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144/151)
144.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144/151)
144.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2023.05.20.
“클레벤트 대공가의 손님 대접이 겨우 이런 수준이라니.”
이리스의 말에 베르나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하듄샤는 제국의 유일한 성소였다.
태초에 대륙은 혼란과 악에 잠식당해 있었다.
그것을 다른 세계에서 온 다섯 명의 용사와 오데르가 물리치고 사후에 신이 되어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된 것이다.
그중에 신좌에 오른 초대 황제 오데르는 대대로 신의 후계라는 증거가 혈통으로 발현하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오데르’였다.
베르나르는 일레온에게 한없이 충성하는 자였고, 로나와 순독으로 감히 황태자를 욕할 만큼 제 주인에게 진심이었다.
어째서 내 주인께서 일레온 오데르 콘스탄스가 아닌 것인가!
그랬다면 요즘 더더욱 호부견자라 소문이 자자한 사비엘의 더러운 꼴 따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베르나르도 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이전까지는 주신과 오데르에 기도를 올릴 때도 있었다.
하듄샤의 감추어진 비밀, 예언서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뭔가 내적으로 신에 대한 경외감이 와장창 깨어진 기분이었다.
거기에 불난 데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그의 환상을 깨부수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가 바로 이리스였다.
“하듄샤의 신관이라고 뭐 별거 없군요.”
“뭐라고요?”
“신성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으니 하듄샤의 교육이 의심스럽군요.”
게다가 하는 짓은 마님이 될 엘리시아의 스토커 같았다.
그렇게 이리스에게 불만을 제대로 표출했다고 약간 우쭐한 기분이 들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신관답지 않다면 뭐 집사님은 무능함의 대명사 아닌가요?”
“뭐요? 무능? 무느응?”
베르나르는 무능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유능함은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주 일레온이 거액의 봉급으로 챙겨주고 있었다.
그가 흥분하자 이리스가 그를 비웃었다.
“찔리는 데가 있으신가 보죠?”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이리스 양이 나에 대해 뭘 압니까? 대공 전하께서 눈이 먼 동안에도 가산을 탕진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낼 수 있는 집사가 제국에 하나라도 더 있는 줄 아시오!”
흥분한 그의 말을 이리스는 건성으로 흘려넘기며 코웃음 쳤다.
“그리 유능하신 분이 계신데도 두 분 주인께서 아직 손만 잡고 자는 사이 아닌가요?”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베르나르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 그건 전하께서 워낙 예법에 엄격하셔서.”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으니 결혼식은 취소되겠지요. 결혼식이 날아갔는데. 진작 두 분이 사고만 치셨어도 이런 불안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이리스가 말하자 베르나르가 발끈했다.
“그게 왜 내 탓입니까?”
“마땅히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서 화끈하게 분위기를 잡았어야죠!”
“이리스 양은 정말…… 수치를 모르는 분이군요?”
베르나르는 은근 순정남이었다.
너무 일에 매진하는 주인을 만난 탓에 바빠서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수도에 집을 세 채나 가졌고 은행 계좌에 돈은 나날이 불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알곡 같은 자산을 노리는 대신 베르나르 자신의 매력을 알아봐 줄 운명 같은 여인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 선을 마다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그런 베르나르에게 이리스는 정말 재앙 같은 여자였다.
“신관이 맞긴 한 겁니까? 하듄샤에서 지내다 온 게 맞습니까?”
“거기 신관들이 다들 진짜 신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새삼스레 그런 걸 묻는대요?”
그녀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베르나르는 위층 손님방에 머물고 있는 로벤과 에쇼를 떠올려보았다.
로벤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신관 그 자체였고 에쇼는 말투는 상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머리 뒤에 떠 있는 빛무리만은 신성했다.
하지만 이리스는 아름다운 꽃밭에 잘못 돋아난 잡초같이 이질적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노예 경매에서 구출하셨다던가.’
노예였다니 어릴 때 교육을 단단히 잘못 받은 게 틀림없었다.
“주인 나리의 사생활을 이렇게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글쎄요. 과연 일레온 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이리스는 베르나르의 손에 들려있던 약재를 뺏어 들고 입술을 삐죽이며 방 안으로 사라졌다.
“아아악!”
베르나르는 복도에서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비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쳤다.
저 여자가 정말 싫다.
이리스가 대공저에 본격적으로 머무른 후부터 너무나도 스트레스였다.
‘설마 엘리시아 님께서 정식으로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신다면 저 여자도 여기서 살게 되나?’
이제까지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얘기만 나오면 번견 같이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드는 이리스와 대공저 안에 방을 세 개나 내어주며 약을 만들 공간을 마련해준 일레온의 행보가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주인님께서 오늘은 오실는지.’
일레온은 매일 공작저 주변을 맴돌았다.
간간이 그의 말을 전하러 온 세드릭에게 듣자니 공작저를 엿보는 놈들도 죄 잡아들였다던가.
어쨌든 대공저에서 쭉 지내셨다면 좋았을 텐데 엘리시아의 뜻에 따라 공작저에서 지내도 좋다 해놓고 은근슬쩍 그 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일레온을 베르나르는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먼동이 터올 시각.
일레온이 짧게 귀가했다.
“씻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공작저로 가겠다.”
베르나르는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가 일레온에게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님의 시중을 들 고용인을 늘리려 합니다.”
이리스가 빙의자가 아닌데도 하듄샤에 든 것이 엘리시아를 보살피기 위함이랬던가?
그녀의 자리를 뺏어주면 될 일이다. 이리스의 빈 자리 따위 느낄 수도 없게 고등 교육을 받은 수도의 영양들로 마님의 곁을 꽉꽉 채워 줄 심산이었다.
“공작 부부께서는 사교활동을 즐기시지 않지만 대공비가 사교계에서 멀리 떨어지기는 힘들 겁니다. 마님께 여러모로 도움이 될만한 이들을 추려보았습니다.”
이리스같이 저속하고 뻔뻔한 여자는 빼고.
“흠. 신경을 써주었군. 수고했다. 엘리시아와 함께 이야기 나눠보지.”
일레온이 선선히 그것을 받아들자 베르나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았나? 이리스 양. 이것이 최고의 집사, 나의 클래스다.
제 권유가 받아들여지자 기고만장해진 베르나르가 슬그머니 일레온에게 이리스와 했던 이야기를 흘렸다.
“글쎄 젊은 처자가 수치도 모르고 주인님의 사생활에 입을 대지 뭡니까. 참나. 신관 출신이었다는 이가 하는 말이 참.”
어찌 엘리시아 님은 그런 여자를 가까이하시는지. 라는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이리스가? 그녀가 그리 말하던가?”
“네? 예. 주인님.”
“흐흠.”
일레온이 뭔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방금 받아든 종이 뭉치를 베르나르에게 돌려주었다.
“시녀는 됐다. 엘리시아의 시중은 이리스 양으로 충분하겠군.”
“……예? 주인님?”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일레온이 키를 낮춰 눈을 맞추었다.
“이제부터 전폭적으로 이리스 양이 하자는 대로 하게. 알겠나?”
“……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이리스 양이 엘리시아의 시중을 드는 데 모자람이 없게 따로 교육에 신경 써주게. 그거면 되겠군.”
네? 주인님?
베르나르는 고장이 나고 말았다.
***
긴 하루였다.
세라피나는 하도 눈물을 흘려 쓰린 눈두덩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두고 누워 있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들라 해라.”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으며 그녀는 제 아들을 반겼다.
“황태자께서 이 늦은 시간에 발걸음을 하셨군요.”
반색하며 사비엘을 맞이하는 세라피나의 얼굴에는 아까까지 황제의 일로 슬픔에 빠졌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사비엘이 소파에 느른하게 기대어 앉으며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앞으로의 일을 여쭈고자 왔습니다. 이야기를 미리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비엘은 늘 기가 죽은 아이였다.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긴 아들을 볼 때마다 세라피나는 속이 터졌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 않나?
곧 황위를 잇게 될 상황이 되자 이제까지와 달리 한층 고고해진 사비엘의 기세가 세라피나의 마음을 퍽 기쁘게 했다.
“그럼요. 마침 잘 왔습니다.”
안 그래도 사비엘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엘리시아가 기어코 클레벤트 대공비가 되었다는 걸 알려야 했다.
아까 질리언과 이야기를 나눌 때 세라피나 황후는 모욕감이 드는 걸 참았다.
그렇게 황가에서 황태자비로 엘리시아를 원하노라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도 칙서 같은 걸 들이밀며 도둑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사비엘을 거절하냔 말이다.
그간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 에둘러 거절하는 말이 적혀왔을 때도 속이 터지고 안달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면전에서 딸이 유부녀가 되었으니 황태자비 감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굴욕적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다시 일어나시는 일은 없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데르는 건강하게 지내시다 저리 갑자기 돌아가시기도 한다는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간 병환 하나 없으시더니 쓰러지셔서 이 사람도 크게 놀랐지 뭡니까.”
세라피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마크시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고, 적법한 신좌의 자격을 갖춘 게 아니라면 사비엘의 자리가 흔들린다.
제국사에 여자 오데르가 태어난 일은 없었다.
오데르의 방계에서 오데르가 태어나는 일도 없었다. 오데르의 핏줄 아래에서만 직계로 다음 대의 오데르가 태어났다.
한 대에 한 명.
어째서 이번 대에만 제 남편과 시누이 둘이 오데르로 존재하는 것일까 의아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사내로 태어났어야 할 레브가 여자로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제 남편에게 갔어야 할 힘이 잘못 누이에게 갔다든지.
어느 쪽이든 신의 농간임이 틀림없었다.
마크시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면 모든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부터 그는 콘스탄스 제국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던 셈이니까.
그의 자식이라 푸른 눈동자로도 오데르라는 미들네임을 얻고야 만 사비엘은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될 터였다.
지금도 붉은 눈동자를 가진, 일레온을 양자로 들여 황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구귀족들이 시끄럽게 구는 마당에 절대로 책잡힐 수는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나만 아는 비밀로.’
나중에 남편을 해독약으로 깨워 그가 정신을 차리더라도 사비엘이 황위에 오른 후라면 자식을 끌어내리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고 마크시스 황제가 눈을 뜨기 전에 차선책을 봉해버릴 생각이었다.
‘일레온만 사라진다면.’
사비엘을 폐하고 일레온에게 황위를 잇자고 주장하는 귀족 놈들이 뭘 어쩔 것인가? 일레온이 없다면 결국 선택지는 사비엘 뿐이 될 것을.
“오늘 유테르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여러 조언을 들었지요. 섣불리 섭정하겠다 하지 않는 게 좋다 하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귀족들의 지지가 무엇보다 중하니 말입니다. 시일이 흘러 자연스럽게 그들이 황태자께서 보위에 올라 주십사 청할 때까지 황제의 병환을 염려하며 자중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비엘의 눈을 본 세라피나 황후는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이었다.
“엘리시아 유테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