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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네가 없는 꿈 (131/151)


131. 네가 없는 꿈
2023.04.05.



 


「없소.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런 대답은 여지를 두지 않는 게 옳았다. 게다가 일레온은 로벨린의 일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 꽤 오래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칼같이 마음을 정하는 평소 성격으로 볼 때 그래도 은인이라고 고심했기에 여태 시간이 걸렸다.

낙담하는 듯한 여인을 뒤로하고 그는 빠르게 응접실을 벗어났다.


「전하. 전하.」

집사가 황급히 쫓아왔다.


「로벨린 영애를 이렇게 보내시면 어떡합니까?」

「그럼. 내가 억지로 결혼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일레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니. 그래도 은인인데.」

「은인이면 다 결혼해야 하나?」

「전하께도 좋은 일 아닙니까? 이러다 대공가의 후사는 어찌 이으시려고. 레브 전하께서 얼마나 기대하셨는지 아십니까?」

일레온은 집사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런 순간에조차 머릿속을 떠도는 건 꿈속 엘리시아의 목소리였다.

사랑해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고마워야 할 이를 앞에 두고도 생기 없는 바윗덩이 같은 제 심장도 뛰게 할 수 있는 이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녀는 이미 고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순금의 꽃송이들에 둘러싸여 누워 있던 엘리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상해를 입은 듯한 멍 자국을 보고 눈을 찌푸렸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었는데 일레온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테르 공작부인께 편지를 하나 보내주게.」

「네? 유테르 공작부인께요?」

의아한 얼굴을 하는 집사에게 일레온은 편지를 한 장 짧게 적어 건네주었다.


「저택 매입은 이미 끝났는데요? 수리도 들어갔고요.」

「그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야.」

얼떨떨한 얼굴로 베르나르는 편지를 가지고 사라졌다.


「뭘 물어보려 한 거지?」

그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테르 공작부인을 만나면 뭘 어쩌려고 그녀를 만나고 싶은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엘라 유테르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어떤 예감이 들었다.

유테르 공작저를 둘러보러 갔던 날 그를 보던 공작부인의 눈빛.

처음 본 사이인데도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던 보랏빛 눈동자.

제게 벽 속에 숨겨둔 노트를 건네주며 읽어달라던 귀부인의 간절하고 처량한 얼굴이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공작부인 때문인가?」

그때 공작부인과의 만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무의식의 자아가 뒤늦게 엘리시아에 대한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전선으로 복귀할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일레온은 공작부인의 소식에 신경이 기울어 있었다.

덕분에 일레온 아래에서 빡세게 구를 예정이었던 기사들이 ‘대장이 그래도 큰일 한 번 겪고 나니 사람이 됐군. 숨 쉴 틈 정돈 주고 말이야’ 하며 한결 수월해진 전출 준비를 하며 수군 댈 정도였다.

그 때문에 부관 세드릭이 몇 번이나 일레온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날 늦은 오후 집사가 황급히 가져온 전보에는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실려 있었다.


「전하. 공작부인께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

전날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피곤했는지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으응.”

엘리시아는 나른한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일레온의 침실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제 분명히 대공비의 호화로운 욕실에 가득 물을 받아 씻고 미용수로 단장까지 하지 않았던가. 입고 있는 잠옷도 분명 제 방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그러고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오랜만에 망상노트를 보았다.

망상노트!

그걸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서 읽다가 잠이 들었나?

그런데 어째서 대공비의 방이 아니라 눈만 뜨면 일레온의 침실이냐고!

엘리시아는 당황스러웠다.


‘그보다 일레온이 그걸 본 건 아니겠지?’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으으.”

옆에서 일레온이 앓는 듯한 신음이 들려 엘리시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레온? 어머, 이 땀 좀 봐.”

그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급한 마음에 그의 이마를 맨손으로 훔쳤다. 그런데 손목까지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땀이 흥건해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레온. 일어나 봐요.”

그나마 열은 없어서 다행스러웠지만 기척에 예민한 그가 이렇게 흔들어도 깨지 않는 일이 없었기에 엘리시아는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곧 그가 가늘게 눈을 떴다. 초점이 돌아오지 않고 크게 놀란 듯 동공이 열려 있는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당신 땀을 너무 많이 흘렸어요.”

일레온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또 그 자세로 멍하니 잠시 그대로 있어 멋들어진 조각상 같은 자태로 엘리시아의 걱정을 더했다.


“엘리시아.”

“네?”

“이리 와.”

수건이라도 가져다 줄 생각으로 침대를 벗어난 엘리시아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얼른 그를 안아주었다.


“무슨 꿈이라도 꾼 거예요?”

“아니.”

오데르는 아프거나 하지 않는 게 보통이라며 이렇게 안 좋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대공저에 처음 왔을 때 일레온이 눈이 멀고 자포자기한 태도 때문에 피폐해 보였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아파 보인 적은 없었기에 엘리시아는 그가 더욱 염려되었다.


“아니. 아, 그래. 맞아. 꿈을 꿨어.”

일레온이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요?”

“네가 없는 꿈.”

분위기를 바꿀 셈으로 장난스레 물은 말에 일레온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인데도 너무 싫었어.”

좀체 안 좋은 기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그를 보며 엘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 여기 있어요.”

그를 더 꼭 안고 몸에 힘을 빼고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당신이 버텨주기로 했잖아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구 튀어나왔던 진심이었다.

그가 저를 붙잡아준다면 거기에 기대서 일레온의 옆에 머물고 싶다고 말이다.

힘도 없고 할 줄 아는 거 없는 그녀 대신에 그가 애써주는 걸 미안해하기 보다는 고맙게 그를 사랑하는 걸로 갚겠다고.


“뭐 그런 꿈을 꾸고 그런대.”

엘리시아는 일부러 소리 내어 후후 웃었다. 그러자 일레온의 굳은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씻는 게 좋겠어요. 땀을 너무 흘려서 머리까지 젖을 정도라니.”

“씻겨줘.”

그가 제게 체중을 실어 매달리자 엘리시아는 몸이 휘청하는 기분이 들었다.


“힘이 없어.”

“장난치지 말아요.”

“정말인데. 그대는 내 말을 믿지를 않는군.”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그러면서도 엘리시아는 그를 일으켜 욕실로 데려갔다.


“머리만 감겨줄게요.”

절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일레온의 머리와 허리 뒤로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속은 기분이 드는데.’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결국 엘리시아는 일레온이 씻는 동안 욕실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

그레로사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하도시를 가득 채웠던 물이 시간이 지나자 점차 수위를 낮추며 빠져나갔다. 이대로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다시 사람들이 머물며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수도에서 일레온의 조력으로 보내져온 말과 마차로 꽤 많은 이들이 하듄샤로 돌아갔다. 수장고가 있던 내부 정원 가운데가 아래로 꺼져 가라앉았지만 그 후로 추가로 무너진 건물은 없고 지반만 내려앉아 그것도 황궁에서 보내준 건축 기술자들이 이리저리 궁리를 해 지금은 사람이 머물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사람들이 수도로 돌아가고 남은 이들은 괴한에게 공격당해 회복 중인 알레한드로와 로벤, 에쇼를 비롯한 몇몇 이들과 원래 그레로사에서 지내던 이들뿐이었다.

은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카리나가 죽과 과일을 쟁반에 받쳐 들고 부지런히 걸었다.


 


“대신관님.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카리나는 알레한드로 대신관의 간호를 돕고 있었다. 흰 신관복을 입고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를 알레한드로는 반갑게 맞았다.


“고맙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는 여기서 하는 일도 없는 걸요.”

알레한드로가 소나텍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폭로한 날, 카리나 역시 암시가 풀렸다.


「소나텍이 제게 암시를 걸었어요.」

 
얼마간 정신이 없어서 카리나의 존재 자체를 잊었다. 스스로 밧줄을 풀고 기진한 얼굴로 나타난 카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엘리시아를 없애라고요.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엘리시아는 저와 친구가 되어주었는데 제가 그녀를 해쳐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의식이 무언가로 꽁꽁 매인 듯 몸도 언행도 제 뜻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더란다.

일레온이 암시에 걸려 카리나에게 구애할 때 그가 말해준 상황과 똑같았다.


「한번 푸는 데 성공한 암시는 다시 걸리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로벤의 말에 카리나는 죄인 취급을 벗어났다.


「하지만 일레온이 널 어떻게 대할지는 몰라. 그는 엘리시아 일이라면 감정적이 되니까 암시 때문이라고 해도 카리나를 원수처럼 대할지도.」

 
에쇼가 풀려난 그녀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카리나는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자유였다.

전처럼 꽁꽁 묶여서 죄인처럼 지내지도, 먹을 것에서 차별을 받지도 않았다.

기력을 되찾고 그녀는 알레한드로의 시중을 자처했다.

대신관이 해야 할 일을 나누어 맡아 처리하느라 다들 바쁜데 그녀만 노는 일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나서서 알레한드로를 돌보길 자처하자 그레로사에 남아 있던 남은 신관들은 모두 그녀에 대한 나쁜 인상을 지웠다.

신관 엘리시아를 협곡으로 밀었다던 충격적인 사실보다 실제로 눈앞에서 병간호에 힘쓰는 선량한 카리나가 그들이 보는 진짜 그녀라고 믿은 것이다.

알레한드로가 죽과 과일을 먹는 동안 카리나는 옆에서 그의 말동무를 했다.


“내일부터는 죽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셔도 괜찮을 거라고 해요.”

“그렇군.”

“그러면 기력이 훨씬 더 빨리 돌아오실 거예요. 이따 오후에 산책 하셔야 해요. 산책하실 시간에 제가 도우러 올게요.”

싹싹한 카리나의 덕분에 알레한드로는 한결 회복이 빨라졌다.


“내가 예언서만 지켰어도.”

알레한드로가 한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대신관님도 소나텍에게 조종당하신 거잖아요. 저도 그 일을 겪었고요. 이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완전히 그에게 의식을 잠식당해서 시킨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고요. 거스를 수도 없고요.”

“자네가 예언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아야 할 여인인데.”

“그 예언서는 이미 틀렸어요.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사랑하고 저와 맺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로벤에게 망가진 엔딩에 대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쏟는 신관들을 잠재운 건 카리나였다.


「저는 예언서대로 살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몇몇은 쓰러지듯 주저앉았고, 의외로 꽤 많은 이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정해진 엔딩을 보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가능성도 똑같이 존재해. 그래서 실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 이곳 생활도 나쁘지 않고.」

 
신관으로 오래 지내다 보니 정말로 신관이 된 것처럼 고매하게 망한 엔딩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다.

카리나는 알레한드로가 먹고 난 식기를 깨끗이 씻어 얹어두고 그녀가 쉬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멍청이들. 소나텍이 한 말대로 되었잖아?”

그녀가 ‘암시’에 걸려 그리하였다고 말하면 철석같이 믿을 거라더니.

소나텍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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