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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하던 것 마저 해 (139/151)


139. 하던 것 마저 해
2023.05.03.



 
달이 자취를 감춘 밤의 장막 위로 촘촘히 박힌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났다.

다 지나간 늦여름.

밤바람이 식혀준 서늘한 뺨을 어루만지는 일레온의 손끝이, 손이 탄 자리에 닿는 그의 입술이 뜨거워서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일레온과 나누는 숨결 사이로 익숙한 감각이 퍼지며 긴장이 풀렸다.

몸도 마음도 들뜬 것처럼 끌려 올라가는 느낌, 그것을 엘리시아는 나름대로 자신이 일레온이 말한 그의 짝이 되어서라고 여겼다.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분명 그와 자신이 애타게 서로를 끌어안는 곳이 발 디디고 선 현실이라는 자각이 있었는데.

오데르의 반려가 되고 나서부터는 이런 식으로 서로 얽히는 순간이 조금만 깊어져도 세상과 의식이 멀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한 명뿐.

온몸에 퍼져 있는 오감이 오직 그 남자를 탐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일레온에게 쏠렸다. 정말 그 외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달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아.”

엘리시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열기 어린 눈동자를 제게 고정한 채 골몰하는 그가 보였다.

입술만으로도 황홀을 맛본 어린 숙녀는 예민해진 본능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가 제게 하는 것처럼.


“흣.”

손을 올려 그의 귓가를 어루만지자 일레온이 낮은 목소리로 숨을 들이쉬었다.

일레온은 조각한 것 같다는 진부한 표현도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기에 동그랗게 보기 좋은 귓바퀴라든지 목울대가 움직이는 목선이라든지 그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선들 역시 모두 아름다웠다.

그것을 엘리시아는 천천히 손끝으로 더듬다가 새카맣고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에, 엘리시아. 잠깐만.”

그러자 일레온이 다급히 그녀를 부르며 손목을 잡았다.


“왜요?”

막 손가락 사이로 풍성히 닿던 감촉을 잃은 손이 허전해서 엘리시아는 불만스레 물었다.


“하아. 왜 이러는 거야?”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이러냐니.”

“그대가 이러면 내가. 하아. 이런 걸 설명해야 하나?”

힐책하는 듯한 투에 엘리시아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푹 빠져 허우적대다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예요?”

정말 몰라서 물어본 것인데 일레온은 난감하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게 그러니까.”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그대가 그런 식으로 굴면 내가 참기가 힘들잖아.”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그대도 나를 원한다는 듯이.”

이어진 말에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예요?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당신이 하는 것처럼 따라 하는 거거든요?”

물론 그를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므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일레온의 말은 그는 해도 되고 엘리시아는 안 된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도대체 왜? 그런 걸 누가 정한단 말인가.


“그야 나는 그대를 당장이라도 안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고.”

“나도 그런데요.”

이제는 되려 일레온이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말해요? 나는 당신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럼 그대도 나를…….”

아아, 신의 후손이며 영민한 오데르시여.

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멍청하게 구는 겁니까? 네?

대공저에 머무를 때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들은 한창의 나이였고 서로를 마음에 가득 담아서 언제든 꽉 차오른 것이 터지든 넘치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와 여자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에 대해 엘리시아는 자신을 허락했지만, 일레온이 그의 뜻대로 서두른 결혼이 얼마 남지 않자 ‘첫날밤’에 의미를 부여하며 참았다.

유테르 공작저에서 지낸다는 건 엘리시아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는 참 바람직한 시도였는데.

이곳에 온 후로 조금 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순간이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드넓은 저택에 마리엘라와 질리언이 머무르는 공간은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집에서 해선 안 될 일을 벌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볍게 입술을 맞대는 것으로 애정을 표하다 불시에 달아오른 열기였다. 그러나 누가 훅 불어 끄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가 깨지자 엘리시아는 어쩐지 자신이 안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대도 나를 원하나?”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에 놀라기라도 한 듯 일레온이 입을 벌렸다.


“그럼 이제까지 내가 싫은 걸 억지로 했다고 생각했어요?”

엘리시아는 지금 일레온의 태도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대는 별로 그리 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어째서요?”

“그야 늘 먼저 닿고 싶어서 손을 내미는 쪽이 나니까.”

“당신 바보예요? 그런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바란다고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놓고는 자기가 놀라다니. 지금 놀라야 할 사람이 누군데? 엘리시아는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오그라드는 것 같은 손으로 꼭 주먹을 쥐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늦었네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엘리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의 유리문을 닫으려 했다. 그녀가 불만을 티 내려 한 짓은 몸 쓰는 일에 누구보다 날랜 남자를 막을 수 없었다.

유리문을 가볍게 밖으로 당겨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선 일레온이 낮게 말했다.


“그대의 진심을 알았는데 이렇게 가라고?”

“제 진심이요? 저는 그런 걸 말한 적이 없는데.”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 나가는 말이 이토록 새침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아니. 나는 들었어. 그대도 나처럼 나를 안고 싶…….”

“으아아! 말하지 말아요!”

엘리시아는 뺨을 붉힌 채 일레온의 입을 막으려 했다. 별것도 아닌데 귓구멍 속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제 입술을 누른 손바닥에 슬쩍 입을 맞추며 일레온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리지 마세요.”

“놀린 적 없어.”

“당신도 그렇게 하잖아요? 난 그냥 당신이 하는 것처럼 따라서 해 본 것뿐인데.”

억울해서 타박하듯 말하는데도 일레온은 그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아. 계속해 봐.”

일레온이 입고 있던 셔츠의 윗단추를 푸는 걸 보며 엘리시아가 기겁했다.


“돼, 됐거든요.”

“아까 하던 것 마저 해.”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엘리시아는 민망해서 침대 반대편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레온이 팔 아래 갇힌 채 그를 마주 보려니 금방 다시 가슴이 떨려와 엘리시아는 모른 체 하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일레온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작게 웃더니 그를 외면하느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나를 유혹하지.”

“그런 적 없어요.”

“난 네가 숨만 쉬어도 유혹당해.”

“흑.”

목선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귓가에 닿자 아랫입술을 물고 있던 엘리시아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무슨 신호가 울리기라도 한 듯 일레온의 눈빛이 짙어졌다.


“조금만 보게 해줘.”

무엇을? 하고 묻지 않아도 그의 시선이 그녀를 옭아맸다.


“잘 참는 거 알잖아. 응?”

듣기 좋은 음성으로 그녀를 내어달라고 조르는 소리가 귓가에서 질척였다.

엘리시아가 잠옷 위에 걸치고 있던 나이트 가운의 끈을 풀자 일레온이 그것을 살살 끌어내렸다.

헐겁고 얇은 모슬린 잠옷이 가느다란 몸을 휘감고 있는 걸 보고 그가 한쪽 입술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불공평해.”

엘리시아가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다.


“당신은 맨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내가 뭘 어쨌다고.”

“너무 좋아서 그랬어. 미안.”

짧고 간결한 사과의 말이 그가 입술로 무는 쇄골에 뭉개어졌다.

***

아침에 눈을 뜬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첫째는 일레온이 여태 그녀를 끌어안고 함께 누워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해가 중전이라는 점이었다.

당황한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흔들었다.


“일레온. 일레온. 일어나 봐요.”

“흠.”

가늘게 눈을 뜬 일레온이 그녀를 보자 미소지었다.


“좋은 아침이군. 잘 잤나?”

“아침이 아니에요. 큰일 났어요.”

엘리시아가 울상을 짓자 일레온이 가볍게 볼을 톡 건드렸다.


“큰일일 것까지야.”

“깨우러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태평한 모습에 화가 나려 했다.


“빨리 나가요. 아, 어떡하지. 어디로 나가지?”

유테르의 낙원은 보살피는데 품이 많이 들었다.

이런 낮에라면 벌써 정원사들만도 여럿이 밖을 돌고 있을 텐데.


“아침에 공작 부부께 인사드렸어.”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어젯밤 선물은 꽃이었냐 물으시던걸.”

“아. 어떡해.”

아직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며칠이나 남았는데 부모님 얼굴을 어찌 본단 말인가.

방 안에 못 보던 물건이 늘어나니 그가 오가는 걸 아실 거라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에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엘리시아는 난감했다.


“이리 와서 잠이나 더 자자.”

“아이 참. 빨리 일어나요. 아랫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그 얘길 하셨어.”

일레온이 팔꿈치로 몸을 가누며 비스듬히 일어났다.


“나는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승인하신 상태야.”

“네. 그렇죠?”

“그런데 아직 대공비의 이름이 비어 있군.”

보통은 결혼식을 올리며 가문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는 법이었다.


“공작께서 칙서의 공란에 그대의 이름을 적길 바라셔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지. 뭐든 조금이라도 확실한 것이 좋으니.”

일레온은 부인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유부남이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지만 공작이 그것을 염려해준 셈이었다.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다면 식전에 밤마다 딸의 방에 드나드는 걸 허락해주겠다 에둘러서 말이다.


“언제 하죠?”

“지금.”

일레온이 벗어둔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자그마한 황금 두루마리를 꺼내오자 엘리시아는 기가 막혔다.


“당신. 그걸 가지고 다녀요?”

“그럼. 그대를 가지고 다니고 싶지만 참고 있어.”

실없는 말을 흘려넘긴 엘리시아는 새삼 황제의 칙서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리고 제 이름을 적어넣어야 할 곳에 망설임 없이 ‘엘리시아 유테르’라 적어넣었다.


“엘리시아 유테르를 대공비로 맞이하는데 조건 없이 허락한다.”

완성된 문구를 따라 읽으며 일레온이 흡족해했다.


“이 아래에는 결혼 후 그대가 쓰게 될 이름을 적는 거야.”

“그렇군요.”

일레온은 칙서의 가장 아래 왼쪽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펜을 건네받은 엘리시아는 그 옆에 제 이름을 적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긴장할 것 없어.”

“응…….”

엘리시아 클레벤트.

그의 가문을 제 이름 뒤에 붙여 적자니 왠지 긴장이 되었지만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천천히 적어나갔다.


“그대가 나의 대공비로군.”

일레온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희색이 만연한 얼굴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했으면 실수했을 것 같아요.”

그가 보는 데서 적는데도 이럴 정도면 말이다.


“실수를 하든 안 하든 그대가 내 대공비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겠지.”

“대공비가 되었는데 잠옷 차림이라 부끄러운데요. 나가 줘요. 옷 좀 갈아입게.”

“대공이 대공비가 잠옷 차림인 것도 취향이라 알려주어야 하나?”

대공비라는 공식 직함을 침대 위에서 실랑이하는 데서 가장 먼저 듣게 될 줄이야. 엘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통탄할 때였다.

쾅. 쾅.

다소 격렬하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아.”

밖에서 들리는 마리엘라의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깜짝 놀라 일레온을 보았다.


“얼른 나와보렴. 대공 전하께서도 거기 계시지?”

“무슨 일이예요?”

급히 가운일 입고 매무새를 정돈한 엘리시아가 문을 열자 마리엘라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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