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너의 존재는 2022.05.08.
그의 체취는 밤과 새벽의 경계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한산을 감싼 분위기에는 이렇듯 언제나 서늘함이 함께였다. 하지만 오늘 그가 남기고 간 열기는 자신의 온몸을 태우고도 남을 듯 뜨거웠다. 보지 못해도, 선명히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들렸던 음성은 곱씹을수록 짓궂게 느껴졌다. 말에 담긴 속뜻이 마치 자신을 더욱 간절히 원해보라고 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티끌 하나 없이 무구해 더욱 악랄했던 산의 음성은 그렇게 몇 번이고 그녀의 뇌리를 헤집어댔다.
“…….”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채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청명했던 하늘을 쫓아낸 어둠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외롭게 사그라지는 밤이었다. . . .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는 사이 날이 밝았다. 애벌레처럼 이불 안에 파묻혀 있던 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집이라는 생각을 매번 하지만, 이사 온 걸 후회하진 않았다. 왜냐면 이 집은 열심히 일해 얻은 노동의 산물이었고, 그건 그만큼 제가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오늘’이란 매일 맞서야 할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죽지 않고 살아 얻어낸 귀한 하루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마다 바랐다. 언젠가는 나도 악몽을 꾸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며 바라던 행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서울의 아침은 여전히 평년 기온을 웃돌고 있어, 비교적 온화하겠습니다. 바다의 물결은 모든 해상에서 비교적 낮게 일 전망이며…….”
강은 삼영이 놓고 간 도시락 중 가장 푸짐한 걸 꺼내 먹으며, 날씨를 체크했다. 뉴스가 끝나고는 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복귀 후엔 당분간 없을 휴일일 테니, 오늘만큼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생각이었다. 모자와 커다란 후드점퍼로 무장을 마친 그녀는 현관에 섰다. 몇 달 전 사고가 떠올라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용기를 냈다. 주차장에 있는 오토바이로 곧장 이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디든 한적한 곳에 덩그러니 놓이는 상황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서점으로 향했다. 타고 온 오토바이에서 내린 뒤 헬멧을 벗고, 곧장 마스크를 꺼내 썼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활기인지. 도심의 공기는 매캐했지만,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녀에게도 활력을 선물했다. 바글바글한 인파 속. 서점 안을 가득 메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보느라 강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매거진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메인 매대에는 강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화보를 표지로 내세운 한 패션 매거진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막 손을 뻗으려는데, 옆에서 우렁찬 여고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헐! 서강이다!”
깜짝 놀란 강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자신을 알아본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여고생은 매거진 속 그녀의 모습을 보고 외친 거였다. 강은 황급히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 썼다.
“대박. 서강 진짜 예쁘지 않냐?”
“이 언니는 진짜 킹정이지. 그냥 예쁜 것도 아니고 존나! 조오온나 예쁘니까.”
“그치. 분위기가 개사기야, 완전.”
“인간적으로 이건 사자. 책상 위에 붙여놓고 다이어트 조져야지.”
온갖 은어에 욕 한 바가지를 맛깔나게 버무려 강을 찬양하던 여고생들은 그렇게 나란히 매거진을 품에 안은 채 금세 자리를 떠났다. 들킨 줄 알고 콩닥콩닥 뛰어대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린 강이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오의 햇살처럼 밝고 힘이 넘치는 여고생들의 기운에 저까지 덩달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다. 물론 그들의 박력 넘치고, 살벌하던 폭풍 칭찬의 영향도 크게 한몫했다.
“역시.”
미소를 덧그린 그녀가 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스스로 칭찬을 건넸다.
“태어나길 잘했어.”
은근한 스릴도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강은 다시 서점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몇십 분이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책을 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강에게는 책이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휴일이 생길 때면 책 속에 파묻혀 종일 시간을 보내곤 한다. 문득 그녀의 눈에 낡은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당신이 모르는 꿈에 관하여』 가지런히 꽂힌 책장 한가운데 삐죽 튀어나와 있던 그 책은 어서 자기를 꺼내 읽어보라는 듯 강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소설인가?”
장르가 모호한 느낌의 책은 중고서점에서나 팔 듯한 모양새였다. 강은 별생각 책장을 없이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시선이 한 페이지에 머물기 시작했다. 몽마란 어떤 존재인가.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를 응시하던 강의 시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이 악몽을 꿀 때 느끼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악몽을 꾸게 하고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강에게는 그 이야기가 아주 터무니없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악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저처럼 매일 악몽을 꾸는 인간도 드물 테니까. 홀린 듯 책의 앞표지를 살폈다. 작가 미상(未詳). 출판사의 이름도 낯설었다. 조금 더 확실한 책의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의 맨 뒷장을 연 바로 그때였다.
“서강 아니야?”
멀리서 들려온 어렴풋한 목소리에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맞는 거 같은데?”
“한번 가볼까?”
맙소사. 이번엔 진짜였다.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강은 읽고 있던 책을 서둘러 꽂아놓았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왔다. 현실에서 팬을 마주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 그랬다. 물론 앞으로도 이 상황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그 순간까지 책에서 읽은 글귀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결국 얼마 못 가 다시 서점으로 걸음을 돌렸지만, 이미 그 책은 사라진 뒤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온라인으로 서점에서 봤던 책을 검색했다. 하지만 샅샅이 뒤져도 그 책에 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방문했던 서점에 직접 전화해 물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서점에서 봤던 책이 있는데 온라인으로 검색이 안 돼서요.”
- 네. 어떤 책일까요?
“‘당신이 모르는 꿈에 관하여’라는 책이에요.”
또박또박 제목을 전달했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끝에 돌아온 대답은 그런 책은 없다는 말뿐이었다. 혹시 책 제목을 잘못 봤나 싶어 글자를 조금씩 바꿔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네. 분명히 그 제목이 맞는데…….”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때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삼영이 보낸 메시지였다. 마트에 장 보러 왔는데, 들어가는 길에 잠깐 들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빈 냉장고를 채워주러 오려는 것일 거다. 스케줄을 비롯한 사생활의 일정한 부분까지 관리를 받게 된 건 황 대표가 삼영에게 명한 업무에 포함된 일이었다. 못 먹고, 못 자다 피로가 누적되어 집에서 한번 쓰러진 적이 있었다. 만일 그때 삼영에게 제때 발견되지 못했더라면……. 어쨌든 이건 그날 이후로 생긴 회사의 새로운 방침이었다. 황 대표는 그걸 회사가 소속 아티스트를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관리’ 차원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감시’에 가까웠다. 아마 상대가 삼영이 아니었다면 진작 거절했을 것이다. 강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삼영이 오기 전에 집을 좀 치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협탁이며,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카페인이 잔뜩 든 피로회복제와 커피가 담겨 있던 캔과 병, 종이컵 따위가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나흘 동안 먹어 치운 양치고는 상당했던 터라 분명 삼영이 보면 기겁할 게 빤했다. 그녀는 서둘러 바구니에 쓰레기를 전부 담았다. 그러고는 내용물을 비운 후에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던 중이었다. 딩동-
“벌써 왔나?”
쪼그려 앉아 있던 강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제껏 집에 들인 손님은 삼영이 유일했다. 아파트에 출입할 수 있는 여분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삼영뿐이었고. 그래서 당연히 그일 거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는데,
“일찍 왔…….”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케이크 좋아해요?”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한산이 왜 여기에 있을까. 가벼운 크림색 니트에 검은 슬렉스 차림의 그가 하얀 베이커리 박스를 들어 보였다.
강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쾅! 산은 박스를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잠시 정적이 흘렀다. 1초, 2초, 3초. 문이 다시 열린 건 정확히 3초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는 그를 보며 강이 다시 질문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윗집으로 이사 왔거든요.”
산의 쭉 뻗은 검지가 천장을 가리켰다.
“네?”
“이사 왔다고요, 윗집으로.”
순서만 바꿔 재차 같은 대답을 건네는 그를 그녀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삿날엔 원래 떡을 돌리는 거라던데.”
“…….”
“근처에 빵집밖에 없네요.”
강은 제가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슬쩍 좁아지는 미간을 본 산이 피식 웃었다.
“왜요? 일개 경호원이 톱스타랑 같은 아파트에 산다니까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비싸기로 소문난 서울의 노른자 땅에 있는 고급 아파트를 경호원의 숙소로 제공해주는 회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그녀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났던 사고.”
간결하고 묵직한 문장에 순간 몸이 굳었다.
“한동안 집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들었는데.”
“…….”
“힘들었겠어요.”
산이 덤덤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강은 어질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생각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그쪽 말은 지금 저 때문에…… 이사까지 오셨다는 거예요?”
“황 대표님이랑 생각보다 뜻이 잘 맞더라고요. 이해도 빠르시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몸값 비싼 경호원까지 고용했는데, 효과 확실히 보려면 아무래도 밀착 경호는 불가피하지 않겠냐며.
“그렇잖아요. 붙어 있어야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지.”
뒷말을 덧붙인 그가 살짝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하지만 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은 더욱이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짠돌이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황 대표가 경호원의 숙소로 이런 호화스러운 집을 마련해줬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10년 가까이 제 곁을 봐주고 있는 삼영도 아직 옥탑방 신세인데, 최측근이라 인심을 후하게 썼다고 해도 그에게 먼저 썼어야 할 일이었다.
“자. 받아요.”
산이 다시 한번 케이크를 내밀었다. 시선을 내려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이 남자. 대체 어떻게 황 대표를 구워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