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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키스해주세요. 부인. (143/151)


143. 키스해주세요. 부인.
2023.05.17.



“다녀오셨어요. 여보.”

환한 얼굴로 그를 반기는 엘리시아의 얼굴을 본 순간 일레온은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심장이 왜 이러지?

그녀가 그를 보고 웃어주어서 좋은데, 무언가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일레온은 감동했고, 한편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왜요? 보통 부부들은 이렇게 부른다던데요. 연애 결혼한 귀족들도 부부끼리만 있을 때는 이런 말 쓴댔어요.”

“누가 그래?”

“집사님이요.”

아직 연애 한번 안 한 모태 솔로였지만 집사의 충직함은 일레온의 심금을 울렸다.


“그래. 베르나르의 말이 맞아.”

엘리시아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여보’라는 말은 파괴력이 엄청나서 일레온의 이성을 녹여버렸다.


“한 번만 더 불러봐.”

그는 애가 탔다.


「다녀오셨어요. 여보.」

 
마음의 준비 없이 불시에 들어서 그런지 너무 아쉽게만 느껴졌다.


“싫어요.”

“왜?”

“부끄러우니까.”

일레온은 머리를 굴렸다. 전쟁터에서 적의 목 수만을 벨 때나 썼던 지략과 전략이 새 신부의 입에서 다정한 여보 소리 한 번 더 듣고자 하는데 굴려지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그래. 듣기 좋아서.”

그렇게 선택된 전법은 ‘솔직하게 말한다’였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큰 선물 받은 거처럼 신이 나서.”

그러자 뒤통수를 손으로 쥐어 누른 가슴에 그녀가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숨이 지났다.


“여보.”

아니, 잠깐 얼굴 보고 다시 해줘.

일레온은 황급히 그녀를 놓고 양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놀란 듯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가 그의 눈을 피했다.


“다녀오셨어요. 여보.”

“날 보고 말해야지. 아까처럼.”

“한 번만 더 해달라고 했잖아요. 해줬으니까 됐죠?”

“다시.”

“다녀오셨어요. 여보.”

“침대를 보면서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당장 저쪽으로 가고 싶다 그런 뜻인가?”

“아니에요!”

“하하하.”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너무 귀여워서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그를 얄밉다는 듯 쳐다본 엘리시아가 다시 심호흡하더니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여보. 보고 싶었어요. 여보는 안 보고 싶었어요?”

또 급습을 당한 기분으로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심장께로 손을 가져가 옷을 부여잡았다.


“여보는 너무 장난이 심해요. 여보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요. 여보 못됐어. 흐읍.”

일레온은 오늘 자신을 아홉 번이나 여보라 부른 입술이 기특했다.

자그마한 머리통을 한 손에 쥐고 비스듬하게 입술을 맞대자 그의 어깨를 밀던 손이 천천히 그의 목 뒤에 얹혔다.

아, 거긴 예민한데.

엘리시아가 닿는 모든 곳이 예민했지만 그녀가 제 머리카락이 짧게 자란 자리를 자주 만진 탓에 손을 탄 자리는 특히 더 그랬다.

머리카락을 만졌다가 그녀의 손끝이 빳빳하게 깃을 세운 제복의 스탠딩 카라 안쪽으로 슬그머니 파고드는 느낌이 들자 일레온은 엘리시아에게 그대로 입을 맞춘 채 한 팔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

허공에서 놀란 듯한 몸짓이 황급히 살길을 찾아 그에게 매달리는 걸 느끼며 일레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만 해도 여보 소리에 충격을 받은 듯 아프던 심장이 금방 고통을 잊고 좋다고 날뛰었다.

엘리시아를 사랑하느라 그의 심장은 이랬다저랬다 몹시 바빴다.

소파로 간 그는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엘리시아를 다리 위에 앉혔다.


 


“키스해주세요. 부인.”

“뭐라고요? 지금까지 해놓고 무슨.”

그녀가 어이없다는 투로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일레온이 말했다.


“어서요. 내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시아는 뺨을 붉히더니 그 자리를 벗어날 것처럼 몸을 틀었다.

하지만 소파에 앉은 일레온의 다리 위에 앉아 있다보니 그가 허리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잡은 것만으로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인께서 너무하시군요.”

“부인이라니. 그런…….”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평생 해로할 남편에게 이토록 인색하시다니.”

정식으로 혼인한 귀족의 부부라면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게 보통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레브도 서로 깍듯하게 공대했다. 엘리시아 역시 부모인 질리언과 마리엘라가 보기 좋게 존대하는 걸 일상으로 보아왔을 텐데. 일레온은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 전부 간지럽게만 느껴졌다.


“실망이 커서 입을 맞추어 주셔야 기분이 풀릴 것 같습니다. 부인.”

“그만 해요!”

뺨에 이어 귀와 목덜미까지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인 엘리시아가 손을 뻗어 쿠션을 잡았다.


“쿠션은 무기로든 방패로든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부인.”

일레온은 그것을 가볍게 뺏어서 소파 등 뒤로 던져버렸다.

어쩔 줄 몰라하는 엘리시아를 안고 작고 여린 입술 사이에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질척이는 자잘한 움직임 사이로 그가 맛보길 좋아하는 달큼한 체리블라썸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엘리시아가 ‘여보’라며 도발하지만 않았어도 그리 자각이 들지 않았을 텐데.

이제 그녀는 그의 부인이었다.

엘리시아 클레벤트.

클레벤트 대공비.

레이디 클레벤트의 이름을 가질 한 명뿐인 그의 여자.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져 있던 숨이 겨우 떨어졌을 때 엘리시아는 멍하니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문득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제 표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순진한 그녀의 모습은 그를 더욱 미치게 했다. 그런데도 늘 먼저 무방비하게 손을 뻗고 선을 넘는 건 엘리시아 쪽이었다.


“그런 얼굴 딴 놈한테 보이면 절대 안 돼.”

“얼굴?”

“키스하고 나서 젖은 입술 같은 거.”

엘리시아가 체념한 듯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달리 누구에게 보이겠어요?”

사소한 대답 하나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엘리시아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대공가가 소유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어.”

“알아요. 제국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가 나온 곳이잖아요.”

하듄샤에서도 심심한 신관들이 부지런히 바깥소문을 퍼다 날랐기 때문에 그 정도는 엘리시아도 알았다.


“오늘부터 그 광산은 엘리시아 광산이야. 그대에게 주지.”

엘리시아는 일레온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남부 영지 중에 큰 호수를 끼고 있는 영주성이 하나 있어. 이백 년 전쯤 여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지은 성이라더군. 독특하고 예술적인 느낌이 드는 곳이지. 그 성도 당신 거야.”

“……네?”

“그리고 유테르의 낙원이 가지고 싶으면 대공저에도 똑같이 만들어 줄게. 클레벤트의 낙원이 되겠군.”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입술을 엄지로 슬슬 쓸었다.


“달리 원하는 게 있나?”

“그거 설마 선물이에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기쁘게 해준 부인께 그에 걸맞은 선물을 드려야겠지.”

‘여보’라고 부른 효과는 굉장했다.


“과해요.”

“과하지 않아. 나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했거든.”

그러면서도 난처한 얼굴로 과하다던 때와 달리 엘리시아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일레온은 몸에 힘을 빼고 엘리시아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실은 그대가 슬퍼하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

일레온은 황궁에 머무는 동안 내내 마음이 뜬구름처럼 엉뚱한 곳을 떠돌았다.

레브가, 질리언이 긴히 그에게 중요한 것들을 이야기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식을 고작 사흘 앞두고 쓰러진 황제를 무시하고 성대한 식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개 귀족끼리의 혼사라도 황실의 눈치를 보아야 할 판에 일레온은 마크시스 황제의 단 하나뿐인 조카였다.

조카가 열 한 명쯤 된다면 모를까.

요즘 엘리시아는 그레로사에서 다짐했던 것에 충실했다.

그를 놓지 않겠다고.

일레온 그가 버텨준다면 그만큼 사랑해주겠다고.

엘리시아가 제 옆에서 도망치지 않는 일상은 겨우 삼 주 정도 이어졌을 뿐인데.

공작저로 돌아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질리언이 무어라 몇 가지 물었지만 그답지 않게 나사가 빠진 일레온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이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해졌다.

공작저에서 엘리시아가 어쩌고 있을까?

오직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속상해하면 무어라 위로해야 할까. 내내 마음이 무겁더군.”

“결혼식이 뭐가 중요해요. 난 벌써 엘리시아 클레벤트가 되었잖아요.”

엘리시아의 작은 손이 턱없이 넓은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고마워. 엘리시아.”

일레온은 진심으로 그녀가 대견했다.


“내 옆에 있어줘서. 나를 믿어줘서.”

서로 끌어안은 귓가로 작게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잖아요. 여보.”

기념비적인 열 번째 부름이었다.


“혹시 설산 좋아하나? 북부 영지에 빙벽이 있는 산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을 새겨줄게.”

“어휴. 그만 해요.”

엘리시아가 깔깔 소리를 내서 웃자 일레온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농담 아니라 진담인데.’

내일 당장 베르나르의 일거리를 늘려줄 생각에 벼르며 일레온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리시아는 그를 마주 안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

그녀는 쉽게 불행에 침잠되었다.

그리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레온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운하고 불행한 건 나 하나로 족하니까.’

아니면 마리엘라가 한 말을 믿고 싶었다.

어쩌면 일레온이 그녀를, 가시밭길 같은 여정을 선택한 데에서부터 엘리시아 자신은 그리 재수 없는 여자는 아닐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단단히 결심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일 수 없다면,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일레온이 괴로워할 거라면 차라리 연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행동하고 믿다 보면 정말로 일레온이 바라는 미래가 그들에게 다가올 것만 같아서.


‘일레온. 나 힘낼게요.’

이미 갈림길을 지나왔는데 여기서 그를 버려두고 혼자 도망갈 순 없었다.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도 해 볼게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

주인이 자리를 비운 클레벤트 대공저는 의외로 활기찼다.

누군가는 그것을 활기라 여기고 누군가는 전운이라 여길 일이었지만.


“도대체 이런 걸 아무 데나 벌여두는 겁니까?”

베르나르의 힐난에 이리스가 못마땅한 태도로 팔짱을 끼었다.


“아무 데나라뇨? 직사광선을 이용해서 독을 분해 시키는 거예요.”

“저번에도 이러다가 물건이 없어졌다고 난리더니.”

서로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한쪽은 클레벤트 가의 가주, 일레온의 충신 집사 베르나르였고.


“집사님.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일레온 님과 엘리시아 님이 계실 때랑 아닐 때랑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요?”

다른 한쪽은 하듄샤의 신관, 마리엘라와 엘리시아의 심복 이리스였다.

엘리시아가 공작저에서 지내기로 한 시간은 겨우 이 주 정도였다.

하지만 일레온이 대공저에 이리스가 약을 연구할 재료와 시설을 갖추어 주었기에 그녀는 공작저로 따라가지 않고 쭉 저택에 머물렀다.


“너무하다니. 그런 말이 나옵니까? 대공 전하와 마님께서 자리를 비우시자마자 사방에 위험한 것들을 널어놓고 다니는데 내가 너무 한 겁니까?”

실제로 이리스가 둔 무언가가 폭발하는 바람에 손님방 하나가 망가진 상태였다.


“그건 해독제를 연구하느라.”

“해독제라니. 햇빛이 닿으면 터질 걸 누구한테 먹이려고.”

“그게 집사님이 아닌 건 확실하네요.”

“그럼 다행이고.”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렸다.

이리스가 불만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손부채를 부치며 중얼거렸다.


“클레벤트 대공가의 손님 대접이 겨우 이런 수준이라니.”

베르나르의 자존심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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