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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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아
2023.06.07.
“나도 당신에게 미쳐 있어서요.”
“큭.”
다음 순간 일레온이 어딘가 아픈 것 같은 소리를 내어 엘리시아는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일레온? 괜찮아요?”
“하아.”
그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
“이상해.”
“어디가요? 어디가 이상한데요?”
“정말로 심장이 아픈 것 같아.”
일레온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뭐라고요?”
엘리시아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려 하자 일레온이 당혹한 듯 손을 저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아프다고. 정말…… 심장을 무언가가 관통하기라도 한 것 같아.”
좋은 감정도 이렇게 아프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걸까?
하긴. 사람은 너무 좋으면 울 수도, 때론 기절할 수도 있으니 지나칠 정도의 감격도 심장을 이토록 아프게 할 수도 있으려나.
일레온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엘리시아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어깨에 힘을 주고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망상했었다.
일레온은 그녀가 글을 읽고 떠올려 봤던 것보다 근사하고 멋있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상하기도 했다.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리엘라가 말했던 ‘모든 것을 다 적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런 걸까?
일레온이 제게 하는 짓의 반의반도 예언서에 적히지 않은 것 같았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그가 엘리시아를 향해 웃었다.
“나의 대공비께서는 점점 대범해지셔서.”
“당신은 뭐든 맘대로 하잖아요.”
“그렇군. 처음으로 공평한 게 귀찮지 않기 시작했어. 그대도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아.”
엘리시아는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아니요. 하고 싶은 거 그런 거 없거든요.”
“과연 그럴까?”
일레온은 공작 부부를 보기 위해 늦은 시간에도 갖추어 입고 있던 것들을 벗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나아?”
“뭐가요?”
“셔츠는 입을지 벗고 잘지 묻는 건데.”
동그랗게 뜬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런 걸 왜 묻는…….”
“나야 벗는 쪽이 좋지만.”
그가 보란 듯이 명치 아래쪽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엘리시아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셔, 셔츠.”
일레온이 픽 웃으며 풀던 단추를 도로 채웠다.
“하고 싶은 게 없기는.”
열이 달아오른 발그레한 얼굴로 엘리시아가 방문을 향해 걸었다.
“손님방 가서 주무세요. 아니면 내가 나갈까요?”
엘리시아가 제 방을 빠져 나갈 일은 요원했다.
사각거리는 얇은 흰 셔츠를 입은 남자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서 잠들어야 했다.
***
「전하. 공작부인께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집사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그저 주인이 알아보라는 일을, 시킨 일에 사역할 뿐이었다.
「뭐……라고?」
오히려 충격을 받은 듯 당황한 건 일레온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를 보고 뒤늦게 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사망이라니? 갑자기?」
「아. 그게……. 저도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보았습니다만.」
집사의 말에 따르면 유테르 공작 부부가 베르베로 향하는 배에서 바다로 투신했다는 것이다.
「엘리시아 영애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저택과 영지를 팔겠다고 내놓은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건국 신화에도 나오는 공신 가문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게 명예일 텐데.」
처음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며 집사에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황제에게 보란 듯이 시위한다 여겼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을 진짜로 팔려고 했을 리 없다고 말이다.
또는 그런 반감에 내놓은 물건을 사들이는 것 자체가 황실의 심기를 건드릴 테니 실제로 사려는 이가 없을 거고.
덕분에 한참을 유람하다 귀국한 어머니께서 머물만한 거처를 물색하지 못해 고심하던 그가 유테르 공작저를 사들이지 않았나. 예상보다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말이다.
「공작부부가 딸의 일로 신변을 비관하곤 했답니다. 베르베로 거처를 옮긴 자체가 그런 뜻이 아닙니까. 사비엘 전하께서 죽은 아가씨에게 해를 끼쳤다는 추문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덮은 황실과 차기 황제에게 충성할 수 없겠지요.」
「공작이 자진한 것은 확실한가?」
「예?」
「타살일 가능성은 없나?」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않았습니다만, 유테르 공작께서 유명한 학구파이신 것과 달리 상당히 검술에도 능하셨다는군요. 아카데미 시절에 황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다고 하고요.」
「그렇군.」
「습격이 있었다면 좁은 배 안에서 다른 이들이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일레온이 말이 없자 집사가 그의 심기를 살폈다.
「더 하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아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예. 전하.」
집사가 사라지자 방 안에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후우.」
일레온은 자신이 왜 이 일에 연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충격.
이런 기분이 뭇 사람들이 느낀다는 충격받았다고 할 때의 그 충격일까.
워낙 별종으로 태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느낄 수도 없는 그로서는 이 또한 생소한 경험이었다.
「무언가 있는데.」
오데르는 관조의 세계로 떠난 초월자였다.
까마득하게 먼 세상 꼭대기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선조에게 일레온은 묻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이한 예감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냐고.
「끝나지 않았어.」
끝나기는커녕 아직 무언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도 일레온의 꿈에 엘리시아가 나오는 일은 계속되었다.
전선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며 바쁜 동안 꿈을 꾸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뜸하더니 오랜만에 꾼 꿈속에서 일레온 자신은 기함할만한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황제가 되면 그대와 한가하게 지낼 시간이 줄어들잖아.’
예를 들자면 이런 말.
게다가 자신의 관심사가 온통 여자에 쏠려있어서 아무리 꿈이라도 참고 봐주기 곤란할 정도였다.
꿈속에서 자신은 상당히 맛이 간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던가.
한 가문의 후계자로서, 장차 가주가 되어 클레벤트의 이름을 짊어지는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를 끝없이 연마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 고아한 기품.
짧은 경험에도 원숙하게 명령하고 가솔들을 이끌 수 있는 기개.
……따위를 개나 줘버린 듯 머릿속에 들어찬 생각은 무척 한심했다.
결혼식장에 뿌릴 꽃잎이 흰색이면 엘리시아가 입을 드레스와 겹치고, 분홍색이면 그녀를 위해 맞춘 티아라의 보석과 겹치는데.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원색이라 아무래도 결혼식이랑 어울리지 않겠지? 물론 엘리시아는 예쁘니까 아무 꽃가루를 뿌려도 다 잘 어울리겠지만 그녀를 감동시키는 건 중요하니까.
고작 이런 걸 생각하는데 심각하게 고심하다니.
더불어 끝도 없이 맴도는 또 다른 생각이 첫날 밤에 하고 싶은 건 많지만 엘리시아를 기쁘게 해주는 걸 우선해야 할 텐데 내가 과연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안 그래도 지금도 뭐든 당신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 꿈속의 자신은 이 점에 할 말이 많고 억울한 것 같았다 – 는 그녀인데 여기서 더 점수를 깎아 먹으면 안될 텐데.
……같은 것으로 제국검으로 긴 세월 전장을 떠돌며 콘스탄스 국가의 영광을 외치며 먼 국경선 끝자락을 위협하는 이민족을 호령하던 기사, 클레벤트 대공의 품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하아. 정말 돌겠군.」
그러나 정작 가장 타격이 큰 것은 자꾸만 이런 꿈을 꾸는 게 심리적으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과 억압 때문에, 실제로는 그도 저런 것을 바라고 있어서 반복적으로 꿈에 나오는지 의심할 때 드는 자괴감이었다.
그 와중에 어젯밤, 그는 처음으로 활짝 웃는 엘리시아를 보았다.
말도 안 돼. 하하하.
일레온 자신이 봐도 한심한 새끼를 그녀도 참아줄 수 없었는지 파안대소했는데 그 얼굴이 무엇으로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은 제 한 손으로 잡힐 정도였다. 그렇게 아담한 곳에 커다랗고 신비롭게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에 고운 선을 그리는 콧날, 그 아래로 고운 입술까지 알차게 들어찼다.
그동안 꿈에서 엘리시아는 울거나 무표정하게 있거나 때로는 자신의 감정과 겉으로, 표정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일치하지 않아서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할 때도 있었는데.
자연스레 터져 나온 웃음이 그토록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엘리시아가 그렇게 웃는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러다 실제로 본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순간을 떼어 보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장인을 불러다 조각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라도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미친놈.」
이쯤 되니 꿈속의 자신이 돈 것인지, 그 꿈을 엿보는 자신도 같이 미쳐가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똑똑.
「무슨 일이지?」
「전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곧 가지.」
일레온은 방을 나서기 전에 거울 속 자신의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살폈다.
「그분께서는 이런 데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편이니.」
저택 바깥으로 나서자 집사가 말고삐를 건네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오데르인 제 주인에게 맞지 않는 말이라 여겼는지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차로 다시 준비시킬까요?」
「아니. 늦을 수는 없으니 이대로 가겠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전하.」
부지런히 박차를 가해 달려 도착한 곳은 과거 유테르 공작저였던 곳이었다.
입구부터 화사하게 연한 파스텔 톤의 꽃장식이 되어있고 넓은 정원 곳곳에 일꾼들이 카펫이며 리본이며 들고 나르느라 분주했다.
「일레온!」
그중에 호리호리한 키의 여인이 바쁘게 어디론가 걷다 말고 그를 보고 반색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맵시 있게 높게 틀어 올린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에는 총기가 반짝거려 그녀를 본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게 했다.
「어머니.」
「늦었어. 일찍 와서 도와달라니까 이게 일찍이니?」
오늘은 레브 황녀, 일레온의 어머니가 수도 저택에서 처음으로 무도회를 여는 날이었다.
저택을 사던 날 을씨년스럽던 정원은 그의 재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연 명성이 높던 정원은 예전의 멋을 되찾아 화사한 꽃들로 활기를 되찾았다.
「정원은 취미가 없으실 줄 알았는데요.」
「으흠. 그랬지. 하지만 여기는 꾸미니 황실 정원보다 낫더구나. 돌아가신 선황제께서 아끼시던 것들을 언제까지 가꿔야 하는지. 내 마음대로 꽃 한 송이 심을 수도 없을 때는 재미가 없더니 여기는 다르잖니.」
「어머니께서 마음에 들어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날 저녁, 야외 무도회가 열리는 동안 내내 레브는 그를 끼고 다니며 아가씨들에게 인사시키느라 바빴다.
견디다 못한 그는 반쯤 도망치다시피 대공저로 돌아왔다.
마차가 아니라 말을 타고 온 덕분에 지체 없이 바로 튈 수 있었다.
「하아.」
침실에 누운 그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유테르 공작저는 어머니의 취향으로 변모했다. 예전 유테르 공작저의 흔적은 쉬이 찾기 힘들 정도로 싹 뜯어고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 집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공작부인이 자꾸 떠올랐다.
「그 노트를 어디에 뒀더라?」
제발 그것을 읽어달라 했었지.
어쩐지 그 말이 유언처럼 느껴져서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노트는 공작부인이 손으로 직접 적은 것처럼 보였다.
「일기인가? 아니, 습작 같군.」
몇 장 가볍게 넘겨 읽던 일레온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건. 대체 뭐지?」
잘게 적힌 글씨를 읽던 그의 시선이 한자리에 멈추었다.
「카페 카르디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