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 아는 이야기 (150/151)


150. 아는 이야기
2023.06.10.



 


「카페 카르디날?」

 
노트에 적힌 건 통속 소설의 습작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 내용으로 적힌 것이 그가 르벨린과 처음 만날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당황스러운 건 르벨린의 이름 대신 그 자리에 엘리시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치 카페 카르디날에서 눈먼 그가 만났던 사람이 르벨린이 아니라 엘리시아였던 것처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일레온은 기분이 상했다.

공작부인의 음침한 취미를 엿본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것을 내게 읽어보라 하다니.」

 
망상도 본인만 모른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레온은 상당히 불쾌했다. 요즘 내내 신경을 썼던 만큼 더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막 노트를 덮으려던 그가 또 다른 자리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독백이라니?」

 
엘리시아를 만난 후, 자신의 심경에 대해 적힌 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르벨린이 제 눈을 낫게 해줄 때 생각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일레온은 결국 밤을 새워서 노트를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여기 적혀 있는 것들은 소설이나 상상이 아니었다.

일부는 시간이 지나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나 큰 사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시기적으로 자신이 느꼈던 것들 심정에 대해 서술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실제로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맞다는 게 문제였다.


「공작부인과 알고 지낸 적은 없었는데.」

 
저택을 매입할까 할 때 둘러보러 갔다가 마주친 게 다였다.

만난 적도 없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세세하게 기정사실처럼 글을 쓸 수 있을까?

일레온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까지 적혀 있었다.

사비엘이 아버지인 선황제를 축출하고 황위에 오른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제국 신앙의 중심. 성소 하듄샤에 대대로 감추어져 내려오는 예언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황제는 신탁이 점지한 인물이었다.

한 대에 한 명 태어나는 오데르의 사내아이.

암암리에 황실의 방계인 자신도 레브 황녀와 더불어 예언서의 존재를 알았다.

제국에 일어날 중요한 일들이 적힌 어떤 책을 하듄샤에서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예언서 같잖아.」

 
노트에는 앞으로 그가 마크시스 황제를 억류하고 황좌를 강탈한 사비엘을 처단하고 황제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사비엘이 황위를 찬탈하는 시기는 일레온이 전선으로 복귀한 직후.

그러니까 조만간의 일이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노트의 앞에 서술된 것들이 대부분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저와 인연이 닿았어야 했을 엘리시아가 죽은 것과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고쳐준 르벨린에게 반하지 않은 것만 빼면 다 똑같았다.

그 와중에 더 어이가 없는 건, 황태자 사비엘의 만행으로 목숨을 잃는 여인으로 등장한 게 르벨린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엘리시아와 르벨린의 자리를 바꾼 것 같군.」

 
그때 무언가 싸늘한 기운이 그를 덮치기라도 한 듯 팔에 소름이 돋았다.

고작 노트를 읽었을 뿐인데.

금기에 손을 뻗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일레온은 몇 곳을 훌훌 펼쳐 다시 읽어보고는 한숨 쉬듯 그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엘리시아.」

 

***

마리엘라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답답해.’

결국 새벽에 홀로 저택을 빠져나와 유테르의 낙원을 헤매듯 한참 돌고 돌며 산책을 했다.

드레스 자락이 풀에 맺힌 새벽 이슬로 흥건히 젖을 때까지 이리저리 배회하였으나 명치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혹시 마크시스 황제 폐하. 내 오라버니 말일세.」

「오데르가 아니라고 적었나?」

 
지난밤 레브에게서 들은 말이 과히 충격이었다.

그런 내용을 쓰지 않은 건 둘째치고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마크시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니.

애초에 설정에서 중요한 부분은 오데르 밑에서 오데르가 아닌 사비엘이 태어났다는 점이었다.

이 세계의 예언서가 된 <눈먼 짐승의 꽃>을 썼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리엘라는 자신이 그걸 쓴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상상하고 떠올린 이야기를 적은 거였지만, 실은 어떤 기연에 의해 자신은 양쪽 세계를 통할 문을 만든 역할이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와 능력의 한계를 떠올리면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작가가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녀의 힘은 절대적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아. 어떡하지?”

마리엘라가 이렇게 불안에 떠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엘리시아의 목숨이 원작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크시스 황제가 오데르가 아니라면. 모든 게 다 잘못된 것일지도 몰라.”

엘리시아는 그녀의 실수로 낙동강 오리알처럼 오갈 데 없는 인물이 된 상태였다.

누구라도 사비엘의 손에 죽을 자리에 이름을 올리게 하는 것이 타당하진 않았겠지만 하필 제 딸의 이름을 그 자리에 적게 될 줄이야.

그래도 믿고 있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 엔딩에 다다르기만 하면 그 후로는 강제력에서 벗어나리라 믿었는데.

믿고 있던 도끼가 발등을 찍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가 알던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불안감은 끝이 없었다.

자꾸만 엘리시아가 이대로 공기 중에 녹아버리듯 사라지기라도 하는게 아닐까?

구체적인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처 없이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떠돌던 마리엘라는 저택 안으로 발을 옮겼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뭐라도 해야 했다.


“예언서를 다시 봐야겠어.”

소나텍이 뜯어간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앞에서부터 꼼꼼하게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엘리시아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을 얻어야 했다.


‘만약에 여기가 그 전개가 아니라면 엘리시아는…….’

지금도 존재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다.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오데르의 반려로 만들지 않았다면 진작에 검은 불꽃이 그녀를 흔적도 없이 태웠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괜찮은 거였을까?

당연히 오데르의 반려에 대해서도 마리엘라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쓴 내용에는 없던 이야기였으니까.

마리엘라는 초조한 기분으로 예언서를 둔 응접실로 향했다.


“……아.”

그 자리에는 그녀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편하게 흐트러트린 채로 새빨간 눈동자가 예언서를 향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는 일레온은 흰 셔츠에 바지만 입은 간소한 차림새였지만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표정이었다.

선뜻 부르거나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그녀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예언서에서 고개를 든 일레온이 먼저 마리엘라를 불렀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잘 잤나요? 이런 시간에 어쩐 일로 예언서를 보고 계셨어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일레온은 자리를 비키며 표지를 덮었다.


“더 보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일레온이 그녀를 보았다.


“실은 어젯밤에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엿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늦은 시간인데 집사 말로는 어머니께서 오신 거라길래 잠시 인사를 드리려 했던 것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주무시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쩐지 심란해서 잠이 오지 않아서요.”

마리엘라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요? 예언서에서 뭘 확인했죠?”

“달라진 게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가요?”

일레온이 말을 고르다 천천히 대답했다.


“달라졌습니다.”

그 말에 마리엘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달라졌다고요?”

원작이?


“어디가 달라졌나요?”

달라지면 안 되는데.

그녀가 생각한 딸을 구하는 방법이 오롯이 원윤지가 썼던, 마리엘라가 아는 이야기를 전제로 했다.

무언가 달라졌다면 그 모든 것이 변수가 될 터.

하지만 일레온의 대답에 마리엘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엘리시아를 많이 사랑합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났다.


“여기 쓰여 있는 저는 상대를 이렇게까지 마음에 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서는 이대로 일어나지 않은 셈이지요.”

“대공.”

마리에라는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달라지면 안 됩니다. 무언가가 바뀌거나 달라지면 전부 어딘가에 영향을 주게 돼요. 그것 하나만 바뀔 수 있을 리 없죠. 하나가 바뀌면 둘, 셋 연결된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달라진다는 건 불가한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일레온이라면 그녀가 겪는 고통과 답답함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어쩌면 해결해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바뀌는 게 두려워요.”

쥐어짜듯 간결하게 굴러나온 속내에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도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합니다. 모르는 만큼 더 위험을 감수해야겠지요.”

“엘리시아를 지킬 수 있겠나요?”

“물론입니다.”

시원스레 대답하는 그의 어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이 책을 드릴게요.”

마리엘라가 예언서를 들어 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말입니까?”

“이건 이미 일어난 시점의 일들이에요. 대공께서 보길 원한다면 가져가셔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일레온은 큼지막한 책을 받아들었다.


“어제 이야기했던 연회는 열지 않겠어요. 되도록 빨리 대공저로 돌아가세요.”

소나텍이 잠잠하고 조용한 것이 영 신경 쓰였다.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꿍꿍이나 함정을 파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하고, 막상 눈앞에 나타나 그녀를 위협하면 미칠 듯이 분노했다.

보이는 곳에 있든 없든 소나텍의 존재에서 마리엘라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분명 소나텍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마리엘라로부터 일찍 대공저로 떠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은 일레온은 마차를 준비시켰다.

지체없이 엘리시아의 방으로 향한 그는 잠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귀여운 아기새 같아.

세상에 살아있는 것 중에 제일 예쁘고 귀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싶었다.

하지만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각, 고요한 공작저에 울리는 말의 투레질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엘리시아를 잠든 이불째로 말아 안고 일레온은 마차로 향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 편자가 조용한 새벽길 위를 박차는 소리에도 엘리시아는 신기할 정도로 잘만 잤다.


“이쯤 되면 일부러 자는 척하는 건 아닐지 의심이 된단 말이지.”

이렇게나 깨지 않을 수가 있나?

타고나길 기척에 예민한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제 품에서 잘 자는 것도 기특하고 예쁘기만 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마음 놓고 편히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상념에 젖은 그의 팔 안에서 잘 자던 엘리시아가 눈을 뜬 건 대공저의 침대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이, 일레온.”

엘리시아가 당혹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왜 눈만 뜨면 당신 침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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