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주인님이 못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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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주인님이 못됐네요
2023.04.08.
“망한 엔딩을,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도 받아들이겠다니.”
일레온과 엘리시아의 사랑을 인정하겠다고 말이다.
그게 말이 되나?
제 것이어야 할 자리를 왜 남들이 저들끼리 인정하네 마네 하냔 말이다.
카리나는 분노했다.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겠다 쫓아오던 사비엘을 피해 도망치다가 낭떠러지로 굴렀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일로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잃었다.
사비엘이 그녀를 꼬여내기 위해 속삭였던 많은 약속들 중 한, 두 가지만 지켜졌더라도 황손으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을지도 모를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와 함께 사비엘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더한 바닥을 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엘리시아를 협곡으로 민 후에 겪은 죄인 취급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카리나를 비참하게 했다.
「엘리시아와 카리나 당신은 서로 대척점에 선 존재입니다.」
엘리시아가 일레온과 행복해졌기 때문에 지금 그녀가 불행한 것이다.
온갖 불행을 지고 죽음을 맞이했어야 할 엘리시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카리나 자신이 대신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분명 예언서에는 사비엘의 아이를 갖고 죽임당할 사람이 엘리시아라고 적혀 있었는데!”
카리나는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내 걸 빼앗아간 네가 행복한 꼴을 두고 볼 줄 알아?”
그녀는 형형한 눈빛으로 이를 갈았다.
“카리나. 잠깐 나와서 도와줄 수 있어?”
누군가 방문 밖에서 그녀를 부르자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전 살기등등하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네. 물론이죠.”
상냥하게 대답하며 방 밖으로 나오는 그녀를 보며 중년 여인으로 보이는 신관이 미소지었다.
“어쩜. 카리나는 천사야. 정말.”
그녀가 악마의 얼굴도 가졌다는 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
엘리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후원으로 향했다.
“엘리시아!”
꽤 떨어진 뒤에서 일레온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체 했다.
달음박질해서 꽤 커다란 나무의 뒤로 달려가 숨듯이 등을 대고 기대고 나서야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낮에 눈뜰 때까지만 해도 그가 몸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는데.
그래서 반쯤 속아주는 마음으로 그가 씻는 걸 거들어주기까지 했는데.
씻고 나오자마자 일레온은 물기만 대충 닦고는 엘리시아를 도로 침대로 끌고 갔다.
그 사이에 집사가 흐트러지고 일레온이 흘린 땀으로 엉망이 되어 있던 침대 시트를 멀끔하게 갈아놓은 것이 왠지 더욱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직 제대로 식도 올리지 않았건만 이래도 되는 걸까. 수시로 한 침대에 머무르는 걸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막 씻고 나와 뽀드득해진 일레온이 그녀의 위로 그늘을 만들자 누운 채 올려다본 남자가 너무 근사해서 그런저런 민망함이 가시려던 순간.
그가 그녀를 꼼짝 못 하도록 침대에 잡아 누른 손목 아래에 무언가 빳빳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어제 그녀가 펴보다 잠들었던 망상노트였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할 것.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제 새로 적어넣은 한 줄 아래로 일레온의 글씨가 보였다.
<좋아. 잘하고 있군.>
그대로 엘리시아는 도망쳤다.
“엘리시아!”
지척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리시아는 그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드레스 자락을 모아쥐고 웅크려 앉았다.
‘부끄러워서 미칠 거 같아.’
일레온에게 그를 만나기 전부터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이런 식으로 그녀가 그를 떠올려보곤 했다는 걸, 마리엘라의 노트를 읽고 알았던 원작 속의 일레온을 상상해보곤 했을 줄은 몰랐겠지.
그걸 이렇게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될 것도.
‘엄밀히 따지면 일레온을 생각하면서 쓴 게 아니잖아.’
일레온은 클레벤트 대공이자 오데르인 존귀한 존재였고, 그녀가 노트에 적은 ‘일레온’은 그가 아니라 정말 상상 속의 일레온이니까. 실제로 알게 된 일레온과 망상 속의 일레온은 다르다고 봐야 옳았다.
동화책 속 동명이인 왕자님 정도?
그래서 지금 느끼는 부끄러움이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일레온은 작정하고 그녀를 놀릴 생각으로 그렇게 티 나게 글귀도 적어넣고 손수 노트를 챙겨다 침대에 두었을 테니 말이다.
“엘리시아.”
“저리 가요.”
그녀는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나 보란 듯이 그렇게 펼쳐놓은 게 아닌가.”
예상하지 못한 적반하장 태도에 엘리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일레온은 바로 사과했다.
“엘리시아.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그 와중에 그의 얕은 수작에 금방 넘어갔다는 생각에 엘리시아는 뒷목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신 보라고 쓴 거 아니에요.”
“알아.”
“그건 그냥 어릴 때.”
변명조로 할 말이 아니지만 엘리시아는 억울했다.
“혼자 심심할 때.”
“내 생각을 했어?”
“당신 생각을 왜 해요? 아니거든요? 그건 엄마가 얘기해준 일레온에 대한 거니까 당신이 아니잖아요.”
“그게 예언서에 적힌 나잖아. 우기지 마. 엘리시아.”
“우와. 정말 기가 막혀. 일레온. 그거 알아요? 당신은 숙녀에 대한 매너가 꽝이에요.”
엘리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숲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힘주어 아무리 빠르게 걸으려 해도 곧 일레온에게 붙잡혔다.
“화내지 마. 엘리시아. 너무 좋아서 그랬어.”
좋아서 그랬다고?
엘리시아는 멈칫했다.
“그대가 그렇게 예전부터 날 생각해줬다는 게 신기해서. 혼자 있을 때도 나와 함께하는 날들을 상상해줬다는 게 기뻐서. 나도 한 줄 보태고 싶었던 거야.”
“나빠.”
“잘못했어.”
“그럼 앞으로 이걸로 놀리면 안 돼요. 알았죠?”
“놀리긴. 나머지 자리에는 내 바람도 같이 써줘.”
엘리시아가 허리에 둘러져 있는 그의 팔을 풀고 뒤를 돌았다.
“뭐라고 쓰면 좋겠어요?”
“엘리시아와 일레온이 결혼하는 날에는 날씨가 매우 맑고 좋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하자 그제야 수치가 조금씩 가셨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신부를 보고 감탄했다.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와중에 어린 엘리시아가 적어놓은 말투를 따라 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녀는 주먹을 날렸지만 일레온은 웃으며 그것을 피했다.
“진짜 얄미워.”
“사랑은 한 길이 아닌 거야.”
개똥철학 같은 소리에 엘리시아가 대체 무슨 소릴 하나 싶어 그를 보았다.
“달콤하게 매료되는 한 가지 감정이 아닌 거지. 때론 밉기도 원망스럽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여러 갈래 길로 오는 감정이라더군.”
“누가 그런 얘길 해요?”
“베르나르가.”
그 유능한 집사가?
“그대가 유테르 공작저에 머물던 시절에 해만 뜨면 보러 가려 드는 내게 그러더군.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사랑이 오는 길은 한 길이 아니니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마차를 새벽부터 준비하기가 귀찮았나 싶기도 하지만.”
“베르나르는 미혼이잖아요.”
“그래도 내 연애 상담을 할 정돈 되더군.”
“뭘 상담했는데요?”
엘리시아가 묻자 일레온이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대가 매일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고. 대공비를 서둘러 맞아야 할 것 같으니 휴일에도 쉬는 날 없이 일 좀 하라고.”
“주인님이 못됐네요.”
“그만큼 돈을 많이 주잖아.”
“양심도 없고.”
“악덕 가주라는 걸 알았으면 눈치껏 입술이라도 허락해주시지요. 레이디.”
엘리시아가 눈을 감자 일레온이 천천히 입술을 물었다.
맞닿은 두 입술 사이로 그들은 서로를 탐했다.
빽빽한 숲 뒤로 일찍 떨어지는 해 탓에 일찍 땅거미가 지자 그제야 겨우 떨어졌다.
“장미향이 나는군.”
열기와 습기를 머금은 엘리시아의 입술을 엄지로 훑으며 일레온이 중얼거렸다.
“원래 그대에게서 나던 향을 좋아했는데.”
“이 냄새는 별로예요?”
엘리시아가 되묻자 일레온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는 체리블러썸 향기가 나는데. 싫은 건 아니야.”
“아, 그게 뭘 좀 발라서.”
“발랐다고?”
그가 감각이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줄은 알았지만 이럴 때면 오데르구나 실감했다. 어제 밤에 바르고 잔 미용수의 장미향은 지금은 그녀에겐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돈데 이렇게 반응하다니 신기할 정도였다.
“목욕하고 바른 미용수에서 장미 냄새가 났어요.”
“그렇군. 갑자기 그런 걸 왜 바른 거지?”
“그야…….”
뒷말을 흐리자 일레온이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뻐지고 싶어서……요.”
“뭐?”
“원래 결혼식을 앞두면 다들 가꾸고 신경 쓰고 그런 걸 한 대요.”
항변하듯 덧붙이자 일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됐어. 바르지 마. 그런데 신경 쓸 것 없어.”
“하지만 결혼식 날에는 신부가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던데. 한 달 전부터 매일 향유를 바른다고 했어요.”
“누가?”
“이리스가요.”
“이리스도 아직 미혼이잖아. 게다가 신관이고.”
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대가 제일 예뻐. 엘리시아.”
일레온은 장미향이 별로인가보다. 이렇게까지 뭘 바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줄이야.
“정말요?”
그렇지만 또 그가 말하니 그런가 싶기도 했다. 괜한 짓이라면 번거롭게 뭘 더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그대가 좋아하는 일만 하기에도 바빠.”
당신한테 예뻐 보이고 싶은 거잖아요?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미 정답을 내놓은 셈이었다.
“알았어요. 무리해서 하지는 않을게요. 신부들은 다 한다길래 신경 써야 하나 싶었던 거예요.”
“그대가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아. 안 해도 될 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거지.”
그러니까 장미향이 싫다는 말이네.
엘리시아가 팔을 들어 제 몸에서 풍기는 체향을 맡아보았다. 별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가 다르다고 단번에 말할 정도라니 남이 느끼기엔 다를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일레온.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천천히 걷고 있던 그가 발을 멈추었다.
“저 유테르 공작저에서 좀 지냈으면 좋겠어요.”
“뭐?”
어제 노트를 적다가 문득 마리엘라와 질리언을 떠올렸다.
그녀를 낳아주신 부모님.
정해진 운명의 흐름 속에 휘둘려서 죽게 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여태 애써온 분들.
그런데 엘리시아는 정작 제 부모를 잘 몰랐다.
어릴 때 하듄샤로 간 엘리시아가 커서 공작저에 머무른 건 정신이 도피하고 있던 로나 시절의 며칠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마리엘라가 일레온의 구혼장을 거절하라고 한 일 때문에 하녀의 옷을 빌려 입고 가출해버리지 않았던가.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엘리시아는 쭉 대공저에 머물게 되었는데 바로 얼마 후면 결혼식이었다.
“부모님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었어요. 하듄샤에서만 있었고 행방불명이 되어서 계속 걱정하셨을 텐데. 저를 겨우 찾았는데 내가 당신 때문에 집에서 도망쳤잖아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손을 잡았다.
“결혼하고 나면 저는 유테르가 아니라 클레벤트가 되죠. 출가한 딸이 친정에 가는 건 느낌이 다를 거예요.”
일레온이 제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엘리시아는 가장 좋아하는 건 일레온이라는 것 외에 선뜻 콕 찍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기본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다 해본 것, 다 겪어본 것에서 삶의 경험치가 매우 낮았다.
이렇게 결혼하고 나면 평생 마리엘라나 질리언에 대해서도 모르고 살게 되지 않을까?
레브와 마리엘라가 합심해서 결혼준비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제 예상하고 있는 결혼식 날이 2주도 남지 않았다.
“잠깐이니까. 이제 당신의 힘을 나누어 받아 강제력 때문에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해해줘요. 응?”
말이 없는 일레온의 손등을 슬슬 어루만지며 묻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시아. 역시 내게 화가 났던 거지?”
마치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