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날강도 같은 사윗감의 표본
(136/151)
136. 날강도 같은 사윗감의 표본
(136/151)
136. 날강도 같은 사윗감의 표본
2023.04.22.
“재밌겠군. 이런 물건이 있었다니.”
레브의 기꺼운 표정을 보고 공작 부부가 궁금한 듯 고개를 빼자 그녀는 그것을 질리언에게 건네주었다.
“어찌 이런 물건을 받아 둘 생각을 했지?”
“황제 폐하께서 지난 전공을 치하하시겠노라 하셔서 대신 받은 것입니다.”
일레온이 눈이 멀어 허송세월하는 동안 7년 전쟁의 공적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서지 못하는, 나락으로 떨어진 대공을 대신해서 알곡 같은 너른 땅과 제국에 복속된 보물들을 엉뚱한 이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것을 황제라고 도로 뺏어서 일레온에게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황명으로 혼사를 허락해주십시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는 정식 칙서.
「제가 어떤 여인을 원해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하신다 약조해주십시오.」
사라진 ‘로나’가 불안정한 신분일 것을 염려하여 받아두었던 황제의 허락.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은 일레온이 마크시스 황제에게 요구한 대로 ‘클레벤트 대공가의 가주, 일레온의 혼인을, 대공이 청한 여인을 대공비로 삼는 것을 조건 없이 윤허한다’는 것이었다.
“허어.”
질리언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대로라면 굳이 황제 폐하께 양쪽 가문이 맺어지는 것을 허해주십사 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혼인은 이미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심지어 일 처리에 꼼꼼한 그가 친히 황제를 태양궁의 알현실에서 집무실까지 모시고 간 덕분에 황제의 친필로 적혀있었다.
“칙서를 받아두었다면 공작과 내가 태양궁에 발걸음 하며 애쓸 필요가 없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칙서가 있으니 상관없다는 듯 결혼식을 올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지요. 대공께서 의례적이라도 황제 폐하께 고하는 형식을 취하려 하신 뜻을 이해합니다.”
레브가 타박하듯 말하자 질리언이 즉시 일레온의 편을 들었다.
질리언의 그런 태도를 보며 레브는 속으로 미소지었다.
‘그래도 내 아들이 사윗감으로 탐탁한 모양이지?’
그녀는 선황제 시절 황궁에서 나고 자라 황실 예법과 사교계에 빠삭한 편이었다. 그것을 학습으로 습득하고 스스로 크게 관심 갖지 않았을 뿐.
유테르 공작가의 질리언이라면 그녀 역시 마리엘라와 더불어 아카데미 시절 마주칠 일이 있었으나 당시에도 도서관 은둔형의 표본이었기에 딱히 접점은 없었다.
‘하듄샤에 뺏긴 것처럼 키운 엘리시아를 대하는 걸 보면 공작의 부정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데.’
질리언이 엘리시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밖에서 자라 돌아온 딸을 대하는 어색함이 없었다. 오히려 걱정이 많은 마리엘라와 엘리시아의 사이가 좀 더 서먹해 보였다.
그런데도 딸을 날강도같이 내어달라는데 질리언이 이토록 협조적이라니 레브가 생각하기엔 상당히 의외였다.
그녀가 보기에는 일레온 하는 짓이 어찌나 거침없는지 제 아들이 하는 짓이라곤 해도 솔직히 편들어주기엔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흠 하나 잡히지 않게 가르친 녀석이었는데 어찌 엘리시아의 일만 되면 저렇게 막무가내인지.
그렇지만 집 정원에서도 납치를 당하고 온갖 험한 꼴을 겪고 있으니 일레온의 과한 대응이 절대 곧이곧대로 과하다 여길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공작이 내 앞에서 일레온을 편들 정도라니.’
마음에 차지 않아 혼사를 반대하거나 딸의 배우자로 못마땅해하는 것보다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왜냐면 레브가 보기엔 일레온의 지금 상태가 질리언이 모종의 이유로 그들의 혼사를 반대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엘리시아를 데려오려 할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난 내 아들이지만 현재 일레온의 상태는 무리한 데가 있었다. 아들이 그렇게나 원하는 여인과 혼인을 하게 된 걸 기뻐해야 할지 막무가내일 정도로 누군가에게 빠져 있는 걸 걱정해야 할지. 레브는 되도록 빨리 정식으로 둘이 부부가 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결혼식은 여기서 올리게 되는 건가?”
레브가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네. 영지에서 가신들이 축하하려 수도로 올라오고 있답니다. 결혼식 당일에는 정원에 넓게 야외 무도회를 열려고 해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정원이 넓으니 축하객이 많이 들어도 자유롭지요.”
“이름난 정원이니 모처럼의 기회에 다들 와보려 안달하겠군. 마리엘라. 그대도 그리 사교계를 즐기지 않았으니 말이야. 이번 결혼식과 무도회가 지나고 나면 유테르의 낙원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겠어.”
“황공합니다. 전하.”
“황제 폐하께 편지를 쓰겠네. 정히 그리 편찮으셔서 직접 하나뿐인 조카의 결혼식에 오시지 못할 정도라면 어쩔 수 없겠지.”
마땅히 일레온의 결혼식이라면 황제, 황후 부부가 참석하는 게 상식적인 일이었다.
대공의 결혼식으로도, 하나뿐인 조카의 결혼식 어느 쪽으로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엘리시아와 일레온이 올리는 청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여겼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황태자가 엘리시아를 원한다 해도 이렇게 버틸 일이 아니었다.
영지와 영주성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만은 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졌다.
만약에 일레온이 이런 칙서를 따로 챙겨두지 않았다 한들 엘리시아를 클레벤트령으로 데려가 영주성에서 직접 혼인서류를 꾸려 식을 올리는 수도 있었다. 실로 제국 끄트머리의 먼 곳에 있는 영지나, 소출이 박해 영주가 몇 주씩 자리를 비워 수도에 다녀갈 형편이 안되는 곳이라거나 여러 이유로 영지에서 혼인하고 황제에게 보고만 올리는 일이 꽤 있었다.
‘혹 혼사가 문제가 아니라든가.’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사비엘의 패악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문제가 달리 있어 마크시스 황제를 마주할 수 없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시일이 지나야 알게 되겠지.’
마음에 걸리던 일이 일단락되자 레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처럼이니 내게도 소문의 낙원을 구경시켜주겠나?”
“물론이지요.”
그녀의 말에 마리엘라가 얼른 따라 일어섰다.
엘리시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하는 걸 일레온이 자연스레 손을 뻗어 어른들의 시선을 흘려주었다.
“그대는 쉬는 게 좋겠군.”
“오후에 드레스를 가봉해야 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한숨 자도록 해.”
엘리시아가 멀어지는 어머니들의 뒷모습을 살피고는 고개를 돌려 질리언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대공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럼 실례할게요.”
그녀의 피로에는 이유가 있었다.
낮에는 부모님과 이곳저곳을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그녀의 테라스에 찾아드는 일레온에게 종일 있었던 일을 털어놓느라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레브가 있을 때는 차마 예비 시어머니 앞에서 하품을 하거나 티를 낼 수 없었지만 오늘 어른들과 일레온이 말하는 내내 엘리시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졸지 않기 위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걸 일레온이 알아주어 너무 다행이라 기쁜 마음에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그래.”
질리언에 흐뭇한 얼굴로 일레온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며 엘리시아는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일레온을 사랑했다.
그걸 무엇으로도 달리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부모가 일레온과 결혼을 통해 새롭게 가족이 되려 한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일레온을 만나기 전 엘리시아는 자신의 존재가 하듄샤의 보석, 신관 엘리시아 이외에는 없는 데다 그 모습은 가짜라 여겼다.
스스로 모든 것이 가짜라는 생각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 검열하고 곱씹게 되곤 했다.
일레온이 제 손을 잡아주었을 때부터 달라졌다.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그를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가 애정을 쏟아주는 만큼 그녀 또한 일레온을 특별하게 마음에 담고 싶었다.
별달리 유난스러운 일이 아닌데, 그저 결혼식을 앞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일 뿐인데 엘리시아는 어쩐지 오늘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느꼈다.
방으로 돌아와 누운 엘리시아는 베개에 머리가 닿는 순간 푹 하는 공기의 흐름에 딸려온 일레온의 체향을 맡고는 혼자 웃어버렸다.
밤새 자신을 끌어안고 함께 누워 있던 남자의 흔적이었다.
어디든 존재감을 남겨둔 그를 떠올리며 엘리시아가 단잠에 빠져들 때.
질리언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일레온을 공작저의 서재로 안내하고 있었다.
“대공께서도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다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역사는 반복됩니다. 아군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전략이든 전술이든 지휘관으로서 연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 역시 제국의 검이라 불릴만한 소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서재의 의자를 권하며 질리언이 일레온에게 물었다.
“특별히 내 저서 중에 즐겨 읽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팔레가라 전쟁사를 특히 자주 읽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세상에! 그 책은 내 저서 중에 가장 아끼는 것이지요. 팔레르모와 트로팔가라의 땅을 여러 번 오가며 겨우 쓸 수 있었답니다.”
“그렇군요.”
질리언은 감동 받은 눈치였다.
“그 책을 대공께서 그리 즐겨 읽었다니.”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팔레르모가 트로팔가라의 전황에 대해 얕잡아 본 것인데.”
그는 저서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일레온의 감상을 무척 행복해하며 들었다.
책의 부차적 기능이 자신의 딸을 꼬여내는 데 쓰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레온이 날강도 같은 사윗감의 표본이라는 걸 질리언이 눈치채지 못해 천만다행이었다.
***
수도로 돌아온 하듄샤의 신관들은 조용히 일상으로의 회복을 꾀했다.
오랜 세월 안정적으로 유지해온 신전의 존재는 원작 붕괴라는 엄청난 소식 앞에서도 혼란을 막을 수 있었다.
대부분 하듄샤에 머물며 ‘이제는 진짜 신관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위로하는 봉사 역할의 신관을 오래 하다 보니 정말 그 일을 순명처럼 여기게 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부는 하듄샤를 떠났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가망이 없다면 굳이 신관인 척 머물며 시간을 때울 필요가 없다.
‘예언서’가 존재할 때 오히려 삶의 방향성이 없다고 여겨졌다고 했다.
「주인공이 버젓하게 적혀 있잖아. 나는 구경하다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라는데 굳이 뭘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러나 모종의 세력에 예언서를 뺏겼다. 또 주인공이 원작을 탈주할 것을 선언해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러자 이제부터라도 새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며 하듄샤를 떠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여주가 엘리시아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예언서에 카리나라고 적혀 있잖아.」
「난 왜 반대였던 것 같지?」
「별소릴 다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몇몇이 여주가 엘리시아가 아니었냐고 말을 꺼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어수선하면서도 착실하게 지내던 이들은 대신관 알레한드로가 그레로사에서 돌아오자 한결 평온을 찾았다.
“우리는 본래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존재하지. 예언서를 잃게 된 건 큰 사고였지만 우리의 삶이 끝에 다다른 것은 아니니.”
오래 대신관을 맡아온 알레한드로의 리더십으로 ‘하듄샤’는 적어도 콘스탄스 제국민들에게는 익숙한 성소로 빠르게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알레한드로의 방에 팔랑이는 검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대단히 편안해 보이시는군요.”
그림자에서 쑤욱 늘어난 일부가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 소나텍이 빙글거리며 흰 가면을 벗었다.
그를 노려보며 알레한드로가 입을 열었다.
“진짜로 찌르다니. 제정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