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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붉은 렌즈 (147/151)


147. 붉은 렌즈
2023.05.31.



“그대도 기대해주면 안 되나? 내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대한다는 말이 그가 내쉬는 숨을 타고 이마에 닿았다.

평소와 별 차이 없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남자가 입술과 제 등을 감싼 손은 놀랄 만큼 뜨거워서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응? 엘리시아.”

그가 조르듯이 말하자 엘리시아는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쿵. 쿵.

심장이, 턱 아래에서 맥이 뛰는 감각이 느껴지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왜 내가 기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꺼내자마자 도망가니까.”

“당신이 쫓아오니까 그렇죠.”

“도망 안 가면 안 쫓아가.”

엘리시아는 뛰느라 급해진 호흡을 정돈하려 했다.

일레온이 지척에서 자신을 응시하자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느라 오르내리는 가슴이 신경 쓰여 반쯤 숨을 참았다.

살짝 올려다보자 일레온은 끈기 있게 무언가 자신이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일레온이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빨리 카리나가 나타나서 그의 눈을 뜨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가 막막하고 끝없다 느끼는 절망이 실은 곧 끝날 예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선택받은 이에게 약속된 밝은 빛 속을 걸어가길 지켜보겠다고.

그랬으면서 그가 바라는 말해주는 게 뭐 어렵다고 이렇게 몸을 꼬며 말싸움을 하고 있는지.

엘리시아는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 일레온의 손을 잡았지만 엘리시아는 제 마음 구석에 남아 있는 미지의 어둠을 알았다.

마리엘라의 딸로 태어나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원죄와도 같은 그것.

누군가에게 말한들 온전히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엘리시아가 느끼는 숨 막히는 버거움을 알 수는 없을 터였다.

때때로 일레온의 곁에서 안도하고 미소지으면서도 호시탐탐 그녀를 잿빛 우울로 처박을 기회만 노리며 웅크리고 있는 음습한 감정 때문에 힘겨우면서도, 이렇게 저를 향한 열기 어린 그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온갖 시름이 잊혀졌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근본에 새겨진 것처럼 하나의 감정만이 남았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작게 말하자 일레온이 감격한 듯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벌써 행복해.”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기대하는 내일이 부디 오늘 상상한 것처럼 행복했으면.

엘리시아는 간절히 바랐다.

장난치며 뛰다시피 온 긴 복도를 둘은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어 되돌아갔다.


“내일이면 여길 떠나네요.”

“아쉽나?”

실은 아주 어릴 때 살고 내내 하듄샤에 머물렀던 터라 엘리시아에게는 내부도 생경했다.


“아니요. 기억에도 없는 곳들인걸요.”

질리언의 책들이 가득한 서재나 마리엘라의 침실 같은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다. 복도나 제 방 같은 곳은 분명 오가며 머물렀을 텐데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대돼서요. 정식으로 대공저에 머물 자격이 생긴 거니까.”

신분증명도 없이 고용된 메이드 로나, 기억상실인 채 혼란에 빠져 엄마도 못 알아보고 가출한 엘리시아가 아니라.

기대된다는 말을 넌지시 흘리자 일레온이 뭔가 기세등등해지는 걸 느껴서 엘리시아는 작게 웃었다.


“왜 웃지?”

“당신이 신난 것처럼 보였어요.”

“옳게 보았군.”

기꺼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는 작은 다짐을 전했다.


“좋은 아내가 될게요.”

“좋은 아내씩이나? 그저 내 아내가 되어주는 거로 충분해.”

“그럼 좋은 대공비가 될게요.”

“정정하지. 좋은 아내랑 좋은 대공비 중에 골라야 한다면 좋은 아내 쪽이 낫겠군.”

가벼운 농담을 소곤거리며 엘리시아의 침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밤의 적막을 깨고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일레온이 귀를 세웠다.


“글쎄요.”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이런 시간에 일어난 소란이 좋은 일일 리 없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황녀 전하. 곧 주인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과연 유서 깊은 공작가의 집사였다.

이렇게나 늦은 시간 불시에 들이닥친 황족을 보고도 침착하게 예의를 갖춰 안내하다니!


“잠깐. 유테르 공작이 아니라 공작부인을 잠시 뵐 수 있겠느냐?”

“황족께서 방문하실 때는 늘 가주이신 주인님께서 직접…….”

“아니. 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는 것이니라. 이제 나와 공작은 사돈지간이지. 요 며칠 결혼식 준비로 자주 공작저에 발걸음 하였거늘.”

레브는 누구보다 예법을 잘 아는 제게 틀에 박힌 귀족 간 예절을 늘어놓으려는 공작가 집사의 말을 잘랐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나도 예의를 갖춘 차림이 아니니 여자끼리 편히 이야기 나누고 돌아가고 싶구나.”

“그러면 주인마님을 모셔오겠습니다.”

공작저의 응접실로 안내받은 레브는 집사가 재빨리 사라지자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데르의 강건한 육체는 쉬이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다른 문제였다.

레브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펼치자 보석처럼 붉은빛을 내는 렌즈가 놓여 있었다.


 
아까 낮에 쓰러진 마크시스 황제를 보기 위해 입궁했다가 발견했던 렌즈.

오라비의 목 언저리에 떨어져 있던 것을 주운 레브는 얼결에 그것을 쥔 채 가져와버렸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붉은 눈동자를 가리기 위해 짙은 색의 렌즈를 쓴다면 모를까?

도대체 빨간 빛을 띤 렌즈가 왜 필요한 것인지 말이다.

한 번 의식하자 붉은 렌즈의 존재는 계속 불편하게 레브의 신경을 건드렸다.

핑크블론드에 황금안이라든지, 검은 머리에 적안이라든지.

은청색 머리카락에 물빛 푸른 눈동자라든지.

대륙에는 몇몇 나라에 유명한 고위 신분, 혈통에 드러나는 색이 있었다.

그 집안에서도 특별히 그런 색을 타고난 이는 권력의 정점으로 추앙받곤 했다. 집안을 세운 선조의, 또는 전설에 따른 힘을 받은 증표처럼 여기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걸 막기 위해 변장할 때 그것을 가리기 위해 다른 색을 쓴다면 몰라도 어째서 이런 물건이 존재할까?

붉은 눈동자는 오데르의 색인데.

오데르의 상징이자 신의 혈통임을 증명하는 붉은 색인데.


‘오데르인 황제 폐하 옆에 이런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이지?’

상식적으로 남들에게 붉은 눈동자를 내보이는 이는 오데르뿐인데.

허울뿐인 이름만 가져간 사비엘은 파란 눈동자이므로 제국에 붉은 눈동자일 수 있는 이가 딱 셋이었다.

마크시스, 일레온, 그리고 레브 자신.

도대체 붉은 렌즈가 왜 존재하는 걸까?

이런 것을 누가 만든 것일까?

오데르가 아니라면, 눈 색을 붉게 보이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필요하지 않을 것을.

본래의 색을 가려 오데르처럼 빨간 눈동자를 꾸며낼 때나 쓸 물건인 것을.

그렇게 가 닿은 생각이 오싹하고 불길한 생각을 불러왔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마크시스 황제가, 오라비가 오데르가 아니라니.

레브는 예언서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건국 신화 위에 쌓인 제국의 역사와 자신의 존재를 믿었다.

신이 내려준 축복.

이런 육체에 깃든 특별한 영혼은 누구보다 우월한 존재로 살아가는 그녀 스스로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세운 나라의 황실에서 살아가며 신좌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자연히 믿게 되는 셈이었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오데르가 아닌데 황좌에 오를 수 있긴 한가?

그 또한 의문이었다. 뭐, 대놓고 후계에 오데르가 없어 사비엘이 황태자이니 오데르가 아닌 황제가 곧 탄생할지 모를 일이었지만.

이런 생각에 시달리며 레브는 괴로웠다.

마크시스 황제가 쓰러진 것도 내심 충격이었는데 갑자기 오라비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게 되다니.

저택으로 돌아간 후에 내내 렌즈를 들여다보며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쓰러진 마크시스 황제에게 물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황제 폐하를 뵈었어야 했던 것을.”

마크시스 황제를 알현하러 갔던 건 일레온과 엘리시아의 혼사에 대해 논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몇 번인가 그가 레브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입궁하라는 전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레브에게 그리 연락을 했던 건 그녀가 감금에서 풀려나 수도로 돌아온 직후부터였다.

하듄샤가 무너지는 바람에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그레로사에 다녀오는 등 정신없는 일들 탓에 차일피일 입궁을 미뤘다.

인제 와서 그렇게 마크시스가 저를 부를 때 빨리 찾아가지 않았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걸까.”

하려던 이야기가 혹시 이 렌즈와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레브가 답이 없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황녀 전하.”

“오. 마리엘라. 이리 앉게.”

편해 보이는 잠자리용 원피스 위로 가운을 겹쳐 입은 마리엘라가 응접실 안으로 사뿐히 걸어들어왔다.


“쉬고 있었을 텐데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 대공 전하와 딸 아이와 환담을 나누었답니다.”

“그래?”

“네. 내일 엘리시아를 대공저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셔서요.”

마리엘라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보고 배운 것이 없는 아이인데. 대공비가 되다니 걱정이 되네요.”

“무엇이?”

“책임이 막중한 자리인데 고생스러울까봐.”

“지금 내 아들이 그대의 딸을 고생시킬까 걱정이다 이 말인가?”

레브가 반쯤 농을 건 말에 마리엘라는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불경하게 감히 전하 앞에서 그리 생각하였겠습니까. 그저 부족함이 많아 걱정이지요.”

“농담일세. 그리고 자네 딸은 부족하지 않아.”

“……전하.”

레브는 엘리시아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 또한 사별한 남편과 자연스레 만나 연애를 했다.

사랑이라는 건 때와 모양, 형태가 다 달라서 누군가는 그저 달게만 느낄 수도 있고 혹자는 씁쓸하고 쓸쓸한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끌리고 교감하는 그 경험을 무릇 한 가문의 가주로 어릴 때부터 철저히 후계자로 길러진 아들이 하게 될 가능성은 낮았다.

일레온이 여태 혼인하지 않은 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일레온 또한 보통의 귀족가 자제들처럼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약혼부터 했을테니까.

일찍 가주의 자리에 앉은데다 긴 시간 전쟁터를 떠돌고 눈을 다친 채 돌아왔기 때문에 여태 그가 혼인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모든 일들이 일레온이 마음에 엘리시아를 담기 위해 준비된 일 같지 않은가?


“일레온이 원하는 결혼이야. 바라는 여인이고. 엘리시아를 부족하다 하면 일레온의 안목이 낮아지지 않나.”

“부끄럽습니다.”

“나 또한 흡족하게 여기는 혼사이니. 너무 심려치 말게. 대공은 대범한 성격이라 엘리시아가 원치 않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예법에 연연하지 않을 테니.”

일레온이라면 예법을 파괴해서라도 엘리시아를 편안하게 지내게 할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마리엘라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말이지.”

레브는 막상 마리엘라를 앞에 두니 또 그새 고민이 되었다.


‘이걸 입 밖에 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

그렇지만 그녀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레브 자신이 아니라면 달리 이 일에 대해 알아볼 사람이 없었다.


“예언서. 다른 세계에서 그 책을 쓴 사람이 자네란 말이지. 그래서 책을 수정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네. 그렇습니다.”

“혹시 마크시스 황제 폐하. 내 오라버니 말일세.”

새삼스럽다는 듯 마리엘라가 저를 쳐다보자 레브는 답지 않게 긴장했다.

마리엘라는 분명 답을 알고 있겠지.


“오데르가 아니라고 적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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