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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귀찮고 어렵고 복잡해 (148/151)


148. 귀찮고 어렵고 복잡해
2023.06.03.



“오데르가 아니라고 적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리엘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레브는 더욱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확실하게 답을 듣기도 전에 정답을 엿본 기분.

그런데 그 답이 하필 그녀가 원치 않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마크시스 황제께서 오데르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지 묻는 거야.”

“아니요. 저는 그런 내용은 쓰지 않았어요.”

마리엘라가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제가 쓴 이야기는 굉장히 한정적인 내용이에요. 주인공인 대공 전하를 중심으로 서술이 되었거든요.”

마리엘라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 후로 그런 점에 대해 많은 고찰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적을 수는 없어요. 누군가가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란 그런 것이지요. 보여주고 싶고 남기고 싶은 것을 글로 적게 되지요.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두 살아 있어요. 이렇게 엄청난 것을 누가 글로 모두 적을 수 있겠어요.”

“그래. 그렇겠지.”

“황제 폐하보다는 사비엘에 대해서 썼지요. 오데르인 아버지 밑에서 오데르로 태어나지 못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요. 사촌 간에 오데르로 태어난 일레온을 질투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면 예언서에 내가 오데르라고 적긴 했나? 그대가 생각했던 이야기에서 말이야.”

이번 질문에는 마리엘라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뭐라고?”

“황녀 전하에 대해서는 크게 비중 있게 등장하지 않아서 제가 그리 적어넣은 건 없었어요.”

“정말? 내가 오데르인데도?”

“일레온의 어머니도 오데르라는 이야기는 예언서 상에는 나오지 않아요.”

“그럴 수가.”

“중요한 건 과정보다는 결과예요. 우리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가니까요.”

마리엘라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미 원작이 너무 달라진 게 아닌가 생각이 들지도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맺어지는 거예요. 그 밖의 모든 일은 그 엔딩에 닿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하아.”

레브가 착잡한 눈빛으로 마리엘라를 보았다.

그녀의 한숨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마리엘라가 불안한 얼굴을 하자 레브가 결국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를 뵈러 갔다가 수상한 물건을 주웠지.”

“수상한 물건이요?”

레브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마리엘라의 앞에 조심스레 펼쳤다.


“이게 뭐죠?”

“처음 보나?”

“렌즈? 렌즈인가요?”

“아는군.”

“엘리시아를 베르베로 보내려고 했을 때 구해본 적이 있었어요.”

“블론드에 보랏빛 눈동자도 꽤 눈에 띄겠어.”

“네. 그래서 엘리시아의 눈동자색을 가려주려 했었는데.”

마리엘라가 손끝으로 렌즈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빨간색이네요? 이런 색을 어디에 쓴다고.”

무심코 중얼거리고 마리엘라는 깜짝 놀라며 레브를 보았다.


“설마.”

“그래. 맞아. 황제 폐하께서 침실에 누워계셨는데 목 근처에 떨어져 있었지.”

“그래서 제게 그런 것을 물으셨군요?”

“하아. 솔직히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한 대에 한 명.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황좌에 앉게 된다.

오데르가 아닌 사내아이와 오데르인 여자아이가 있다면 황좌에 올랐어야 할 이는 누구였을까?

둘 다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을까, 아니면 둘 다 자격이 없다 봐야 했을까.

확실한 건 만약에 마크시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면 그 비밀은 선황제 부부로부터 시작되었을 거란 점이었다. 레브가 기억하는 한, 마크시스 황제가 잠시도 눈동자가 붉은색이 아니었던 때는 없었다.


‘그렇게 어릴 때도 렌즈를 쓰셨을까?’

어린 자신을 놀아주던 붉고 예쁜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떠올리며 레브는 서글퍼졌다.


“만약에 폐하께서 오데르가 아니시라면 큰일이군.”

우선 마크시스 황제는 의식이 없이 쓰러진 상태였다. 황태자인 사비엘이 공공연히 벌써 섭정을 하겠다고 나서는 판인데 황제가 황제로서 자격에 문제가 생기면 사비엘의 입지도 곤란해졌다.

사비엘이 오데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들 네임에 오데르를 넣어 황태자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마크시스 황제의 선정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런데 황제가 신의 핏줄을 잇지 않았다는 게 알려지면 황실에 대한 지지가 무너지고 제국이 순식간에 혼란해질 수도 있었다.

레브와 일레온이 원치 않더라도 대안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오라비를 무너뜨려야 하는 자리에 서는 것만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답을 듣고자 왔는데 여기에도 답이 없었군.”

“전하.”

“직접 확인해보겠어.”

그리고 진실을 확인했을 때 그녀가 무엇을 생각할지는 미래의 레브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

침실로 돌아온 후, 일레온은 내내 말이 없었다.


“일레온.”

엘리시아가 다정하게 부르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아, 걱정하게 했군.”

일레온은 그제야 엘리시아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앉혔다.


“내가 괜찮고 괜찮지 않고 할 일이 아니니.”

둘이 손을 잡고 야심한 시각 복도 산책을 하던 중 아래층에서 분주하게 누군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보지.」

「같이 가요.」

 
천천히 아래층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급한 발걸음으로 지나는 집사를 마주쳤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지금요? 이 시간에요?」

「예에. 잠시 마님과 이야기를 나누시겠다 하셔서 막 차를 올렸습니다.」

「가보세요.」

 
눈이 마주친 둘은 의아했다.


「두 분께서 나누실만한 이야기는 많이 있겠지만 너무 늦은 시간인 게 뜬금없이 느껴지는군.」

 
일레온이 생각할 때 레브는 예법에는 칼 같은 데가 있었다.

실례를 무릅쓸 일은 안 한다는 정석적인 어머니가 이 시간에 공작저에서 마리엘라와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는 점 자체가 무척 이상한 상황이었다.


「가보자.」

「정말 어른들 두 분이서 이야기를 하실 게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응접실 문에 다다른 두 사람이 듣게 된 이야기는 놀라웠다.


「혹시 마크시스 황제 폐하. 내 오라버니 말일세.」

 
듣고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데르가 아니라고 적었나?」

 
황제 폐하가 오데르가 아니냐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곧 레브가 ‘빨간색을 띤 렌즈’에 대해 마리엘라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 물러가지.」

 
일레온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팔을 끌기에 얼결에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일레온은 깊게 생각에 빠진 듯 내내 저런 상태였다.


“만약에 황제 폐하께서 오데르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되는 거죠?”

“흠. 귀찮고 어렵고 복잡해지겠지.”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일레온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이 참. 진지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시시때때로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쩌라고.”

엘리시아에게 주먹으로 어깨를 한 대 맞으면서도 일레온은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콘스탄스 제국은 건국 신화가 지탱하고 있는 나라이지. 범접할 수 없는 신좌가 신탁을 내리니 다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단 말이지.”

“황제께서 신의 자손이 아니게 되면 반역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 반역까지 가기도 전에 오데르가 아니면서 황좌에 오른 것만으로 축출될 수도 있어. 복잡한 문제는 이거고.”

일레온이 팔을 뻗어 엘리시아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어려운 문제는 누가 황제의 자리에 앉을만한 인물이냐에 대한 논란이겠지.”

“논란이요?”

“오데르가 아니면서 황좌에 앉아 흠 없는 황제로 긴 세월을 지내셨지 않나. 그런 황제를 축출한다면 다음 황제에게 꽤 부담이 크겠지. 일단 사비엘이 황태자의 위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고 애초에 내 어머니께서 황제가 되셨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겠지.”

“아아.”

“하지만 신께서는 한 대에 한 명 태어나는 오데르의 사내아이를 황제로 받들라 했지. 어머니께서는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셨으니. 그 해석 자체가 논쟁이 될 수가 있어.”

“그렇군요. 하지만 신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주신들에게 여쭈어볼 수도 있잖아요.”

“신관들이나 귀족들은 몰라도 국민들이 널리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게 아닌가. 신들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일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제일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는데 그럴 경우 차기 황제로 추대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나라는 사실이야.”

“아.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문제일 것이 있나요?”

“왜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은 유능하잖아요. 다방면으로 뛰어나고 우월하고.”

엘리시아의 칭찬에 올라가던 입꼬리가 바로 축 처졌다.


“그렇다고 귀찮지 않은 건 아니야.”

 

 


“귀찮다고요? 이런 중요한 일에. 당신이 애예요?”

분명 예언서에 일레온은 장차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눈앞에 놓인 일들이 너무 급급해서 먼일처럼 느껴졌었는데.

마크시스 황제가 쓰러지는 건 본래 나온 일은 아니었지만 사비엘이 섭정을 하려 하는 건 원래 전개와 비슷했다.

원작에서도 사비엘이 오데르인 일레온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이들 때문에 자극받아서 마크시스 황제를 감금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르는 반역을 꾀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적힌 일레온은 진지하게 자신에게 내려진 일에 사역하는 신의 후손이었는데.


“황제가 되면 그대와 한가하게 지낼 시간이 줄어들잖아.”

현실의 일레온은 못마땅한 얼굴로 예견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신경 쓸 일도 많고. 나는 그리 공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공정히 하려면 그게 또 더욱 귀찮단 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영지를 몰수해서 엘리시아 1령, 엘리시아 2령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

“말도 안 돼. 하하하. ”

망작을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은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입을 벌리고 한껏 눈을 휘며 소리 내어 웃는 그녀를 지척에서 내려다보던 일레온은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한 번만 더 그렇게 웃어봐.”

“웃길 때만 나오는 진실한 웃음이잖아요. 하하하.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죠?”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는 소리만 따라 하자 일레온이 아쉬워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최근에 내가 귀찮지 않은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

“뭔데요? 결혼 준비?”

“물론 그것도 귀찮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즐거운 일에 속하는군. 귀찮지 않은 일이라고 하려면 애초에는 귀찮을 만한 일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그렇네요. 뭔데요?”

일레온을 따라 진지하게 바로 앉은 엘리시아가 물었다.


“그대를 귀찮게 하는 거야.”

“……네?”

“그대를 성가시게 하고 싶어. 이런 건 짜증 나고 귀찮아야 정상인데 머리가 돈 것 같은 생각을 진지하게 계속하고 있다니까.”

엘리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계속 어떻게 하면 엘리시아가 나를 좀 봐줄까. 그런 생각이나 한다고. 이런 상태로 황제가 되면 콘스탄스 제국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라.”

어이없는 말도 눈부신 미모의 대공께서 말씀하시니 개소리로 들리지 않고 한 번 더 진지하게 곱씹어보게 되는 점이 함정이었다.


“엘리시아. 이런 내게 실망했나? 왜 아무 말이 없지?”

고백의 말을 길게도 풀어놓고 괜히 제 눈치를 보는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목에 팔을 감고 반듯한 그의 입술에 도장을 꾹 누르듯 입을 맞추었다.


“나도 당신에게 미쳐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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