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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엘리시아의 애교 (138/151)


138. 엘리시아의 애교
2023.04.29.



 


“왜 내 자식이 포기를 해야 합니까?”

“화, 황후.”

“아비가 지은 거짓과 죄를 왜 애꿎은 사비엘이 짊어져야 한단 말입니까?”

마크시스 황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숨이 막히는 듯 꺼억꺼억 소리를 내던 황제가 눈을 홉떴다.


“내, 내게 무엇을…….”

“지금 그게 중요해요? 무얼 드셨는지보다 어떻게 되실지가 더 궁금하셔야 할 텐데.”

세라피나는 덜덜 경련하듯 떠는 황제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주무세요. 긴 잠을 주무시게 될 거예요.”

“세라……. 커윽.”

“다시 눈을 뜨셨을 때는 버거워하셨던 일들 모두 정리해놓을게요. 당신께서 고민하실 일 없게요.”

몸을 파르르 떨던 황제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라피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황제의 눈을 감겨주었다.

툭.

황제의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렌즈가 잘못 걸린 듯한 소리를 내며 눈 밖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어둑한 침실 조명 탓에 아래로 떨어진 자그마한 것은 찾으려야 보이지도 않았다.

세라피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해졌다.


‘그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을 테니.’

발견하더라도 침실을 청소하는 먼지와 함께 치워지겠지.

조용히 누워있는 마크시스의 이마에 가벼이 키스를 하고 세라피나는 몸을 일으켰다.

제 손으로 잠재운 남편을 보는 세라피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흑. 흐흑.”

스으윽.

그녀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그가 나타났다.

신의 대리인.

또는 신의 사자라며 말씀을 전하러 오는 이가.


“정녕 신들의 뜻입니까?”

“그렇다.”

“황제 폐하께서는…… 깨어나실 수 있는 거 맞죠? 이대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요?”

“그래. 내 몇 번이나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세라피나는 남편이자 존엄한 황제에게 위험한 짓을 했다는 가책에 벌벌 떨었다.

레브를 사냥해서 가둘 때는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왜냐면 레브가 원망스럽고 일레온이 미운 것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두 모자가 사라졌다면 저와 사비엘의 처지가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마크시스 황제는 근엄한 지위에 올라있으면서도 세라피나 그녀에게는 꽤 좋은 남편이었다. 사비엘이 오데르로 태어나지 못해 심적 고통을 겪고 있을 때도 이토록 긴 시간 황후의 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가사 상태에 빠트릴 뿐이라며, 신의 음성을 전하러 온 이는 그녀의 손에 두 개의 약병을 쥐여주었다.

언제든 나머지 해약을 먹이면 황제가 깨어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었지만, 해약을 직접 써보기 전까지는 정말로 황제에게 무해한 것인지 알 방법이 없기에 세라피나는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에 빠졌다.


“세라피나 헤이른.”

“…….”

“사비엘에게 황좌의 영광을 안겨주거라.”

“알겠습니다.”

“그에게 걸맞은 여인과 함께.”

세라피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로는 검은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

가느다란 하현달마저 완전히 눈을 감을 듯한 그믐밤이었다.

사위가 깜깜한 탓에 오늘따라 더욱 온화하고 환하게 어둠을 밝히는 것 같은 촛불을 보며 마리엘라는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잠이 오지 않소?”

질리언의 말에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준비로 일이 많아 힘들 텐데 누워서 쉬기라도 하는게 좋지 않겠소?”

“아뇨. 아니에요. 힘들긴요.”

마리엘라는 남편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나 누가 봐도 맥없는 미소였다.


“왜 그러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요?”

“그럴 리가요. 그냥……. 어쩐지 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들에겐 이런 시간이 처음이었다.

엘리시아의 운명을 깨닫고 난 후로 마리엘라는 항상 품 안에 잠든 아기를 볼 때면 째깍째깍 초침이 떨어지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때때로 하듄샤로 가 어린 엘리시아를 만날 때도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을 보듬어주지는 못했다.

엘리시아는 살아 있었다.

그저 살아만 있었다.

그것을 낳은 어미인데도 그녀는 몰랐다. 엘리시아가 기억을 잃고 자신이 빙의자이니 제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마리엘라를 밀어낼 때까지 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꼈던 좌절이 생생했다.

내가 내 아이를 망쳤어.

죽음을 피하게, 새 삶을 살 수 있게 하려 했던 것뿐인데 딸의 영혼은 설정 사이에서 망가졌다.

그때 마리엘라는 엘리시아에게 무슨 말도 할 수 없어서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오열할 뿐이었다.

명백히 부모로서 실격이었다.

그래서 일레온에게 딸을 그래도 공작저로 데려가겠다고 강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마리엘라는 엘리시아가 저렇게 된 건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레온은 강제력만 벗어나면 엘리시아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딸을 지키려는 마음만은 자신과 질리언 못지않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랬는데.

엘리시아가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공작저를 찾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었나.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딸도 있나요? 이대로 결혼해버리면 저는 아빠랑 엄마랑 추억도 없고 두 분이 뭘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딸이 자신을 궁금해하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건 싫다고 생각하면 제가 나잇값을 못 하는 걸까요? 아빠 엄마랑 잠깐이라도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일찌감치 품을 떠난 딸이었다. 그런 아이가 대공가로 시집을 간다고 부모로 얼마간이라도 함께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염치가 없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얼마간 그들은 평온하게 지냈다.

엘리시아가 하듄샤에서 파문당하고 짧게 공작저에 지내는 동안 다 보지 못한 유테르의 낙원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실로 계절마다 풍경이 변하는 곳이 정원이니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 많았다.

그리고 엘리시아가 좋아하던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며칠은 오후에는 매일 주방에 내려갔지만 결국 실패했다. 케이크를 부풀리는 머랭은 기술이 필요한데 그리 쉽게 될 일은 아니었다. 일레온에게 직접 만든 걸 주고 싶었다고 시무룩해하는 딸이 어찌나 귀엽던지. 곧 결혼할 정도로 다 큰 딸인데 식장 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연애 중이었다.


“이런 게 행복일까요?”

마리엘라는 사랑을 알았다.

원래 세계로, 그녀가 속해있고 익숙하고 바라던 곳으로 돌아갈 길을 포기할 정도의 열정이 있었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고 허전한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아주는 위로.

거기서 싹트는 감사와 고마움.

이 낯설고 넓은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줄 반려를 만나고야 말았다는 격렬한 기쁨이 부르는 열기.

질리언이라는 사람을 그녀는 여러 가지 말로 정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랑을 주춧돌 삼아 행복을 쌓기 전에 불행이 먼저 시작되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감정에 대해 여태도 마리엘라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웠다.

엘리시아가 원작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그때야 이 불행의 굴레를 벗어나려나 상상해볼 뿐이었다.


“남들은 이렇게 좋은 것을 느끼고 사는군요.”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완벽하게 엘리시아와 일레온이 예언서의 끝에 다다를 때가 온다면 마리엘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

간사하게도 염치가 없어 바랄 게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살짝 맛본 딸 아이의 행복이 너무 달아 조금만 더 곁에 머물며 그것을 눈에 담고 싶다고 바라게 되는 걸까.

그러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마리엘라. 행복에 정답은 없소.”

질리언이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가 함께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짧은 것뿐이지. 나는 그대와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다오.”

“질리언. 고마워요.”

마리엘라는 아까보다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깜깜한 창밖을 함께 보던 질리언이 입술 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꽃인 모양이지.”

 

***



“엘리시아.”

일레온이 테라스를 막 타고 올랐을 때 엘리시아는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밤공기가 썰렁한데 왜 나와 있어?”

“흐응. 빨리 보고 싶었어요.”

그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엘리시아를 보며 일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엘리시아가 공작저로 가는 건 정말정말 싫었는데!

진심으로!

반대하고 또 반대해서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의외의 예상하지 못한 순기능이 있었으니 엘리시아가 무려! 애교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엘리시아의 애교라니.

그동안 그녀의 애정표현에 대해 일레온의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나를 모른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든지, 도망가거나 떠나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든지, 슬픈 얼굴이나 무감한 표정 대신 좀 자주 웃어주면 좋으련만.

엘리시아가 ‘해 본 적이 없는 일’로 표현하는 것들을 그가 바라는 걸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 힘들어하고 의식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낮아져서 내 옆에 머물러주기만 하면 된다고까지 바닥으로 내려온 상태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는 사심이 느껴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만큼?”

엘리시아가 엄지와 검지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벌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겨우?”

“후훗. 당연히 거짓말이죠.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게 뭐라고.

엘리시아의 말 몇 마디에 일레온은 다시 마음이 활짝 열리는 걸 느꼈다.


“줄 게 있어.”

그녀에게 풍성한 하얀 꽃다발을 내밀자 엘리시아가 하얗게 웃었다.


“와아. 너무 예뻐.”

“마음에 드나?”

“네.”

달도 숨은 어둑한 하늘 아래 흰 꽃다발을 품에 안은 엘리시아는 너무 아름다웠다.

찬란한 달빛이 내려앉은 듯 화사한 블론드의 머리카락 아래로 흰 피부가 요요하게 느껴졌다.

결혼식을 앞두고 예뻐지고 싶다더니.

오뚝한 콧날 아래로 붉고 도톰한 입술은 오늘따라 몹시 유혹적이었다.

……이 생각을 어제도 했던 것 같은데.

일레온은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어깨에 메고 온 소동물을 떼어냈다.


“어머, 쇼!”

엘리시아가 놀란 얼굴로 꽃다발을 내려놓고 흰 고양이를 안았다.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요?”

“영리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대가 공작저로 간 후로 내내 밥도 안 먹고 책상 위에만 앉아 있더군.”

냐아. 니아우.

주인을 알아본 듯 고양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이르는 투로 작게 울었다.


“배가 고픈 것 같아요.”

“그럴 줄 알고 이것도 챙겨왔지.”

일레온이 꽃다발의 리본과 함께 묶여 있던 무언가를 풀어냈다.


“말린 생선이야.”

“꽃과 생선이라니. 진심이에요?”

“그럼. 나는 늘 진심이지. 손은 두 갠데 꽃도 가져오고 이 녀석도 챙기려면.”

엘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잠에 빠져 고요한 공작저에 울렸다.


“쉿.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엘리시아는 또 한 번 웃었다.

밤이 지나고 나면 방 안에 못 보던 물건이나 꽃이 늘어나는데 밤새 그가 다녀간 걸 부모님이 아시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신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해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군.”

일레온이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웃을 기분이 들지 않게.”

곧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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