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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겪어본 실망, 아는 좌절 (142/151)


142. 겪어본 실망, 아는 좌절
2023.05.13.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후 폐하. 엘리시아는 클레벤트 대공 전하와 정식으로 혼인하였사옵니다.”

“뭐라고요?”

예의상 하는 표현, 귀족 간 예법으로 여겨지는 돌려 말하는 법 없이 딱 잘라 대답하는 질리언의 태도에 세라피나 황후는 당황했다.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그보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시기도 전에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저야말로 여쭈고 싶습니다. 클레벤트 대공께서 황제 폐하께 전하의 혼인을 승인한다는 칙서를 받을 때 그 자리에 황후 폐하께서도 함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세라피나 황후는 아랫입술을 입 안쪽에서 깨물었다.

질리언 유테르 공작.

가장 큰 권력의 실세인 대공가를 빼면, 콘스탄스 제국에 공작은 단둘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에 이르러 공작가의 가주인 질리언이 정치에도 사교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괴짜라 그런 성격이려니 하는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그를 마주해본 일이 없었다.


‘이런 자였나?’

무엇 하나 아쉬운 것 없다는 듯이 꼿꼿하게 마주 앉아 제국의 가장 고귀한 여인인 자신 앞에서 굽힘 없이 제 뜻을 전해오다니.

그러나 화술이며 태도며 황실 예법에 어긋남이 없어 어쩐지 더 분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 칙서 말입니까? 그래요. 그런 것이 있었어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지요.”

세라피나 황후는 가까스로 말을 이어갔다.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저리되실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곧 황태자 전하께서 대리청정하셔야 할 텐데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유서 깊은 공작가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지요.”

너무 뻣뻣하게 구는 공작에게 에둘러 넌지시 말하는 건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세라피나 황후는 자존심을 접고 진솔하게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대리청정이라니. 황태자 전하께서 섭정을 하신단 말입니까?”

질리언의 표정이 조금 변하는 걸 보며 세라피나 황후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요. 황제께서 저리되셨는데 언제까지 정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황후 폐하.”

“전례가 없다니요?”

“콘스탄스 제국은 신좌에 오르신 오데르의 가호를 받고 있지요. 신의 후손인 황제께서 강건하시니 감히 황권에 도전하는 이가 없지만 귀족들이 빈번히 반역하는 팔레르모나 황족이 많아 후계 문제가 잦은 트로팔가라에서도 섭정을 빨리 결정하는 일은 없습니다.”

갑작스레 시작된 질리언의 청산유수에 세라피나 황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타국의 상황이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없다니요. 섭정을 이르게 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까?”

세라피나 황후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우선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어렵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역대 콘스탄스 제국의 황제들 중에도 손꼽게 선정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폭군이 위태하여 섭정을 하게 된다면 모를까 그런 분께서 쓰러지신 지 고작 며칠 만에 섭정이니 대리청정이니 하는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면 반발하는 귀족들이 황태자 전하의 능력을 검증하고 싶어할 겁니다.”

“감히 귀족들이 무어라고 정당한 황태자의 지위를 검증한단 말입니까?”

세라피나 황후가 예민하게 말해도 질리언은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외세와의 관계 문제도 있지요.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오데르이시고 다른 나라에서도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걸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 섭정에 나선다면 제국의 황제가 신격이 아니게 되므로 억제되고 있던 주변 나라들의 호승심을 자극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호승심을 자극한다고요?”

“예. 감히 신좌에 오르신 오데르께서 굽어살피는, 신의 핏줄이 아니라 벨 수 있는 인간이 황제가 된다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

세라피나 황후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질리언이 역사에 빗대어 그녀를 질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제께서 기력이 없으시더라도 되도록 황위 계승을 늦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혼인의 건이라면 엘리시아는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될 수 없는 몸입니다.”

“황태자 비가 될 수 없다니. 그건 누가 정합니까?”

“황태자비가 되려면 혼인한 적이 없는 순정한 귀족가의 처녀여야 하지 않습니까?”

질리언은 적절한 타이밍에 푹 한숨을 쉬었다.


“대공께서 진작 황제께서 허락하신 혼인이라 하여 칙서에 서명하고 가문에 이름을 올렸지요. 이번 주말이 결혼식이었습니다만. 아뢰기 부끄럽습니다. 대공께서는 요 며칠 공작저에서 딸 아이와 같은 방을 쓰고 계셨지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식을 올리지도 않은 영애가 어찌 그런!”

“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황제께서 정식으로 허락하신 일이지 않습니까. 그 애는 엘리시아 유테르가 아니라 클레벤트 대공비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지내는 것을 딸아이를 시집보낸 아비가 무어라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처럼 말하는 질리언의 태도에 세라피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아. 그럴 수가.”

“황후 폐하께서 하신 말씀 깊이 받아들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유테르의 이름을 걸고 개국공신으로서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되실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고 받들 것입니다. 신하가 주군께 충심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요. 공작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세라피나 황후는 맥이 빠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눈 대화는 무척 유익했답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 들었는데 소문이 사실이군요. 황태자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말을 믿도록 하지요. 이만 물러가세요.”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레브가 일레온을 돌아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가 나설 틈이 없구나. 공작께서 황후 폐하께 밀리지 않으시니.”

만만치 않고 뜻을 이룰 때까지 질척거리는 화법이 특징인 세라피나 황후를 저렇게 깔끔하게 거절하다니. 흠도 잡히지 않고!

사돈이 된 공작을 보는 레브는 흐뭇한 얼굴로 일레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

유테르 공작저에 어스름이 찾아들었다.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방 안에 엘리시아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흰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토르소에 입혀 둔 드레스는 아주 아름다웠다.

르발레인의 주인이 혼을 갈아 넣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과장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흰 실크 위로 얇은 레이스를 겹겹이 풍성하게 겹쳐 부푼 치맛단에는 허리께부터 중간까지 촘촘히 투명한 보석과 자그마한 진주를 꿰어 자수를 놓았다.

엘리시아는 그곳에 앉아 있은 지 한참이었다.

한낮의 햇살에 천사의 날개라도 된 듯 흰 드레스가 눈부시게 빛나는 걸 보다가 날이 저물어 그 옷이 빛을 잃고 재색 어둠에 잠식되는 지금까지 때때로 손을 뻗어 누군가 밤을 지새웠을 자수의 선을 손끝으로 따라 그릴 뿐이었다.


“엘리시아.”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마리엘라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무감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딸을 보고 그녀가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엄마.”

“응?”

“제 결혼식은 취소되겠죠?”

제국 황제의 변고였다. 그것을 무시하고 경사를 감행하기엔 유테르 공작가도 클레벤트 대공가도 편한 입장이 될 수 없었다.


“……엘리시아.”

마리엘라는 무어라 위로해야 할까 말을 골랐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엘리시아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좋은 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기대했나 봐요.”

엘리시아는 울지 않았다.


“정말 잘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준비도 다 끝났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슬을 머금고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화사한 장미나무 같던 아이가 하루 만에 시들한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린 꼴을 보자 가슴이 시큰거렸다.


“일레온이 실망하면 어떡하죠?”

“그게 무슨 말이니?”

“이런 일이 늘 있으니까. 저도 이렇게 지긋지긋한데 그라고 다를까요? 이번에야말로 질려버렸을지도 몰라요.”

“말도 안 돼. 일레온은 그렇지 않을 거란 거 알잖니.”

마리엘라는 엘리시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힘없이 가벼운 자그마한 머리가 위로를 찾아 마리엘라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행복하고 싶은데. 나도 일레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엄마. 행복하기는 어렵고 불행하기는 너무 쉬워요.”

엘리시아는 비탄에 빠져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옭아맨 저주스러운 운명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번번이 앞을 막는 장애물에 부딪혔다.

부딪힌 충격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단단했던 의지도 갉아버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일이 반복돼도 힘을 내보지만 겪어본 실망, 아는 좌절이라고 네 번, 다섯 번째가 쉬운 건 아니었다.


“슬퍼요. 그런데 진짜 많이 실망했나 봐요. 눈물이 안 나는 걸 보면.”

마리엘라는 할 말이 없었다.

불과 지난 밤, 그녀 또한 질리언에게 했던 말이 아닌가.


「이런 게 행복일까요?」

 
행복도 불행도 쉽게 전염된다.


「남들은 이렇게 좋은 것을 느끼고 사는군요.」

 
엘리시아가 행복에 젖어 기꺼워할 때 충만하게 부풀던 가슴이 메말라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너처럼 귀한 아이가 어째서 내 딸로 태어났니?

통탄할 일이었다.


“괜찮아. 엘리시아.”

마리엘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생각 할 것 없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예상 밖의 일이 자꾸 일어나지만 그래도 잘 되고 있어.”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고 마리엘라를 보았다.


“따지고 보면 넌 벌써 장례를 치렀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피했잖니. 게다가 강제력의 위협에서도 벗어났고.”

“그건 일레온이 애를 써주었으니까.”

“그래. 난 너를 하듄샤에 보내 시간을 벌다가 도망치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일레온이 널 도와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거든.”

어쩐지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리엘라는 일부러 씩씩한 말투로 말했다.


“그건 기적이야. 네가 기억을 잃은 채로 그를 만난 것과 여기까지 온 모든 것이.”

“그런가요?”

엘리시아가 솔깃한 듯 묻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예상하지 못한 일 뒤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일이 따라온단다. 이제까지 늘 그랬잖아.”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마리엘라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될 거야. 무조건 잘 될 거란다.”

“일레온이 저를 포기할까 봐 걱정돼요.”

“그럴 리가 있겠니? 그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따지자면 편한 길과 어려운 길 중에 골치 아픈 쪽을 선택한 거잖아.”

그녀는 엘리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일레온도 널 쉽게 선택한 건 아닐 거야. 있잖니 고민을 많이 하고 더 어려운 선택을 한 사람은 쉽게 그걸 저버리지 않는단다. 그게 귀하다는 걸 알거든.”

마리엘라는 엘리시아를 위로하기 위해 그간 잊혀졌던 작가적 재능을 총동원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겠죠?”

“그렇다니까.”

조금 전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풀 죽어있던 엘리시아가 옅게 미소 짓는 걸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마님.”

시녀가 방문 밖에서 마리엘라를 불렀다.


“주인님과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내가 내려가 보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엘라가 엘리시아를 꼭 안았다 팔을 풀었다.


“거울이라도 보렴. 대공께서 괜한 걱정 하시지 않게.”

“네.”

마리엘라가 방 밖으로 사라지자 엘리시아는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살폈다.


“괜찮을 거야.”

짧게 심호흡을 하며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가도 되나?”

“네.”

곧 일레온이 문을 열고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시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다녀오셨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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