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오데르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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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오데르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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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오데르의 놀이
2023.05.10.
“어서 오세요. 황녀.”
그간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레브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세라피나 황후의 눈동자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
올케언니인 그녀의 충격과 고통을 목도하자 그제야 가족이, 황실이라는 제국 정점의 어른이 쓰러졌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많이 놀라셨지요?”
레브는 자연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세라피나 황후가 자신을 감금했던 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일레온이 태어난 후로 사비엘의 황태자 지위가 위태로울 때마다 점점 멀어지고 날을 세우던 이였으니.
그러니 세라피나 황후가 제 피를 노려 실제로 위해를 가했던 건 결국 제 자식에게 향한 칼이었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어미는 없다.
주먹만 한 핏덩이를 낳아놓고 개, 고양이라도 제 새끼에게 손을 댈 것 같으면 성치 못한 몸으로도 이를 드러내며 발톱을 세우는 법이 아닌가.
사비엘을, 세라피나 황후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호되게 나무라거나 벌하는 일은 오라비인 황제의 가정사, 내밀한 문제와 직결되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모두가 불행해진다.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마크시스 황제가 아내와 자식 일로 번민에 휩싸이면 그 또한 레브 자신을 좀먹을 테지.
하나의 일이 깔끔하게 끝내거나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법이 없고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다른 문제로 연결이 되었다.
레브는 세라피나 황후에게 ‘내가 알고 있다’고 압박하며 자식의 등 뒤에서 힘을 주는 것으로 당분간 관망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쓰러져 짓무르기 직전인 붉게 부은 눈가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세라피나를 보고는 그간의 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저 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적어도 마크시스 황제의 병환 앞에서는 세라피나도 자신도 같은 마음일 테니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찌 되신 겁니까?”
레브의 물음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세라피나 황후 대신 궁의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제 주무시던 중 의식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주무시다가 그렇게 되셨다고?”
“예. 황녀 전하. 최근 부쩍 피곤하시어 오수를 즐기시는 날도 늘고 기운이 나고 정신을 맑게하는 강장제를 찾으시기도 하셨나이다.”
궁의의 말을 들은 레브는 더 어이가 없었다.
‘황제께서는 오데르이신데 그런 것을 찾으실 리가.’
실로 몇 날 며칠 잠을 하나도 자지 않아도 멀쩡할 정도였다.
몸 안에서 뜨겁게 피를 데우고 돌리는 심장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신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손은 육체적으로 힘겨울 때가 없었다.
단,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만은 달라서 이토록 강건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남편 데자르 공이 먼저 죽음을 맞았을 때는 레브도 상심하여 잠이 늘고 식욕이 떨어지고 가슴 복판이 쓰라리듯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에 따라 아주 놀라거나 큰 충격을 받으면 아무리 오데르여도 진짜 몸이 아픈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황궁 안에서 꾀병을 핑계로 알현을 거절하면서도 정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황제가 그럴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데.’
황실의 궁의는 황제를 진찰하지 않는다.
오데르는 병들거나 아프지 않으니까.
오데르가 아닌 황실 식구들을 보살피기 위한 존재였다. 황제의 건강을 진단하는 건 일 년에 한 번 정도 의례적인 것으로 대대로 궁의에게 내려오는 일지 형식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적혀 있는 내용도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삼십 대 못지않은 건강’ 이런 식으로 오데르에 대한 찬양에 가까워서 딱히 기록으로 큰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궁의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황제의 건강에 대해 ‘좋지 않다’거나 ‘쓰러졌다’고 표현하는 모든 말이 알려진 오데르의 특징을 거스르는 것이었으니.
일레온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가 나서서 궁의에게 물었다.
“다시 눈을 뜨시거나 하시지는 않았나? 잠이 깨는 약은 써 보았는가?”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으신지라.”
궁의가 핼쑥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가 대단히 안 좋으시다거나 그렇지도 않아서. 마치…….”
그는 황제의 상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어서 말해보게. 나중에 오진이라 추궁하지 않을 테니.”
“말해보세요. 내 황녀의 말대로 할 테니.”
황후까지 나서자 그가 겨우 대답했다.
“깊은 잠을 주무시는 것 같사옵니다.”
“잠이라고?”
“예. 전하.”
레브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주름진 마크시스 황제의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레브는 불안하게 치미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황제 폐하와 둘만 있고 싶습니다.”
그녀가 말하자 세라피나 황후가 주춤하며 레브를 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달리 치료할 방법도 없겠지요.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황제 폐하를 천천히 눈에 담고 싶을 뿐이니.”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질리언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안타까워하는 공작의 모습에 일레온이 나섰다.
“허락해주시지요. 황후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잠시 물러나도록 하지요.”
세라피나 황후가 질리언을 보았다.
“내 유테르 공작에게 긴히 할 얘기도 있으니 잠시 차라도 함께 들도록 해요.”
“예. 황후 폐하.”
모두가 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레브는 예민하게 촉을 세웠다.
다행히 방 안에는 달리 감시하는 눈이 숨어 있거나 그러진 않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쉰 레브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오데르의 힘을 끌어올렸다.
오데르.
신의 이름이면서, 신의 핏줄을 부르는 말임과 동시에 몸을 타고 흐르는 괴이한 힘의 정체.
그 힘을 잘 다루어보려고 노력해본 적은 없었다.
한 대에 한 명.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날 오데르의 남자아이.
오라비인 마크시스가 오데르인데 제국사에 유례없게 그녀가 같은 힘을 가졌는지 레브 역시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궁금하다고 답을 들을 수 있는게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일레온이 시도해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들은 그녀보다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예언서를 거스르며 엘리시아를 보호하느라 일레온의 몸에 예전처럼 활력이 돌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이런 식으로 했지.’
레브는 손바닥을 위로 가게 허공에 들고 잠시 집중했다.
그러자 빛이 나는 작은 구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어떻게 되긴 하는군.’
오데르의 힘을 다루는 법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자.
신의 비밀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어린 시절 레브도 선황제로부터 놀이처럼 이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소드마스터란 것 역시 별것 아니었다. 오데르의 힘을 검에 밀어 넣는 것만으로 검기를 내고 무인으로 개화할 수 있었다.
때로는 이 힘만으로도 방패를 만들 수도, 또 연습하기에 따라서 날카롭게 무기처럼 쓰거나 날릴 수도 있었다.
그걸 눈을 뜨고도 사랑에 눈이 먼 것 같은 아들은 제 여자의 몸에 갑옷처럼 둘러주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데르는 하나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선황제의 몸에 흐르는 힘과 제 몸에 흐르는 기운은 물과 같았다.
한 곳에서 뿜어나온 원천수처럼, 잠시 떠올렸다가 도로 흘려보내도 티 나지 않게 본래의 하나가 되는 물처럼.
힘을 품은 사람이 다르다고 하여 다른 기운을 띠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의 몸에 있는 기운을 공놀이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며 노는 것처럼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레브 역시 일레온에게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와 해 본 적은 없었군.’
레브는 손바닥 위에 주먹만 하게 모인 힘을 슬며시 마크시스 황제의 가슴 중앙에 내려놓았다.
약이나 무엇으로도 그를 깨울 수 없다 해도 만약 마크시스 황제가 정말 다른 오데르보다 조금 일찍 기력이 쇠한 것뿐이라면 레브의 힘에 반응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녀의 정기를 불어넣는 것만으로 우화하듯 깨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어?”
하지만 다음 순간 레브는 깜짝 놀랐다.
제 손을 떠난 빛 뭉치가 마크시스 황제의 몸에 닿자 흡수되지 못하고 폭발하듯 잔영을 남기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말도 안 돼.”
레브는 허둥지둥 황제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어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살아 계시거늘.”
오데르의 힘이 몸에 흡수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흩어지는 건 딱 한 경우뿐이었다.
임종을 맞았을 때.
선황제도 그녀와 힘을 주고받으며 넌지시 일렀다.
「아비가 신좌의 곁에 가는 날에는 이 놀이를 할 수 없단다.」
「왜 못 해요?」
「오데르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더는 몸에 힘이 남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데르끼리 죽음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돌아가신 선황제의 가슴에 오데르의 힘을 뭉쳐 내려놓았을 때 그녀는 ‘놀이’가 끝난 것을 알았다. 선황제가 알려준 그대로였다.
“아직 살아계신데 어째서 이렇지?”
마크시스 황제의 몸이 제힘을 튕겨낸 것이 당혹스러웠다. 선황제의 죽음과 나란하던 기억이 살아 있는 그에게서 반복된 것 모두 충격이었다.
그때였다.
“이게…… 뭐지?”
호흡을 살피느라 숙인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황제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렌즈인가?”
렌즈는 흔히 눈 색을 가리는 데 사용되었다. 지위가 높은 왕족이나 귀족들은 가문의 특징을 색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일이 많았다.
혹 신분을 감추고 여행이나 멀리 출타를 하게 될 때 눈 색과 머리 색만으로도 신분이 탄로 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어느 때부턴가 의안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세공품으로 눈동자 색을 가릴 렌즈를 만들곤 했다.
눈에 직접 닿는 물건이니만큼 제작하기 까다롭고 기술이 필요한데다 수요가 아주 많은 물건도 아닌지라 구하기도 어렵고 대단히 고가였다.
그녀 역시 보자마자 오데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붉은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 검은 렌즈를 써 본 적이 있었다.
렌즈를 끼고 밖에 나간 날은 무척 즐거웠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오데르’라거나 ‘레브 전하’라고 외치는 이들이 지운 듯 사라졌다. 그런 일탈의 순간 중 어느 날 남편을 만나기도 했고 말이다.
“이게 왜 이런 곳에…….”
붉은 렌즈를 들여다보며 레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똑똑.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레브는 황급히 그것을 손에 쥐어 감추었다.
“무슨 일인가?”
“전하. 황제 폐하께 약을 올리려 합니다.”
“그래. 안으로 들게.”
궁의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레브는 침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문밖 복도에 혼자 서있는 일레온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황후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일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테르 공작께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더군요.”
레브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황궁 정원에 급히 티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내 공작과 꼭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답니다.”
세라피나 황후는 조금 전 황제의 곁에서 눈물짓던 것과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질리언을 보았다.
“제게 하문하실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래요. 실은 이 사람. 엘리시아 영애가 태어났을 때부터 황태자의 짝으로 점찍어두었답니다.”
예상했던 이야기였지만 알고 듣는다고 기분이 덜 나쁜 건 아니었다.
질리언의 입장에선 마리엘라가 빙의를 했든, 제 딸이 데드 플래그의 인물이든 그런 걸 모두 떠나 엘리시아가 원치 않는 결혼은 반대였다.
그는 철저히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었으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후 폐하. 엘리시아는 클레벤트 대공 전하와 정식으로 혼인하였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