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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그녀를 지키기 위해 (135/151)


135. 그녀를 지키기 위해
2023.04.19.



 


“어디서 왔는지 들어나 볼까.”

엘리시아가 공작저로 가겠다고 했을 때 일레온은 바로 반대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대공저는 그의 충실한 심복들이 은밀히 지키고 있었다.

본래 저택을 그렇게 삼엄하게 경비 할 필요가 없어 그동안 그리하지 않았었다.

전 대공비였던 레브는 오데르인데다 그녀 또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었다. 저택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레브는 지켜지는 쪽이기보단 지키려고 나서는 쪽일 터였다.

일레온이 비록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것에 대한 기척에는 예민했기 때문에 그가 눈먼 짐승의 나락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딱히 저택의 경비를 엄중히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감히 내 집 후원에서 엘리시아를 납치해?

그것만은 일레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

영역을 침범당해 예민해진 짐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발톱을 세운 채 사소한 데에도 으르렁 거리는 게 아닌가.

일레온이 그 후 벌인 일이 딱 그런 형국이었다.

그가 눈이 멀어 변변히 영주의 일을 돌보지 못하는 동안 베르나르와 함께 그의 수족이 되어 영지들을 단속하러 흩어졌던 수하들이 대부분 대공저에 모였다.

전쟁터에서는 일레온의 앞을 막아주고 뒤를 가려주었던, 그와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부하들이었다.

물 샐 틈 없이 단단히 방비하라 일렀건만,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엘리시아가 제 발로 나가겠다는데 장사 없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엘리시아를 매우 무방비하고 안전하지 못한 공작저로 보내야 하다니.

공작저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 질리언과 마리엘라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일레온 자신이 믿지 못한다는 거였다.

대공저의 수하들을 공작저 주변에 풀어놓은 지 반나절 만에 일레온은 혀를 내둘렀다.

온갖 놈들이 공작저 주변에 우글거리는 게 아닌가.

엘리시아와 잠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는 동안 싹 잡아놓으라 했더니 세드릭이 깔끔하게 처리해둔 걸 보며 일레온은 심장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입을 틀어막은 천을 빼자 사내가 캑캑거렸다.


“차라리 날 죽여라.”

“누가 보냈는지 발설하느니 죽겠다?”

감정이 배제된 일레온의 붉은 눈동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다.


“주, 죽여라.”

“충심이 대단하군. 합격.”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드릭이 뒷목을 찍어 그를 기절시켰다.


“다리를 온전히 쓰지 못하게 하고 적당한 곳에 버려 둬. 죽이라니 누구 좋으라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조직 안에서 그자를 쳐 낼 것이다. 감시하다 보면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이미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다음.”

“큭.”

그다음 복면은 얼굴을 드러내게 하자 혀를 깨물려 했다.

퍽.

세드릭의 강력한 한 방을 맞고 기절한 놈을 아까 정신을 잃은 놈의 위에 던지듯 겹쳐놓으며 일레온이 감탄했다.


“다들 교육이 잘 됐군. 이 정도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비밀을 누설하느니 죽겠다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사람의 본능인데 의지로 그것을 거스르게 만들려면 가족과 같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빼앗아 쥐거나 세상의 이치를 포기할 정도로 극악한 경험으로 정신을 파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나같이 죽겠다고 하다니. 너도 그러한가?”

세 번째 복면 남자가 재갈을 풀어주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큭. 사, 살려주십시오.”

“드디어 배덕한 자가 나왔군. 네놈은 누가 보냈나?”

그는 다급한 눈빛으로 일레온에게 간청했다.


“저, 저는 레브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예. 예.”

굴종하는 눈빛으로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께 나와 엘리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나?”

“그, 그렇습니다.”

“그분께 내가 유테르 가의 영애를 항구 여관으로 데려갔다고 보고한 게 자넨가?”

“그, 그것은.”

그 말에 검은 옷의 사내가 어둑한 가운데서도 눈에 띄게 하얗게 질렸다. 사내를 내려다보던 일레온이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보내주지. 대신 앞으로는 어머니께 보고하기 전에 내 부관을 거쳐야 할 거야.”

“대공 전하. 그 말씀은…….”

“세드릭. 데려가서 교육 좀 하게.”

“예. 전하.”

세드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이를 데리고 사라지자 일레온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밑에 저렇게 나약한 자가 있다니 안 될 일이지.”

살길을 찾아 쉽게 주인을 불다니 적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어머니께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레브의 정보원은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일레온이 생각하기에 레브는 보통 한 집안을 보살피는 ‘레이디’의 역할에 그치기에는 과분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다정하고 온화하게 집안일을 건사하는 아내이기보다는 아버지 옆에 선 어머니는 어깨를 나란히 한 동반자라고 느껴졌다.


「검술 선생을 이겼다고?」

 
처음으로 배우던 스승의 검을 쳐낸 날 레브는 희색이 도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어디 이 어미와도 겨루어보자꾸나.」

 
그러고는 대뜸 그녀가 자신의 검자루를 쥐기에 기겁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리 호랑이의 새끼도 호랑이라지만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자식 앞에서 개방하는 어머니를 보며 ‘겨루어보자’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혼자 픽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께서는 보통 아내감으로 상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셨으니 내 혼사는 가주의 의무에 충실하면 되겠다 여겼건만.”

아이들은 제 부모의 관계를 보고 살아가며 가지게 될 역할을 상상한다.

당당히 아버지의 옆에 어깨를 펴고 선 레브는 두 명이 있을 수 없는 이였으니 자연히 그가 어젠가 맞아야 할 대공비와는 겹쳐질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대공비라.”

엘리시아는 의외의 존재였다.

그가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든다는 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을 밀어내는 여자가 야속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도 그때 그녀가 짓던 것과 같은 무감한 얼굴을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비어있는 캔버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제가 영향을 주는 대로 물이 드는 걸 감상했다.

웃는 법, 우는 법.

깊은 곳에 숨겨둔 고통을 꺼내어 드러내 보이는 법.

좋은 것을 좋다, 싫은 것을 싫다 말하고 취사선택 하는 법.

살기 위해서, 부모의 뜻에 따라 자신을 지우고 살았다는 여자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무엇도 그녀가 가진 가능성과 미래를 저당잡을 수 없는 것인데도.

자신이 해도 될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고 불과 얼마 전에 했던 일도 무의식을 탓하며 제가 한 일은 아닌 것처럼 겁을 내곤 했다.

그런 모습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노력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것처럼 뒤늦게 모르는 것들을,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빠르게 흡수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어색해 하면서도 부모와의 끈을 이어보려 하는 게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엘리시아가 머물 공작저 주변에 제 사람들을 보내며 일레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연히 엘리시아가 대공저를 출발할 때 바로 채비를 하고는 그녀가 탄 마차를 앞질러 이미 공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밤이슬을 맞으며 엘리시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밤을 지새울 거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부모님 곁에서 반딧불이의 불빛을 보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실컷 훔쳐볼 수 있었다.

연한 에메랄드빛이 이리저리 날아오를 때 눈을 한껏 휘며 즐거워하는 엘리시아의 얼굴이 영롱한 보석의 조각처럼 그의 눈에 날아와 박혔다.

그 순간을 엿본 것 만으로도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저와 함께 보고 싶었단다.

일레온은 공작저에서 엘리시아를 흔적도 없이 납치하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엘리시아는 무해하고 무방비했다.

그래서 여신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조금 미소를 짓기만 해도 주변이 환해질 정도였다. 그걸 감춰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전전긍긍하게 되는 건 일레온 자신이었다.


“여태 참았건만 왜 이렇게 초조하지?”

기세가 드높은 양쪽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 아래 엘리시아와 그의 결혼식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잘 준비되고 있었다.

무언가 자꾸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일레온은 신경이 쓰였다.


“곧 엘리시아 클레벤트가 될 텐데.”

그녀의 이름 뒤에 따라붙게 될 가문의 이름을 떠올리며 일레온은 미소지었다.

생각만으로도 이보다 더 뿌듯할 수가 있을까.

자식을 낳아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도 이렇게 기쁠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심장이 된 연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나 모두에게 허락 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일레온은 앉아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예. 전하.”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는 잠시 후 엘리시아의 테라스에 서 있었다.

털썩 난간에 기대어 앉은 그의 눈에 흐릿한 유리문 너머로 흰 이불을 덮어쓰고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잘 자.”

그녀만은 제 손으로 지키고 말 거라고 다짐하며 일레온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

엘리시아가 공작저에서 지내고 며칠이 흘렀다.

오늘은 레브와 일레온이 정식으로 공작저 정문을 통과한 날이었다. 물론 질리언과 마리엘라는 그가 수시로 공작저를 드나드는 걸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각자의 부모를 모시고 티테이블에서 조우한 엘리시아와 일레온은 눈빛을 주고받다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맞잡았다.

마리엘라의 음악당에 처음 자리한 레브가 운을 띄웠다.


“소문이 자자한 낙원에 직접 와 볼 일이 다 생기는군. 정말 아름다워. 손을 많이 댄 황궁 정원보다 운치가 있어 더 마음에 들 정도인걸.”

“황공합니다. 전하.”

마리엘라가 겸양하자 레브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보다 급한 일부터 이야기 나누지. 아직 황제 폐하께 혼사에 대해 아뢰지 못했거든.”

질리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알현을 신청해보아도 황제 폐하를 뵐 수 없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신다면 어머니께서 따로 폐하의 병문안이라도 하셔야 하는게 아닙니까?”

일레온의 말에 레브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공작저에 들어오기 전에 제게 간자를 보냈냐 눈치를 주던 아들이 황궁에 사람을 심지 않았을 리 없는데 저리 말을 하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정말 핑계일 뿐이니 병문안이 가능할 리 없지. 나와 공작의 알현을 거절하실 뿐 정무를 돌보는 데 소홀하시지 않다 하니 아프시지 않은 게야.”

“그럼 어쩌죠? 이제 결혼식이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엘리시아가 걱정스레 묻자 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질리언과 마리엘라가 동시에 물었다.


“무엇입니까?”

“좋은 방법이라니요?”

그러자 일레온이 품에서 황금빛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칙서 아닙니까?”

바로 알아본 질리언이 말하자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전에 전공 대신 황제 폐하께 받아둔 것이지요.”

그것을 집어 들어 펼쳐본 레브의 얼굴에 대번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퍼졌다.


“재밌겠군. 이런 물건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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