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유테르의 낙원에서 (133/151)


133. 유테르의 낙원에서
2023.04.12.



 


“엘리시아. 역시 내게 화가 났던 거지?”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도발하고 놀리던 남자가 대번에 시무룩한 기색을 했다.


“아니에요. 일레온. 내가 왜 당신에게 화를 내요?”

엘리시아는 태연하게 말하면서 일레온을 살폈다. 그렇게 제가 펄펄 뛸 때만 해도 뻔뻔하게 ‘잘못했다 안 했다’로까지 놀리더니 그녀가 공작저로 가겠다고 하자마자 이렇게 기가 죽을 줄이야.


“정말로 부모님과 시간을 좀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 그런 마음으로 꺼낸 얘기였는데.

일레온이 과하게 풀이 죽자 스멀스멀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일레온. 서로 사랑하면 닮는다는데 당신의 못된 장난도 내가 닮잖아요?

엘리시아는 웃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꾹 눌렀다. 이건 다 저를 놀리길 좋아하는 일레온 탓이었다.


“며칠이나?”

“결혼식 전까지요.”

“뭐? 2주나? 말도 안 돼!”

그가 격렬하게 반응할수록 엘리시아는 더 신이 났다.


“말이 안 되긴요. 일레온. 원래 결혼식 전에 이렇게 같이 지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가문의 후계자로 철저하게 예법을 배웠을 그가 엘리시아의 거취 문제만 나오면 이렇게 막무가내였다.


“보러 가는 건 괜찮지?”

엘리시아가 철벽 치듯 말을 딱딱 자르자 일레온이 물었다.

그 순간 엘리시아는 미약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째서 자신이 매번 일레온의 손바닥 위인 것처럼 그에게 휘둘리는지 말이다.

마음이 약하고 그를 사랑하는 엘리시아는 쉽게 일레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가 바라는 일이 그녀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제가 주도권을 쥐어보니 일레온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져서 자꾸만 더 놀리고 싶어졌다.


“당연히 안 되죠.”

“안 된다고?”

“그럼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결혼식을 올려서 정식으로 유테르 공작가를 떠나기 전에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오면 뭐가 되겠어요? 대공저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나 차이가 없게 되잖아요.”

엘리시아는 괜히 엄포를 놓았다.


“당신이 이렇게 공작가에 가는 거로 왈가왈부하는 걸 아빠가 아시면 혼사를 엎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너무 일찍 결혼한다고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하시는데.”

“그건 아니야.”

일레온이 대번에 태도를 바꾸었다.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공작저에 그대를 보내주겠지. 그러니 공작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절대로.”

“이상한 소리?”

“아버지가 마땅히 딸 걱정을 할 만한 이야기.”

일레온이 서둘러 정정했다.


“후훗.”

그 모습이 우스워서 엘리시아는 결국 웃고 말았다. 소리 내며 웃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일레온이 낮게 물었다.


“나를 놀린 건가?”

“당신도 매일 나를 곤란하게 하잖아요.”

일레온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대는 늘 나를 곤란하게 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게 있어.”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팔짱을 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일 갈게요.”

“모레 가면.”

“안 돼요.”

장난스레 말하던 엘리시아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잖아요. 왠지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아.”

“나는 그대를 낳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잠깐이라도 떨어지기가 싫은걸. 공작께서도, 공작부인께서도 어린 자식을 하듄샤로 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까 다녀오라고 해줘요. 당신이 그런 얼굴 하니까 장난친 거긴 한데 부모님께 다녀오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녀의 말에 일레온이 한숨을 쉬었다.


“반대였다면 좋았을걸.”

엘리시아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부연했다.


“공작저에 다녀오는 게 장난이고 나를 놀린 게 진짜인 게 나았을 거야.”

“어휴. 정말.”

둘은 티격태격하며 걷다가 슬그머니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잡은 오른손이 그대로 식사하는 내내 일레온에게 잡혀있었고, 엘리시아는 그가 떠먹여주는 대로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

유테르 공작저는 늘 고요한 편이었다.

공작저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넓은 정원이 무엇 때문에 유테르의 낙원이라 불렸던가.

은둔하길 좋아하는 공작부처의 성품을 닮아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가 이 세상의 것 같지가 않아 이상향의 이름을 붙이는 데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니?”

마차에서 내리는 엘리시아를 보고 마리엘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공저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저 당분간 여기서 지내려고요.”

“뭐라고?”

“곧 결혼할 테니까. 그전까지만요.”

딸의 말에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이 집에. 여기서 네가…… 말이니?”

“네.”

“나는 찬성이다.”

뒤늦게 계단을 내려온 질리언이 손끝을 떠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잘 돌아왔다. 엘리시아.”

“엘리시아. 오오. 내 아가.”

마리엘라가 엘리시아를 끌어안자, 질리언은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한데 꼭 안긴 엘리시아는 부모님의 애정을 한껏 만끽했다.

그녀의 삶에 이런 순간은 처음이었다.

잠시 후, 겨우 진정한 마리엘라는 유테르의 낙원 가운데에 자리한 음악당에 티테이블을 마련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단다.”

“이게 보통이지 않나요? 여기가 원래 제집이니까.”

“그래. 그렇지.”

마리엘라는 엘리시아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모처럼 한가하게 마주 앉은 딸을 보며 기쁘고 행복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야. 절대로.”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싶어. 네가 베르베로 떠나면 네 아빠와 내가 따라갈 예정이었지. 그렇게 원작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때야 한가하고 자유로운 시간이 올까 싶었는데.”

그리고 그 순간이 온다면 엘리시아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있을 곳은 유테르의 낙원일 수는 없었다.

베르베의 이국적인 풍경 어딘가라면 모를까.

마리엘라는 좀체 지금 이 순간이 현실감이 없다고 느꼈고, 한편으로는 딸이 말한 이 집에서 결혼 전까지 지내고 싶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 서글펐다.

엘리시아는 아주 어릴 때 이 집을 떠나서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파문당할 때까지 한 번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도 일정을 당겨 베르베로 보내려다 엘리시아가 집을 나간 바람에, 그 후에는 강제력 탓에 딸이 쭉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니 저러다 결혼 전에 크게 흠이라도 잡히는 게 아닐까 싶어 노심초사하기 일쑤였다.

레브 황녀와 클레벤트 대공의 성품이 그리 까다롭지 않고 엘리시아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해주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본래 마리엘라는 걱정이 많은 편이었기에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짐을 싸 들고 나타난 엘리시아가 대공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 가슴부터 철렁했다.


“이것 좀 먹어보렴. 네가 좋아하는 것이잖니.”

마리엘라가 엘리시아의 앞으로 흑설탕이 솔솔 뿌려진 부드러운 시폰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맞아요. 하듄샤에 가서 한동안 계속 이런 간식거리가 생각이 제일 많이 났거든요. 제가 조르니까 저를 보러 오실 때 가져다주셨었잖아요.”

“맞아.”

큼직하게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으로 가져가는 엘리시아를 보며 마리엘라가 미소지었다.


“음. 맛있어요. 옛날에 먹었던 맛 그대로예요.”

“넌 모르겠지만 실은 공작저의 주방장이 두 번 바뀌었단다.”

“정말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들은 자신의 비법을 좀체 남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거든. 그렇지만 네가 이 케이크를 워낙 좋아하니까 특별히 부탁해서 레시피를 받아놓았어.”

“그랬군요.”

“어서 더 먹으렴.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단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엘리시아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하듄샤에서 마리엘라가 이 케이크를 가져다주어 먹을 때도 늘 미지근했는데 온기가 남아있을 때 먹어야 맛있어서 그녀가 신경을 썼을 줄은 몰랐다.

어린 딸이 조르는 케이크를 가져다주려고 식지 않게 몇 겹으로 꽁꽁 싸맨 것을 가져왔던 마리엘라의 모습을 상상하니 엘리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엄마의 표정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엄마는 뭘 좋아하세요?”

“응?”

“일레온이 제게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어요.”

엘리시아는 테이블 위 꽃병에 꽂혀있던 수선화를 하나 뽑아 들었다.


“그는 제 취향을 알고 싶다고, 제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면 맞춰주겠다고 했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엘리시아.”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하듄샤에서 지내기 위해 나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저는 살기 위해 엄마의 전생을 빌려서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거니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엘리시아가 담담하게 말할수록 마리엘라는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일레온이랑 있다 보면 아빠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요.”

마주친 딸의 보랏빛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결혼하고 나면 일레온이 가는 곳을 어디든 함께하게 되겠죠. 클레벤트 대공가의 영지는 너무 넓어서 영주성만해도 몇 개나 된다던데. 몇 년 동안 만나기 힘들지도 몰라요.”

엘리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송이를 도로 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마리엘라의 팔에 팔짱을 끼고 슬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딸도 있나요? 이대로 결혼해버리면 저는 아빠랑 엄마랑 추억도 없고 두 분이 뭘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잖아요.”

마리엘라는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안에서 깨물었다.


“그런 건 싫다고 생각하면 제가 나잇값을 못하는 걸까요? 아빠 엄마랑 잠깐이라도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그럴 리가. 엘리시아. 절대 그렇지 않아.”

마리엘라는 딸을 꼭 끌어안았다.


“네가 위험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그리고 몇 번인가 엘리시아를 그래도 공작저로 데려오려 했지만 그때마다 일레온의 태도가 너무나도 완강해서 다시 말을 꺼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해주었다니. 너무 고마워. 엄마는…… 네게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커버려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까.”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툭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음이 이상하더라. 처음부터 내 딸이었던 순간은 없는 것처럼. 내 손 밖으로 뺏기는 것만 같고.”

“귀찮게 여기실까봐 걱정했어요.”

“귀찮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넌 내 딸인걸.”

마리엘라가 엘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즐겁게 지내보자.”

“네.”

그날 밤 엘리시아는 질리언과 마리엘라와 늦도록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반딧불이라니. 정말 신기해.”

늦여름 밤을 장식하듯 반짝이는 작은 곤충들이 이리저리 날아오르는 광경은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질리언은 하듄샤에 가기 전까지 서재의 책 사이에 파묻혀있다고 어렴풋이 기억했었는데 의외로 활동적인 취미도 꽤 즐기는 편이었다. 내일은 호숫가로 가 오리를 사냥하는 걸 보여주겠다고 해서 기대가 되었다.


“호숫가에 일레온이랑 같이 갔었는데.”

그때 조각배를 탔던 건 꽤 즐거웠으니까 내일 또 타보자고 할까?

엘리시아가 침대에 누운 채 발을 구르며 콧노래를 부를 때였다.


“즐거워 보이는군.”

어둠 속에서 낯익은 손이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는 그대가 없어서 무척 쓸쓸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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