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 내일 밤이면 알게 될 거야 (146/151)


146. 내일 밤이면 알게 될 거야
2023.05.27.



 


“일레온을 구하고 싶어요.”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이 카리나 제게 있었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불행하게 할 테니까.”

수천 년이나 이어진 예언서의 내용이 그리 멋대로 하고 안 하고를 정할 수 있는 거라면 이제까지 무엇 하러 비밀을 지켰단 말인가.

거스를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일 텐데.

혹여 흘러가야 할 일이 뒤틀리는 걸 막기 위해 이리저리 소문이 나 퍼지는 걸 막으려 그리 애써놓고 실은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신의 뜻을 왜곡한 것이리라.


“진심입니까?”

소나텍이 지그시 카리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이군요.”

“당연하잖아요. 당신은 내게 엘리시아를 없애야 한다고 했어요.”

카리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엘리시아의 죽음이 예견된 예언서를 직접 보았지요. 그녀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가 내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려고 하기에 일레온이 운명을 벗어나고 있다고 말이죠.”

태어나서 나쁜 짓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드레페인 남작 부부는 형편이 어려웠을망정 카리나의 교육에는 엄격했다.

평민이나 차이 없을 정도로 간소하게 먹고 입고, 변두리 시골 영지의 일상이 촌부의 것과 구별이 불가할 정도로 몰락했으면서도 귀족의 자존심만은 남아 있었다.

하루 내내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카리나도 부모님 앞에서 식사하거나 차를 마실 때만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워야 했다.

성장기에 호기심으로 한 번쯤 일탈할 법한 도둑질이나 거짓말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자란 그녀가 엘리시아를 죽이려는 결심을 하기가 쉬울 리 없다.

병아리 한 마리 잡아 본 적 없는 손으로 말이다.

하듄샤에 감춰진 예언서를 직접 한 장 한 장 넘기며 확인한 경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누군가의 간언도 풍문을 타고 들려온 소문도 아닌, 두 눈으로 책에 쓰인 것을 읽었다.

긴 제국사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일레온 클레벤트.

그 아름답고 우월하고 근사한 남자가 제게 무어라 고백했는지.

카리나 그녀가 그와 어떻게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너무 환상적이고 멋진 카리나의 미래는 예언서에 활자로만 남아 있었다.

현실에서는 빼앗겨버린 이야기.

엘리시아는 카리나의 운명을 강탈했고 그것은 명백한 반칙이고 위반이었다.

예언서를 읽고 난 후부터 마치 손안에 쥐어졌던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눈앞에서 빼앗긴 것 같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나텍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카리나 자신이 하려는 일이 엘리시아를 죽이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둑을 벌하고 빼앗긴 제 몫을 응당 되찾으려 하는 것일 뿐. 누구라도 기회가 있다면 당연히 할 일이다.

엘리시아가 차지한 자리가 본래 제 것이라고 자각하자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수반되는 모든 것들에서 부도덕한 일을 행한다는 자책이 사라졌다.


“방법을 알려줘요. 당신과 나의 이익이 아직 한 길 위에 있다면.”

“변했군요. 말이 통하니 이제야 진심으로 카리나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변하지 않았어요.”

카리나는 정색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예언서에 적힌 무엇도 변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제 머리카락 한 올일지라도.


“일레온과 엘리시아의 결혼식부터 확실하게 끝내야겠지요.”

“물론입니다.”

선선히 대답하는 사내의 머리 위로 뒤늦게 날아온 검은 새가 천천히 허공을 돌다 어깨에 내려앉았다.

***

늦은 시각.

편한 옷차림 위로 가운을 겹쳐 입은 질리언과 마리엘라는 당혹한 표정으로 일레온을 보았다.


“내일 엘리시아와 함께 대공저로 돌아가겠습니다.”

“내일요?”

일레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언제까지 공작저에 머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엘리시아는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놓인 손만 쳐다보았다.

차마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다.


‘부끄러워서 정말.’

그랬다. 일레온은 식이 취소되어 어수선한 신부의 부모, 장인, 장모 될 어른을 야밤에 불러내 당당하게 귀가 예정을 알릴 수 있는 뻔뻔함과 행동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요?」

 
혼이 쏙 빠질 것 같은 입맞춤을 한참 나눈 후라 엘리시아는 몽롱한 기분에 느리게 반응했다.


「도대체 첫날 밤을 언제 해야 할지 모르겠군.」

「뭐, 뭐라고요?」

「원래는 결혼식을 올린 그 날 밤이 아닌가.」

 
그러니까 일레온이 말하는 중요한 일이란 언제 진정한 부부가 되느냐인데.

그들의 상황이 무척 애매해진 것이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신방이 차려질 침실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놓인 징검다릿돌 같은 결혼식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일레온이 황제로부터 받아 둔 칙서가 있어서 합법적으로 부부 사이라지만 예식이 괜한 식인가?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스스로도 한 남자의 아내가, 또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 의식을 거쳐야 부부가 되었다는 실감이 날 터인데.


「그대 생각이 궁금하군. 엘리시아.」

「아, 아무것도.」

 
당황해서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일레온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우리 부부 사이에 아주 중요한 일인데.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건가?」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기보다는 아예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일레온은 벌떡 일어나더니 시종을 불러 한밤중에 공작 부부를 뵙길 청했다.

그 옆에서 너무나도 저돌적인 일레온의 기세에 눌려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따라온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좀 더 여기서 지내는 건…….”

마리엘라가 아쉬운 듯 묻자 일레온이 단호한 투로 말했다.


“시일을 지체한다 하여 결혼식을 예정대로 진행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클레벤트 대공비를 기약도 없이 공작저에 머물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레온이 일부러 ‘클레벤트 대공비’에 힘주어 말하는 걸 듣고 엘리시아는 그에게 살짝 눈을 흘기려다 참았다.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라니까.’

꼭 그렇게 마리엘라가 꼼짝도 못 할 말을 골라야 하냔 말이다.

엘리시아는 또 한 번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게 좋겠군.”

의외로 결론을 내린 건 질리언이었다.


“대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릅시다.”

“당신…….”

마리엘라가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남편을 보았다.


“오늘 황후 폐하를 뵙고 나니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드는군. 기량이 좋고 재기가 넘치는 황태자비 후보가 없지 않은데. 몇 번을 거절해도 포기하지 않으신 듯 보이니.”

질리언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께서는 대리청정을 하시게 될 것 같소.”

“대리청정이요? 아직 황제께서 쓰러지신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후 폐하의 고집이 사비엘 전하의 의중을 반영한 거라면 엘리시아가 공작저에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책 잡힐 변수가 될지도 모르지.”

질리언의 말을 일레온이 받았다.


“그렇습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황제 폐하의 칙서에 하명해도 저희가 부부라는 사실이 공표되지 않은 것처럼 느낄 테지요.”

허례허식이어도 결혼식을 과히 성대하게 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재력과 권세를 과시하며 두 가문이 혼맥을 잇게 되었노라 널리 알리는 것.

서류 한 장으로 법적 부부가 되었어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누군가의 인지와 인정으로 그 자리가 안정되는 법이었다.


“괜한 트집 잡힐 거리를 주지 않는 게 좋겠지. 대공께서 하신 말씀이 옳아. 대공비를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소.”

혼인을 하고도 핑계를 대며 딸을 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자체로 혼사에 불만이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식을 올리고도 신부를 데려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지참금이나 다른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어쨌든 어느 모로 봐도 엘리시아가 유테르 공작저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기에 결국 마리엘라도 아쉬움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간단하게 정원에서 연회라도 열겠어요.”

“연회?”

질리언이 묻자 마리엘라가 동의를 구하듯 일레온을 보았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이렇게 딸을 보내려니 서운하고 답답해서요. 함께 정식으로 식사라도 하고 오후에 출발하면 어떨까 해요.”

그러자 일레온의 눈가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가 이내 수긍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마리엘라가 얼굴을 폈다.

그런 부모님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며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살짝 흘겨보았다.


“왜 그렇게 봐?”

“당신은 은근히 못됐어요.”

“어째서?”

엘리시아에게 되물으며 일레온은 이미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클레벤트 대공비라고. 엄마가 서운해하시잖아요.”

“그러면 공작부인께서도 못된 사람 축에 드는 건가?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딸을 보내려니 서운하다고 강조하시지 않나.”

“부모 심정이란 게 다 그렇죠.”

“그대는 참 너그러워. 내게만 속이 좁단 말이지.”

일레온이 들으란 듯 중얼거린 말에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마음도 좀 이해해 달란 말이야.”

“딱히 뭘 이해해주지 않았다거나 그런 건.”

“이거 봐. 이렇게 내가 서운한 건 일상이다 그런 건가?”

“알아듣게 말해봐요. 뭐가 서운한데요?”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물어보죠.”

그가 손을 뻗어 엘리시아의 양쪽 팔뚝을 잡았다.


 
그녀는 저절로 차렷 자세가 되었고 일레온은 마치 철없는 신병을 대하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내일. 내일 밤에는 참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엘리시아는 등허리 아래쪽에 무언가 저릿하게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마주친 일레온의 눈동자는 늘 보아왔던 아름다운 적안인데, 오늘따라 무언가 진득한 집착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아서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당신은 참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단추를 세 개쯤 풀면 쇄골 아래로 일레온이 키스하며 남긴 입술 자국이 두 개나 찍혀있었다.


“내일 밤이면 알게 될 거야. 그동안 그대를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

“정말…….”

엘리시아는 뺨을 붉힌 채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엘리시아.”

“따라오지 말아요.”

모두 잠들어 고요한 공작저의 복도에 두 사람의 성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면 안 될 것 같은데.

일레온이 당당하게 구는 만큼 엘리시아는 더 부끄러웠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는 그녀를 놀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치고 서로 끌어안고 입술을, 숨을 나누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저렇게 대놓고 욕망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내가 부끄러워하니까 일부러 더 저러는 거 같기도 한데.’

참은 적도 봐준 적도 없는 것 같은 그가 선전포고하듯이 한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마주 보고 눈을 마주치며 들은 말인데도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시아.”

“오지 말라고요.”

어느새 둘은 불빛이 흐릿한 공작저의 복도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반쯤 뛰었다.

그러나 몸 쓰는 일로 일레온을 자극해봤자 이길 방법이 있을까.

엘리시아는 얼마 가지 못해 그에게 붙잡혀 끌어안겼다.


“그대도 기대해주면 안 되나? 내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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