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상하고 아름다운
(1/118)
01. 이상하고 아름다운
(1/118)
#01. 이상하고 아름다운
2022.05.01.
스탠드 조명 하나가 전부인 어둑한 거실에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내려앉았다.
머그에 더블샷을 붓고, 차가운 물을 부어 젓는 행동은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처럼 기계적이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커피는 털어 마시기 딱 좋은 온도가 됐다.
강은 그것을 단숨에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 모습이 마치 약이라도 삼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실로 그러했다.
그녀에게 커피는 그저 잠을 쫓기 위해 마시는 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카페인을 이용해 쪽잠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깊은 잠을 잔 지 사나흘 정도가 지나면 에스프레소를 양동이째 마셔도 밀려오는 잠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방금 마신 건 그냥,
“…….”
술로 치자면 위로주 같은 거였다.
물리적 효과보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한.
컵을 내려놓자마자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이 울었다.
발신자는 매니저인 삼영이었고, 그가 따박따박 시간 맞춰 전화하는 이유는 뻔했다.
“응, 오빠.”
- 강아. 밥 먹었어?
밥때가 된 것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직접 냉장고를 채워주는 그에게 거짓말은 안 통했다.
그러니 이럴 때 가장 좋은 대답은 ‘아니, 아직’보다는,
“이제 먹으려고.”
-가 적합하다.
덕분에 삼영의 잔소리가 반으로 줄었다.
꼭 챙겨 먹고 자라는 그의 애정 어린 당부에 몇 번이나 알겠다는 대답을 들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내내 표정이 없던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저녁을 건너뛰려던 강은 생각을 고쳐 다시 걸음을 돌렸다.
냉장고엔 삼영이 한 끼 분량으로 정갈하게 나누어놓은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바로 먹을 수 있는 샐러드나 썰어놓은 채소 같은 것들이었지만, 나름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골고루 신경 쓴 영양식이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열고, 줄 맞춰 누워 있는 네모난 당근 스틱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입에 넣는 동시에 미련 없이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삼영의 성의를 봐서라도 더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게 최선이었다.
누적된 피로가 절정에 달하는 날엔 늘 속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소소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침대 앞에 멈춰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몇 달 전, 대한민국의 유명 여배우를 상대로 벌어진 대범한 납치 사건이 있었다.
그 전무후무한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강이었다.
본의 아니게 집에만 틀어박혀 쉬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언제 또 이런 날이 올까 싶어 늘어지게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강에게 숙면이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념한 그녀는 침대에 누워 몇 시간 내내 책을 보다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얕은 잠이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깊은 잠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붙들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빨갛게 핏발이 섰다.
책을 들고 있던 손이 어느새 침대 밖으로 힘없이 떨구어졌다.
툭.
카펫 위에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 그녀의 의식도 깊이 침잠되기 시작했다.
어둑한 시야 너머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보였다.
끼익– 끼이이익-
녹슨 놀이기구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음.
하하호호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반짝이던 놀이동산은 이미 오래전에 폐업이라도 한 모양새로 뒤바뀌어 있었다.
사방이 어둑했다.
칠이 벗겨진 회전목마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강은 잔뜩 위축된 채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외형은 성인의 외형 그대로인데, 목소리나 말투는 겁을 한껏 집어먹은 어린아이처럼 흘러나왔다.
오래전. 놀이동산에 홀로 남겨졌던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공포감이 스멀스멀 몸집을 부풀리던 그때였다.
“강아. 여기야.”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엄마야?”
“이리 오렴.”
“진짜 엄마 맞아?”
검은 안개를 뭉쳐놓은 듯한 형상은 대꾸 없이 계속 그녀에게 이리 오라 손을 흔들었다.
강은 조심스레 회전목마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서 와, 우리 딸.”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린 엄마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 강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일그러진 얼굴과 멋대로 꺾인 팔다리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아악!”
강은 비명을 지르며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거기 안 서!”
뒤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몸은 마치 무거운 추라도 매단 채 깊은 심연 속으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제발, 누가 좀……!’
살려줘.
여기서 꺼내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몸부림치던 때였다.
“도와줄까?”
어둠 속에서 들려온 선명한 목소리가 혼미한 정신을 깨웠다.
겁에 질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커다란 눈은 자연히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했다.
낡은 회전목마들 사이에 커다란 보름달을 등진 남자가 있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듯, 묘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입가에 번지는 남자의 미소에 정지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어디선가 날아든 바람이 그의 짙은 흑발을 부드럽게 스쳤다.
검은 타이와 슈트에 검은 코트까지 걸치고 서 있던 남자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정말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해줄 것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리 와.”
느릿하게 떨어진 입술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구해줄게.”
강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발이 무거웠지만,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달렸다.
등 뒤로 화가 난 엄마의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있는 힘껏 몸을 던졌다.
남자의 품에 안기는 찰나가 슬로모션처럼 늘어지다가 곧 커다란 파열음이 들려왔다.
와장창-
거대한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강의 뒤를 맹렬히 쫓던 존재가 사라졌다.
“……!”
모든 소리와 기척이 없어진, 그야말로 완벽한 고요 속.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그는 긴 손가락으로 강의 조막만 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입이라도 맞출 듯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너의 꿈을 먹고 싶어.”
마지막으로 본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고요히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허억!”
강은 비명 같은 숨을 토해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목을 옥죄는 것만 같던 느낌이 사라지며,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그대로 이불 위에 이마를 묻었다.
꿈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또 그 남자였다.
며칠 전부터 꿈에 나타나기 시작한 그는 오늘처럼 늘 같은 모습으로 같은 말을 건네곤 했다.
도와줄까?
이리 와. 내가 구해줄게.
꿈속에서 강은 늘 남자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잘 알지 못해도, 이 꿈에서 깨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몸에 익힌 후부터다.
너의 꿈을 먹고 싶어.
아찔했던 속삭임이 맴돈다.
……대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이제 남자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도화지 위에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그가 수백, 수천 명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단숨에 그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그녀의 기억이 남자의 얼굴을 상세히 더듬었다.
칠흑 같은 흑발에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그 위에 떨어진 한 떨기 붉은 동백꽃처럼 혈색 좋은 입술.
그는 마치 어둠에서 태어난 것처럼 서늘하고 기묘했다.
푸른 안개에 달빛 한 줌이 번진 것 같은 회색 눈은 밤을 닮아 신비로웠고, 그 묘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외모는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집어삼킨 미의 정점 같았다.
남자는 몇 번이나 그녀를 악몽에서 구해줬지만,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러니 강에게 있어 그 남자는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희망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느지막이 침대를 벗어난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암막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따스한 햇볕 냄새가 났다.
그 상냥한 기운들이 오늘도 잘 이겨냈다고 위로를 건네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독한 밤이 언제 찾아왔었냐는 듯 청명하고 깨끗한 날씨였다.
마치 그녀가 꿈꾸는 미래처럼 말이다.
산책이나 갈까.
오랜만에 서점도 좋고.
당분간 절대 혼자 외출하지 말라던 회사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제가 내뱉는 한숨에 질식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당장 회사로 오라는 황 대표의 호출이었다.
활동 중단을 통보받은 지 두 달 하고도 나흘째 되는 날이었고, 계절이 바뀐 뒤였다.
* * *
삼영과 함께 회사에 들어선 강은 일부러 더 밝게 인사했다.
“안녕. 다들 잘 지냈어요?”
그녀의 해사한 모습에 직원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안부를 전했다.
황 대표도 질세라 다가와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강아. 잘 쉬었니?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르는 거 보니까 근래엔 잠 좀 잤나 본데?”
“하하. 덕분에요.”
뒤따라오던 삼영이 대표의 능글맞은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 불퉁한 눈빛을 빠르게 캐치한 황 대표가 단박에 미간을 좁히고 따져 물었다.
“이삼영. 너는 왜 또 눈깔을 그따구로 떠?”
단추 구멍만 하게 좁아져 있던 삼영의 눈이 커졌다.
“예? 제 눈깔이 왜…….”
“제 눈깔이 왜애애?”
덩치 큰 대표가 물어뜯을 듯 따지고 드는 통에 삼영은 금방 꼬리를 내리고 깨갱거렸다.
“……죄송합니다.”
한껏 움츠러든 그의 가냘픈 어깨를 본 황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만 알짱대고 가서 커피나 타!”
그 우렁찬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던 삼영은 애써 재빨리 탕비실로 들어가 정성껏 커피를 탔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그의 취향에 맞춰 찬물을 살짝 섞어주면, 삼영표 커피의 완성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웃고 떠드는 대표의 낯짝이 보인다.
삼영은 가운뎃손가락으로 커피를 저으며 오늘도 황 대표의 뒤통수를 갈기는 상상을 했다.
그가 내온 커피를 막걸리 마시듯 털어 넣은 황 대표가 걸쭉한 감탄사를 뱉었다.
“크으- 커피 맛 죽인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늘이며 삼영에게 말했다.
“하여간 너는 우리 강이랑 이 믹스커피 타는 솜씨만 아니었으면 진작 모가지 날아갔어. 알지?”
“그럼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둥이만 살아서.”
황 대표의 타박에 삼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보다 못한 강이 화제를 돌리며, 삼영에게 꽂혀 있던 황 대표의 관심을 끊었다.
“아! 그렇지! 그렇지!”
그가 두툼한 손바닥을 마주치며 손뼉을 치고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네 새로운 경호실장 구했다, 강아!”
“경호실장이요?”
“그래! 이번엔 확실해!”
황 대표가 호언장담했지만, 갈려 나간 경호원이 벌써 6명이었다.
대낮에 벌어진 납치 사건 이후, 회사에서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붙여줬는데, 이상하게 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두손 두발 들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녀의 곁에 머문 이후 자꾸 꿈자리가 사나워 기가 빨린다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바닥난 인력은 결국 스케줄 중단으로까지 이어졌다.
황 대표는 노발대발하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다고 난리를 쳤지만,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강은 그들의 항변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이유로 스타일리스트며, 스태프들이 자주 그녀의 곁을 떠나곤 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어떤 이유에선지 강의 곁에 가까이 머무는 사람들은 늘 불행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고를 당하거나, 피폐해지기 일쑤였고, 종래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그녀를 떠나갔다.
데뷔 전에도, 데뷔 후에도 한결같이 붙어있는 삼영이 신기할 정도였다.
황 대표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쉽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강은 그렇게 7번째 경호실장을 만나게 되었다.
“얘도 너처럼 이름이 외자야. 성은 한 씨고, 이름은 산이래. 어때? 강과 산이라니. 환상의 커플 조짐이 보이지 않니?”
환상이든 환장이든 관심 없다. 어차피 곧 그만두게 될걸.
시큰둥한 그녀의 반응을 외면한 채 신이 난 황 대표가 문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와! 한 실장!”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보인 건 반들반들 잘 닦인 검은 구두코였다.
고개를 드니 블랙 수트를 갖춰 입은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절로 눈이 커다래질 만큼 오묘한 분위기와 표현할 수 없는 서늘함.
새까만 흑발과 대조되는 하얀 피부. 그리고 잿빛의 신비로운 눈동자.
강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눈에 그가 꿈에서 본 남자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한산입니다.”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산은 매혹적이고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가 손을 내미는 모습이 꿈속의 모습과 겹쳐졌고, 동시에 그가 했던 말도 재생됐다.
‘너의 꿈을 먹고 싶어.’
“뭐해? 인사 안 하고?”
넋이 나가 있던 강을 향해 황 대표가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마침내 손끝이 닿자 산의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강의 심장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