하나로 이어져서 흐르는 이야기를 엿보는 것처럼 꿈속의 자신은 그 여자만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때로는 마음이 상하고, 서운하고, 가슴이 벅차기도 하는 연인 사이의 감정들이 짧은 꿈의 단락에 녹아있었다.
그것이 잠에서 깨는 순간 일시에 밀려들어서 그답지 않게 피곤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가슴이 술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데르인 그가 겪는 기묘한 일들은 모두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오데르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에게 알려지는 건 금기였다.
이런 꿈을 꾼 지 좀 되었지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의문을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레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답답하다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그가 허락하자 집사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어쩐 일로 그리 곤하셨습니까.」
「무슨 말이지?」
「로벨린 영애가 응접실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전하께 일어나십시오 하고 문을 두드려도 깨지 않으셔서 어찌나 곤란하던지.」
「자네가 나를 깨웠다고?」
그는 남들보다 기척이 예민한 편이었다.
「예. 문을 두드리고 고하였으나 말씀이 없으셔서 혹 편찮으신가 하여 이번에도 말씀이 없으시면 허락하시지 않아도 살피려 하였습니다.」
깨우기까지 했는데 일어나지 않았다니? 집사의 말을 듣는 일레온은 충격받았다.
정말 내게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실은 오늘따라 제가 빠져든 잠이, 그래서 무의식에 가라앉은 꿈이 깊다고 느끼긴 했다.
오데르는 분간이 가지 않는 꿈속에서조차 그런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엘리시아. 넌 왜 내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해?
잠든 여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그녀를 끌어안자 제 맨 가슴 위로 쏟아지던 달빛을 품은 블론드의 화사한 머리카락이.
참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봐 줘.
기어이 은은한 장미향이 맴도는 도톰하고 보드라운 입술을 슬쩍 훔치는 제 모습이.
세게 안으면 꺾일 듯 가느다란 몸에서 전해져오는 체온이 생생해서 혹시 그 꿈이 깨지 않길 바랐나.
나도 모르게 말이다.
그때였다.
두근.
심장이 낯선 소리를 냈다.
몸 안쪽의 장기가 움찔거리며 내는 감각에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굳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에 열이 올랐다.
「전하. 전하?」
「어?」
「어디 안 좋으십니까?」
거울을 보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고 일레온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아니다. 금방 채비를 하고 나갈 테니.」
집사가 우물쭈물하며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일레온이 한마디 덧붙였다.
「영애의 대접에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될 거다.」
「네. 주인님.」
그제야 베르나르가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물러갔다.
「후. 정신 차려.」
이렇게 저답지 않게 굴 이유가 없다.
한낱 꿈일 뿐.
제 눈을 뜨게 해 준 고마운 이가 모처럼 대공저에 방문한 날이었다. 그런 사람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이런 실례가 없을 것이다.
「한동안 집사가 영애 이름을 말하면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는데.」
집사의 발음이 이상한 탓이었나. 지금은 ‘로벨린’이라는 아가씨의 이름이 또렷하게 잘만 들렸다.
일레온은 빠르게 외모를 정돈하고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향했다.
「대공 전하.」
단정한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는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른 나이였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동그란 얼굴이 귀염상인 미인이 응접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로벨린 영애. 늦어서 미안하군.」
「아니에요. 대공저의 차가 맛있어서 천천히 즐기고 있었어요.」
그를 보며 생글거리는 여자는 온몸에서 설레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일레온은 어쩐지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여태 그가 제게 관심을 갖는 귀족가 여식들을 마주할 때 가장 많이 느끼던 감정이었다.
로벨린은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제국 끄트머리의 깡 시골, 외가의 별장에서 자랐다고 했다.
공기가 좋고 물도 맑고 자연이 몸을 치유해줄 만한 약초가 사방에 널린 환경이라나.
그녀가 카페에서 건달들과 시비가 붙은 걸 도와주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일레온이 비록 눈이 멀었다 한들 예민한 소드마스터의 감각은 숨 쉬고 움직이는 것들의 기척은 보지 않고도 능히 잡아낼 수 있었다.
로벨린이 도와준 답례를 하겠다며 겁도 없이 수도에 눈먼 짐승이 울부짖는다는 대공저로 찾아왔다가 눈을 낫게 할 약초가 저택 후원에 자라있다는 걸 알려준 것 또한 우연이었다.
우연에 더한 우연.
그걸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갓 어른이 된, 일레온의 눈에는 꼬마숙녀 같기만 한 아가씨는 그 만남에 도취된 것처럼 느껴졌다.
일레온은 그녀와 달랐다.
비참하고 비루하게 이어지던 삶을 끝내준 이에게 고마웠으나 그게 다였다.
그런 감사는 평생을 다해 갚아도 모자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신을 넘겨줄 수는 없다.
로벨린 영애의 집안이 몰락한 남작가라는 걸 알고 일레온은 상당한 거금을 들여 그 집안의 빚을 탕감하고 상단에 줄을 대어주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드레스도, 손목에서 빛나는 금팔찌도, 머리를 장식한 실크 레이스 리본도 앞으로는 쭉 로벨린의 인생에 마르지 않게 제공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결혼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로벨린이 좀 더 자주 그를 만나고 싶어 하고 대공저에 잦게 발걸음을 하려고 할수록 그런 생각은 확고해졌다.
눈을 낫게 해 주었다는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인연을 끼어도 여인을 대하는 일레온의 심장은 돌덩이 같았다.
그것이 가문과 가문의 이득을 위해 이루어지는 정략혼에서조차 여자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걸 일레온은 많은 역사 속에서 읽은 바였다.
차라리 로벨린이 그의 마음을 얻길 바라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대공비에 앉혀주었을 것을.
「오늘 영애를 보자고 한 건 말이지.」
아름다운 아가씨가 눈을 빛내며 그를 보았다.
「나는 다음 주에 전선으로 복귀하려 하오.」
「……네?」
로벨린이 놀란 듯했지만 일레온은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전쟁을 준비한다는 건 바쁜 일이지.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영애를 만나긴 힘들 것 같아 작별 인사를 하려고 불렀소.」
「대, 대공 전하. 그 말씀은…….」
로벨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가 당혹하여 붉게 물들었다.
「남작은 훌륭한 사람이오. 선대 남작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뿐이지. 앞으로 가문의 일이 영애의 마음에 그늘이 되지 않았으면 하오. 영지 재건 문제만 마무리되면 영애에게도 좋은 혼처가 들어오리라 믿소.」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일레온은 할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공 전하. 잠깐만요.」
로벨린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저어. 제게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그런…….」
당황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영애가 묻고자 하는 걸 일레온은 알았다.
「없소.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