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 클레벤트 대공의 결혼 (137/151)


137. 클레벤트 대공의 결혼
2023.04.26.



 


“진짜로 찌르다니. 제정신인가?”

소나텍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믿었겠습니까?”

연한 갈색 눈동자의 준수한 청년의 얼굴에는 나이 든 이를 해쳤다든지, 혹은 그로 인해 그가 사경을 헤멘 데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소나텍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옳고 그른 것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짐승처럼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알레한드로는 처음으로 그와 손을 잡은 걸 잠시 후회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그는 연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큰 영광을 안기 위해 피치 못할 선택을 했을 뿐인데 자신이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알레한드로는 잠시 회한에 휩싸였으나 곧 소나텍에게 물었다.


“예언서는 어찌 되었지?”

알레한드로의 말에 소나텍이 품에서 커다란 종이뭉치를 꺼냈다. 표지와 과거를 잃은 예언서의 일부는 고난을 겪은 티가 나는 듯 너덜거렸다. 여전히 은은한 황금빛을 흘리고 있는 것만이 그것이 심오한 이 세계의 비밀을 담은 신기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훼손된 예언서를 받아들어 몇 장 넘겨보던 알레한드로가 한숨을 쉬었다.


“엉망이군.”

“뭐 여유 부리며 잘라낼 시간 같은 건 없었으니까 이해를 해주셔야지요.”

알레한드로의 눈이 날개를 팔락거리다 소나텍의 어깨에 앉은 검은 새를 향했다.


“수정은 얼마나 할 수 있지?”

그제야 능글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다른 권능을 유지하려면 앞으로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아. 골치 아프게 되었군.”

알레한드로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대신관께서 병석에 누워계신 동안 달리 손을 써두었지요.”

“손을 써두다니?”

“사비엘이 엘리시아를 황태자비로 삼을 겁니다. 원작을 거스르지 않는 일은 일어나기 쉽지요. 이런저런 훼방을 받아 강제력이 억눌려 있으니 말입니다.”

사비엘의 상태는 실로 눈앞에 엘리시아를 데려다 놓기만 해도 당장에 여인의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물론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건 소나텍 그였다.


“엘리시아의 존재가 이야기의 흐름을 늦추고 있지.”

“일레온이 그녀를 감싸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요. 몇 번이나 엘리시아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으니.”

엘리시아는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숨 쉬고 있지만 원작을 기준으로 보면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미래는 아무 곳에도 쓰여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녀가 죽음을 맞는다는 지나간 일에 더욱 힘이 실린다.

마리엘라의 불행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황실이 그들의 운명을 순리대로 따르겠지요.”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니 앞으로는 절대 실수해선 안 돼. 변수가 늘어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야지요. 복수와 영원을 위해.”

소나텍의 마지막 말에 알레한드로가 눈가에서 힘을 빼었다.


“……우리의 신좌를 위해.”

알레한드로의 눈빛은 허락되지 않는 달콤한 과실을 탐내던 태초의 뱀과 같았다.

***

이른 아침부터 황후궁이 발칵 뒤집혔다.


“이게 대체 무슨……?”

레브로부터 전해온 편지를 읽으며 세라피나 황후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요즘 들어 부쩍 심약하게 구는 남편과 레브의 접촉을 막았다. 황녀가 공작과 함께 입궁한 속내야 두 가문의 혼사를 허해달라는 거겠지만, 딱히 반대할만한 치명적인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제 아들이 매달리는 일이었다.

거절한 명분이 없는 의례상의 허락에 사비엘이 죽겠다고 펄펄 뛰니 묘안이 없어 세라피나 역시 난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황제를 들들 볶는 것.

황제가 두 손 두 발 들고 그녀의 뜻대로, 그들의 하나뿐인 아들 사비엘이 해달라는 대로 엘리시아를 황태자비로 점찍어 공작에게 모종의 압력을 넣을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초대장이였다.

클레벤트 대공과 유테르 공작가의 외동딸 엘리시아의 결혼식 초대장.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레브가 정식 초대장 아래에 자신을 예전에 황궁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 몰래몰래 살갑게 부르던 애칭으로 몇 줄 덧붙여놓은 문장이었다.

[세라 언니. 이렇게 불러보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언니가 황궁으로 시집온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 나도 집안에 새 사람을 들이게 되었어요. 대공의 결혼식이니 두 분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것이 보통이나 피로 이어진 우리 황족에 조카며느리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마땅히 기쁘게 자리해주셨으면 해요.]

어쩐지 ‘피’라는 글자가 두껍게 적힌 건 기분 탓일까?

의미심장하게 구는 레브 때문에 세라피나는 아직도 때때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침몰한 세이렌 호에서 그녀의 피를 뽑은 게 자신이라는 걸 알 턱이 없는데, 일부러 그녀를 떠보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언제 폐하를 뵈었다는 거야? 허락이라니?”

초대장에는 황제가 대공의 혼인을 승인해주었다고 적혀있었다.

식은 아직이지만 법적으로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에 세라피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당장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다.”

세라피나 황후는 손에 편지와 초대장을 구겨 쥐고 한달음에 태양궁으로 달려갔다.


“폐하!”

급히 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에 새된 목소리로 부르자 초대장을 읽고 있던 마크시스 황제가 덩치에 맞지 않게 움찔 하는게 보였다. 그것이 세라피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도대체 어찌 된 겁니까? 제가 알현 신청을 거절해달라고 그리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마크시스 황제가 레브 황녀와 유테르 공작을 만나지 못하게 철통같이 감시를 했건만.


“황제께서 대공의 혼사를 승인하시다니요? 언제 이리하셨습니까? 제 부탁 같은 건 처음부터 들어주실 마음도 없었던 겁니까?”

길길이 날뛰는 세라피나 황후를 보며 마크시스 황제가 해쓱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이 결혼 허락을 직접 구하지 않았소.”

“뭐라고요?”

“그 자리에 황후도 함께하지 않았나. 황후야말로 잊은 거요?”

“그러니까 도대체 제가 언제…….”

그제야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이 번뜩 스쳤다.


「황명으로 혼사를 허락해주십시오.」

「무어라?」

「전쟁터에서 돌아와 내내 대공저에 머무셨던 분이. 혼사를 논할 여인이 있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데르의 붉은 눈동자를 도로 찾은 일레온이 황궁에 왔던 날.


「제가 어떤 여인을 원해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하신다 약조해주십시오.」

 
대단한 치적을 쌓은 공적을 마다하고 달랑 황명으로 칙서를 하나 써달라 했던 일이 말이다.


「얼마든지 그리해주겠네.」

「칙서로 내려주십시오.」

「칙서? 칙서라니.」

「방금 제 혼사에 대해 하신 말씀 그대로 적어서 서류로 만들어주시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면서도 어느 가문의 누구라 고하지 않고 그저 혼인을 허락해달라고만 하니 상대가 전쟁 포로나 탈주한 노예라도 되나 생각했었다.

사비엘의 혼처로 신경이 쏠려있을 때라 정치적으로 일레온이 변변치 않은 가문이나 신분의 여자를 대공비로 맞게 되면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겼었다.


“아니 그러면 대공과 공작가의 혼사는 처음부터.”

“그렇소. 내 허락은 더는 필요하지 않은 거요. 그 칙서를 가져갔을 때부터 대공은 혼인을 한 몸이나 다름없었으니.”

그저 예의상, 황궁 예법상 남들 보기에 적절히 황제의 면을 세워주려 한 것일 뿐.

그것을 피하고 있으니 이렇게 결혼식을 고작 며칠 앞두고 초대장이 날아오는 게 아닌가.


“그런 걸 써주시다니요!”

세라피나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마크시스 황제도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황후! 지금 뉘 앞인지 잊은 거요? 그리고 그대도 분명 대공이 원하는 대로 칙서를 써주라고 부추기지 않았소!”

세라피나 황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시지요. 당장.」

 
잊고 있던 일이 하나가 떠오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결혼식에 참석할 준비를 하시오. 황태자비 감은 따로 인연이 될 가문을 물색할 테니. 이만 물러가시오.”

“너무하십니다. 자식의 일에 어쩜 이리 매정하십니까?”

“떼를 쓰는 거요? 법도가 있고 지켜보는 신하들, 귀족들이 있는 것을.”

세라피나는 눈물바람으로 태양궁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늦은 밤.

침대에 누운 마크시스 황제는 침통한 얼굴이었다.

마음의 답 없는 근심이 기력을 갉아먹기라도 하는지 요즘 들어 더욱 정무를 돌보고 일상을 보내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레브. 그 아이에게 사람을 보내야 할 텐데.’

세라피나 황후가 죽네 사네 울고불고하는 통에 약해진 신경줄이 곧 끊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더 미룰 수 없었다.

이러다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라도 되고 나면 제국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터.

신좌에 오른 오데르와 그의 후손이 혈통으로 긴 시간 통치해온 제국은 이런 스캔들에 면역이 없었다.

그러니 무엇보다 급한 일은 레브를 만나 상의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세라피나 황후가 수시로 들이닥쳐 도끼눈을 해대는 통에 무엇도 녹록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고하는 말이 들리자마자 그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세라피나 황후가 침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쩐 일이오?”

낮에 일로 내내 두통에 시달렸던 황제는 어색하게 황후를 맞았다.

세라피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얌전한 태도였다.


“어쩐 일이라니요? 낮에 체통을 잃고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드리러 온 것인데.”

세라피나 황후의 말에 그는 차라리 사과하러 오지 않는 게 피로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요즘 그가 겪는 이 모든 스트레스의 원흉이 바로 긴 시간 반려로 함께 살아온 아내였으니 말이다.


“기력을 돋우는 데 좋다는 차를 구했답니다. 드셔보셔요.”

오늘따라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에게 차를 권하는 모습이 예전 세라피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실로 그가 오데르가 아닌, 자격 외 황제라는 비밀을 세라피나 황후가 알기 전까지 둘은 연을 맺은 부부로 오래 다복하게 지내왔었다.

세라피나 황후에 대해 마크시스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그녀의 뜻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최근 냉전을 거치고 보니 아무리 황제라도 나이 들고 보니 아내의 눈초리 하나에 삶의 만족도가 갈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고맙군. 향이 좋소.”

마크시스는 얼른 그녀가 가져온 차를 칭찬하며 찻잔에 입을 대었다.


“유테르 공작의 마음을 돌려보세요.”

“흡.”

황제는 막 한 모금 머금은 차를 도로 입 밖에 낼 뻔 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오늘도 그의 아내는 사근사근한 모습으로 칼을 갈고 온 듯 했다.


“신하가 감히 주군의 뜻을 거스른답니까. 황태자에게 미안하지도 않으십니까? 사비엘이 오데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은 전부 폐하의 탓인데.”

“황후!”

그러나 마크시스 황제는 선을 넘는 말까지 허락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이 초대장을 우리만 받았겠소? 이미 수도 귀족들 사이에 두 가문이 연을 맺게 되었다고 소문이 파다하겠지.”

“그래서요?”

“내일이라도 당장 공표하는 게 낫겠소. 그래야 사비엘이 마음을 접고 포기할 테니.”

그때였다.

갑자기 찻잔을 든 손이 떨리며 황제는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했다.

흐려지는 시야에도 독기 서린 세라피나 황후의 표정만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왜 내 자식이 포기를 해야 합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