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 일레온을 구하고 싶어요 (145/151)


145. 일레온을 구하고 싶어요
2023.05.24.



 


“엘리시아 유테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건…….”

사비엘이 싸늘하고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 아닙니까?”

“그랬지요.”

엘리시아를 황태자비로 삼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려 할 참인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세라피나는 목에 큼직한 돌이라도 잘못 삼켜 걸린 느낌이 들었다.


“실은 일전에 말입니다. 대공이 회복하고 처음 황제께 인사를 드리러 온 날 폐하께서 써주신 칙서가 있답니다.”

“칙서요?”

세라피나는 입술이 말랐다.


“7년 전쟁의 전공을 치하해야 하는데 대공이 이년 반이나 칩거하였으니 복속시킨 땅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준 지 오래잖습니까.”

“그래서요?”

“황제 폐하께서도 난처한 상황이셨는데 대공이 그것을 마다하고 칙서를 하나 써달라지 뭡니까.”

사비엘에게 엘리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자꾸만 변명조로 말이 나왔다. 이게 세라피나 그녀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결혼을 승인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가 바라는 이를 대공비로 맞이하는데 조건 없이 허락한다고 말이에요.”

“뭐라고요?”

“그래서 엘리시아가 이제 유테르 가의 사람이 아니라는군요.”

“유테르 가의 사람이 아니라니.”

사비엘이 험악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클레벤트 대공비가 되었다는군요.”

빠직.

그 순간 사비엘이 앉아 있던 의자의 나무 손잡이가 그의 손 안에서 부서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태자!”

세라피나가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피가. 피가 나지 않습니까! 여봐라! 게 없느냐!”

“시끄럽습니다.”

“뭐, 뭐라고요?”

“시끄럽다 하였습니다.”

사비엘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허공에 털었다.


“별것 아닌 일로 소란을 피우십니까. 그보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보십시오.”

낯선 아들의 말투에 세라피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소란을 피우냐니. 어미에게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황태자.”

“황제.”

사비엘이 냉정한 투로 정정해주었다.


“곧 제가 황제가 될 것 아닙니까. 황제 폐하께서 소생하실 가능성이 없다니 더더욱이요. 제게 예의를 갖추십시오. 황후 폐하.”

세라피나가 기함하며 입을 벌린 사이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곧 태황후가 되실 분이 품위 있게 행동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득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내 아들의 가죽을 쓰고 알맹이가 영 모르겠는 무언가로 바뀌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세라피나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릴 때였다.


“그래서 엘리시아를 황후로 맞이하려면 어째야겠습니까?”

“어쩌다니. 황태자. 그건 너무 무리예요. 게다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인을 황후로 맞이하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왜 안 됩니까? 제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아니면 싫다고, 그녀라면 결혼도 하겠다 말이지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비엘을 보며 세라피나 황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쳤다.


“이미 클레벤트 가의 사람이 되었다지 않습니까. 대공이 엘리시아와 이혼을 할 리도 없고.”

“대공을 없앨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사비엘의 목소리는 평온해서 더욱 음산했다.


“그, 그걸.”

“제 자리를 위협할지 모를 화근을 없애려 하신 게 아닙니까.”

“화, 황태자.”

세라피나는 어느새 몸을 떨고 있었다.


“황후 폐하. 어머니께서는 자식을 위해 어디까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까?”

아들이 낯선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어딘가 잔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대로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 그러도록 하지요.”

그제야 사비엘이 소파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황제란 자고로 무소불위의 권력 아닙니까. 게다가 신이 축복하는 오데르의 이름을 잇는 황제인데.”

사비엘이 피가 흐르는 손으로 너덜너덜해진 의자의 손잡이를 톡톡 건드렸다.


“원하는 여인 하나 뺏지 못해 어디 황제라 하겠습니까. 감히 격에 맞지 않는 것을 탐낸 이를 벌하는 것이 순리겠지요.”

그는 진심이었다.

그 광경을 어디선가 날아온 까만 새 한 마리가 높은 들보에 앉아 지켜보다 천장 근처를 휘 한바퀴 돌더니 황후궁의 밖으로 날아갔다.

***

콘스탄스 에비뇽에 돌아온 후, 카리나는 해링턴 백작가로 돌아갔다.

카리나가 그간 겪은 일들을 이리저리 적당히 다듬고 덮어 레브가 그녀가 그간 자신의 보호 아래 대공저에서 지냈다고 손을 써주었기 때문이다.

“어쩜. 황녀 전하는 같은 여자지만 어쩜 그렇게 근사하실까.”

소드마스터라 어딘가 여기사와 같은 활기를 뿜어내는 레브와 달리 중년 여인인 해링턴 백작부인은 나잇살이 슬슬 늘어가는 동글동글한 외모였다.

카리나와 일행이 그레로사로 향하는 동안 따로 레브가 해링턴 백작부인을 데리고 황제를 알현했다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백작부인은 레브 황녀의 친위대로 거듭난 상태였다.


“이번에 모처럼 뵐 기회가 있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시무룩한 이유는 바로 클레벤트 대공과 유테르 영애의 결혼식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귀족들 중에 그 결혼식의 초대장을 받지 못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는 저택 문을 걸어 잠그고 사교계에서 멀어져 두문불출하던 유테르 공작가의 소문난 명소. 유테르의 낙원이었다.

오죽 아름다워 낙원이라 칭하는 정원에서 열리는 성대한 야외 결혼식과 가든 파티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흥분하는 이들이 천지였다.

지난 한 달간 갑작스레 날아온 결혼식 초대에 귀족들이 바쁘게 드레스며 정장을 맞추고 제복을 수선하는 통에 수도의 의상실들이 행복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병환으로 있던 무도회가 없던 일이 되니 당장 마크시스 황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지보다 결혼식이 언제로 미뤄졌는지를 궁금해하는 이가 많을 정도였다.


“여름 드레스를 맞추어 두었는데. 혹 가을께로 식이 미뤄지면 어쩌지?”

그들 중 하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해링턴 백작부인이었다.

카리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양어머니를 위로했다.


“너무 심려치 마셔요. 레브 전하께서는 섬세한 분이시니 조만간 티파티에라도 초대를 하시겠지요.”

아마 미뤄진 결혼식에 대해 무겁지 않게 언급하고 실망한 손님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유테르의 낙원에서 조촐한, 하지만 참가 인원으로 볼 때 절대 조촐할 수 없는 모임이 열릴 거로 추측했다.


“그럴까? 혹시 레브 전하께서 나를 부르시지 않는다면 어쩌겠니.”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기도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날 레브 전하께서는 승마복을 입고 계셨는데 어쩜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리 젊고 아름다우신지. 분명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나만 나이가 들고 말았구나.”

“정 아쉬우시면 저와 함께 가세요. 제가 뵙길 청하면 황녀 전하께서 만나주실 테니.”

카리나의 말에 해링턴 백작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럴까? 그러고 보니 다친 널 구해주셨는데 따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구나. 한 달을 보살펴주셨거늘.”

“결혼식이 취소되어 바쁘시겠지요. 천천히 찾아뵐 기회를 기다려보겠어요.”

“그러렴. 꼭 나와 함께 가야지.”

눈을 한껏 휘며 기쁜 듯이 웃은 백작부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늦었다니. 약을 먹을 시간이 되었구나. 카리나.”

백작부인이 시녀를 부르자 곧 카리나의 앞에 예쁘고 자그마한 잔이 놓였다.


“쓰지만 건강에 좋다니 어쩔 수 없지. 어서 마시렴.”

“네.”

카리나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녀가 쓰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자 백작부인이 손수건으로 직접 입술에 남은 약을 찍어주더니 입에 동그랗고 작은 사탕까지 넣어주었다.

마치 무척 아끼고 귀애하는 어린 딸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제 방에 돌아가서 저녁 시간까지 쉬렴. 백작께서도 영지에서 오늘 돌아오신다 하니. 저녁은 모처럼 가족이 함께 들겠구나.”

“네. 어머니. 저녁 시간에 뵐게요.”

아름다운 카리나가 돌아온 저택에는 온기가 흘렀다.

백작 부부는 늦게 생긴 양딸을 굉장히 애정했다.

친부모도 저러지 못할 것 같다 여길 정도로 과보호 중이었다.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르고 소녀티를 벗은 아가씨가 낯선 수도에서 나들이 중에 사고로 한참을 저택에 돌아오지 못하고 황녀의 보호 아래 정양해야 할 정도였다니.

저택의 사용인들은 주인 부부의 변화에 그러려니 했다.

하얀 피부에 눈부신 은발 머리카락.

선명하고 또렷한 초록빛의 커다란 눈동자.

붉은 꽃잎을 가져다 누른 듯 곱고 예쁜 입술.

카리나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런 아가씨를 함께 보시는 사용인들은 서로 그녀의 시중을 들려 애썼다.

친절하고 상냥한 아가씨는 그들에게 늘 곱게 미소를 지어주었기에 점점 카리나에게 잘하려는 이들이 늘어만 갔다.

저택 전체가 따스한 온기로 휘감긴 듯 했다.

방문을 닫자마자 카리나는 온도가 뚝 떨어진 듯 차가운 눈빛으로 변했다.


“멍청이들.”

그녀를 둘러싼 행복은 가짜였다.

카리나가 살았어야 할 진짜 행복은 따로 있었다.

하듄샤에서 비밀리에 감춰온 예언서에 적힌 채 말이다.


“결혼식이 취소되어서 아쉽다고?”

백작부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우스워서 혼났다. 그녀는 엘리시아와 일레온의 결혼식이 올려지지 않은 진짜 이유를 알았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레온과 결혼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카리나 그녀였다.

그래서 결국 그 결혼식이 망쳐진 것이다.

클레벤트 대공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야 할 신부 자리를 엉뚱한 이가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윽.

구석진 곳에 놓인 덩치 큰 책장의 그림자로부터 늘어난 일부가 곧 사람의 형상이 되어 빠져나왔다.


“소나텍.”

카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네요. 수도에 돌아오고 나서 처음 뵙는 것이니.”

그레로사에서 비참하게 잡혀 있을 때, 소나텍은 카리나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암시’에 걸렸다고 말하면 모두가 믿을 거라고 말이다.

놀랍게도 대신관인 알레한드로 역시 같은 말을 했기에 신관들은 알레한드로와 카리나가 강제로 소나텍에 의해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백작과 백작부인 둘 다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그대가 바라는 대로 손을 써두었지요. 카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소나텍의 말이 심금을 울렸다.

해링텅 백작 부부는 카리나가 사비엘의 아이를 가졌던 일을 모두 잊은 상태였다.

대신 카리나를 무척 사랑하여 먼 친척 드레페인 남작 부부가 죽자마자 입양하여 키운 것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연극 배우가 연기를 하듯, 기억도 마음도 암시를 걸어 조작할 수 있다니.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소나텍이 부리는 까만 새를 찾아 눈을 굴렸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의 곁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짜였다.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조작된 가짜일 것이다.

카리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진심인 사람은 저인데 남의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 같은 여자가 그의 손을 잡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대로 그가 인생을 망치게 둘 순 없었다.

카리나는 결연한 눈빛으로 소나텍을 보았다.


“일레온을 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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