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 공작가의 데릴사위 (140/151)


140. 공작가의 데릴사위
2023.05.06.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어.”

“폐하께서요?”

“폐하께서 쓰러지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레온이 묻자 마리엘라가 해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황궁에서 레브 전하께 사람을 보냈다는군요. 황녀 전하께서 대공저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대공께서 계시지 않아 공작저로 직접 오셨답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어머니께서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바로 입궁하셔야 한답니다.”

“알겠습니다. 서두르지요.”

일레온은 지금 막 공작저에 도착하기라도 한 듯 어느새 멀끔한 차림새였다. 마리엘라가 엘리시아를 도로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계시니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렴.”

“네.”

문을 닫고 엘리시아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어젯밤, 그리고 조금 전 일레온과 애정을 나누던 시간이 환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멀어졌다.


“휴우.”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일레온은 모든 것을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오데르의 힘을 가진,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이라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다 보면 자연히 휩쓸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동조해서 말하고 행동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게 현실이야.”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확실히 해결된 게 없었다.

갑자기 차가운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흥이 식고 정신이 차려졌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엘리시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향했다.

***

응접실에 들어선 일레온을 보며 레브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대공비를 맞으라 했더니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된 것 같구나.”

“어머니께서는 어느 쪽이든 손주를 볼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여기실 게 아닙니까.”

그녀의 잔소리를 받아치는 일레온을 보며 레브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엘리시아와 결혼할 수 있게 힘써 달라 할 때는 언제고 요즘 아들의 태도는 이보다 뻔뻔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결혼하면 아들은 남이라더니.’

대공인 주제에 죽어서도 유테르의 낙원에 묻히겠다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것보다 어찌 된 일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알현을 거절하신 건 진짜로 편찮으신 게 아니셨을 텐데요.”

일레온이 목소리를 낮추자 레브도 보통 사람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무를 모두 직접 보고 계신 걸 확인했지. 내내 집무실과 침실만 오가며 바쁘게 지내고 계셨어. 네 혼사를 허락하는 걸 황후께서 방해한다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의식이 없으시다니.”

레브의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가 없어. 오라버니께서 왜 저리되셨을지 생각해봐도 아무래도 답이 나오질 않아서.”

그들은 오데르였다. 레브도, 일레온도 자신이 오데르이니만큼 풍문으로, 추측으로, 또는 황실에서 일부러 흘리는 오데르에 대한 이야기가 허와 실을 가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오데르가 어떻다는 이야기는 대체로 원래 힘을 축소하여 제대로 알리지 않을 목적이었다.

오데르는 엄연히 따지면 사람이 아니었다.

지상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든 신적 존재에 더 가까웠다.

튀어나온 돌은 정을 맞는 법.

뭇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위해 오데르의 피에 대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만 알려준 것에 불과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예를 들면 노화가 느리다든지, 신체적 능력이 좋아 소드마스터가 쉽게 개화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

대신 오데르의 반려가 되면 힘을 나누어 받는다든가 그런 것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오데르의 피를 노리는 이들이 나오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독을 썼다고 생각하겠지만.”

“오데르는 독에 당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레브가 중얼거린 말을 일레온이 받았다.

오데르는 독에 당하지 않는다.

술에도 취하지 않는다.

신의 핏줄이 가진 명민함과 이지는 무엇으로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크시스 황제가 어제까지 멀쩡히 정무를 보다가 쓰러지다니.

쓰러진다는 것 자체가 오데르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오데르인 두 사람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데르는 아프지 않아. 병이 나서 자리 보전하는 일이 없지. 선황제께서도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아직 사십 대와 같은 외모와 건강이셨어. 그러다 때가 되자 우리를 불러 모으셨지.”

자신의 수명을 정확히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 불러모아 정정한 모습으로 유언을 남기고는 다음 날 바로 평안에 들었다.

그래서 마크시스 황제가 ‘편찮아서’ 알현을 할 수 없다는 건 당연히 핑계라 생각했건만, 진짜 그가 쓰러져 의식이 없다는 건 더더욱 미심쩍었다.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군요.”

“그래.”

레브를 보며 일레온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들의 말에 제 얼굴을 손으로 쓸고는 레브가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늘 태산 같은 분이라 여겼거늘.”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오라비였다.

늦둥이로 태어난 레브를 마크시스는 무척 귀여워했다. 황궁 도서관이며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검술이며 글이며 어린 동생을 직접 가르치려 할 정도였다.

선황제 부부는 그런 남매의 우애를 흐뭇해하며 딱히 마크시스를 말리지 않았다.

어쩌면 레브가 레이디로의 삶보다 조금 호전적인 면을 가지게 된 건 어린 시절 그녀의 교육에 큰 지분을 가졌던 마크시스 탓일지도 몰랐다. 분명 어머니는 얌전하고 조용한 분이었는데, 레브는 오빠 뒤를 따라다니며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오데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도 정확하지 않아. 어쩌면 우리도 아플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오데르이시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내 곁을 떠나시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을까.”

네 아버지와 달리.

레브의 숨은 속뜻을 알아들은 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오데르는 자신의 짝을 힘과 수명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데, 살아온 자신으로 남기를 원해 반려가 되지 않고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자 담담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레브가 속으로 받은 충격의 깊이가 느껴졌다.


“너도 더욱 조심하려무나. 책임져야 할 것이 늘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공작 부부와 엘리시아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황제께서 위중하시다니 공작도 나와 함께 입궁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모자끼리 나눈 이야기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

사비엘의 패악으로 자주 소란스러운 수정궁이 오늘은 달리 소란했다.


“전하. 이 보석은 어떠십니까? 난쿠 대륙의 에메랄드 광산에서 작년에 나온 가장 큰 보석이라 합니다.”

주먹 반만 한 커다란 초록 보석이 그려진 종이를 유심히 보던 사비엘이 시큰둥하게 손을 내밀었다.


“초록색은 별로군.”

한동안 엘리시아 때문에 금과 보랏빛 보석을 모으는 취미에 빠졌던 그였다.

초록색 에메랄드는 카리나를 떠올리게 했기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전하의 보관에 자리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진주는 황후께 가야 옳은 물건이고. 클레벤트 대공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면 귀물을 감추고 있을 법도 한데.”

클레벤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사비엘이 무섭게 황실 예장 제작자를 노려보았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 이름을 올리면 목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헉. 예. 예. 죄송합니다. 전하.”

비굴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내가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것을 더 찾아오너라.”

“예. 전하.”

물러나는 장인을 보며 수정궁을 오가는 이들이 속으로 혀를 찼다.


‘호부 아래에서 견자가 났구나.’

아비가 범인데도 저렇게 쓰레기 같은 개새끼가 자식으로 태어나다니.

황제가 쓰러진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황태자란 놈이 하는 작태가 가관이었다.

마땅히 아비의 병환이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는 게 사람 된 도리이거늘 즉위식에 쓸 보관과 예복을 맞추느라 바빴다.

마크시스 황제는 호인이었다.

신의 핏줄, 오데르가 다스리는 콘스탄스 제국은 이천 년 사에 큰 화가 없이 안락하게 풍요를 보장받아 평온했다.

감히 오데르의 혈연으로 이어지는 황권에 도전하려는 자는 없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몸이 검을 쥐고 소드마스터로 버틴 자리에 뭣 하러 개죽음을 당하러 달려든단 말인가.

오데르가 황제로 버티고 선 평화 아래에서 꿀을 빠는 게 더 이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마다 성격이 자로 잰 듯 같은 것이 아니기에 황제마다 통치 시기별로 이런저런 일이 제국사에 없는 건 아니었다.

사치나 여색에 빠졌던 황제도 있고, 호전적이라 대륙 통일을 꿈꿨던 황제도 있었다.

마크시스 황제는 불필요한 일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제 뜻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 온건한 황제였다.

황실 예산이 매년 남아 차곡차곡 국부로 쌓였다. 후궁을 하나, 둘쯤은 둘 법도 한데 세라피나 황후 외에 황제의 침실에 들 수 있는 여인이 없었다.

황궁에 일하는 이들이 갑작스레 잘리거나 쫓겨나는 일도 없어 이번 황제 대에 이르러 황궁 보직이 철밥통 꿀보직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귀족들은 황제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정치에서 감정을 배제하자 황제를 더욱 따르고 존경했다. 마크시스 황제가 아니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모두들 납득할 정도였다.

그토록 적이 없는 황제로 만인의 존경을 받던 이였는데.

황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황궁 안에는 소문이 돌았다.

실은 오데르에 대한 전설이 그동안 과장된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아니라면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황제의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쓰러진 후 황제는 부쩍 주름이 깊어지고 나이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선황제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꽤 젊은 모습이셨는데.」

 
궁 안에 가장 오래 일한 시종 하나가 돌아가신 선황제를 먼발치에서 뵈었었다며 말했지만 멀리서 봐서 제대로 모른 것이라며 다들 코웃음 쳤다.


「늙지 않는 게 말이 돼? 황제 폐하를 신성한 존재로 우러러보게 하려고 과장한 거겠지.」

 
그런 이들도 오늘 급히 입궁한 레브를 보고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곧 사십 대 중반을 보는 나이에 젊은 청년처럼 홍안을 한 여인.

함께 입궁한 클레벤트 대공은 분명 황녀의 아들인데 나이 차이나는 누나와 동생뻘로 보일 정도로 레브의 몸에서는 젊음과 활기가 흘러넘쳤다.

심지어 황제의 소식을 듣고 굳은 얼굴이었는데도 오데르의 피가 보증하는 정기를 드러내지 않을 방법은 없다 보니 그녀와 일레온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홀린 듯 그 존재에 끌렸다.

제 피를 이은 후손으로서 만인의 위에 서라는 신의 뜻.

마크시스 황제가 그간 그런 면이 없었다는 걸, 누구도 간파하지 못했다.


“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아뢰자 황제의 침실 문이 열렸다.

세라피나 황후가 눈물범벅으로 퉁퉁 부은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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