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홀리는 남자
(6/118)
06. 홀리는 남자
(6/118)
#06. 홀리는 남자
2022.05.19.
“내가 왜 온 건지는.”
“…….”
“매니저님이 더 잘 아시지 않아요?”
나긋한 목소리가 어둑한 밤처럼 내려앉았다.
삼영은 반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제게로 다가오는 산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지 않느냐 묻는 말에 괜히 속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 그와의 대면을 바쁘게 되짚어보았다.
뭔가 큰 실수가 있었던 게 아니고야 집까지 들이닥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설마 날…… 어떻게 해버리려고 온 건 아니겠지?
벌써 틀어지면 곤란한데.
온갖 상상을 다 하다가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지금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린 그가 되물었다.
“옥상은 어떻게 올라왔어요? 대문이랑 중문 다 잠겨 있었을 텐데.”
“대문은 주인아주머니가 열어주셨고, 중문은 열려 있던데요?”
그럴 리가.
1층에 사는 주인집 내외는 확인도 없이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는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 때나 쳐들어오는 아줌마 때문에 중문 잠그는 일을 소홀히 한 적 없던 자신 아닌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다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잠금장치가 헐겁던데.”
“…….”
“손 좀 보셔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산의 표정은 거짓 한 점 없이 온화했다.
마치, 진실이 무엇이든 당신은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냥 그런 줄 알면 된다고 말하듯.
더 따지고 들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표정 하나로 멱살을 틀어쥐는 듯한 저 눈빛 때문에.
이러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꾸도 못 하겠구나 싶다.
하지만 여기서 어정쩡하게 밀리면 안 된다.
강의 집에서 그렇게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내놓고, 이렇게 쉽게 물러서 버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안 그런가?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대표는 손쉽게 구워삶았겠지만, 적어도 강의 옆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간 하나가 붙어 있다는 것 정도는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나 이삼영. 쉬운 남자 아니다.
그렇게 되뇐 삼영이 벌떡 일어서서는 당당히 슬리퍼를 꿰찬 채 계단을 향해 걸었다.
“잠금장치가 허술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요.”
직접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전투적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중문을 내려다보곤 잠시 숨을 멈췄다.
분명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잠금장치의 나사가,
“어라……?”
보란 듯 헐거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그것을 응시하던 삼영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산이 물어왔다.
“어때요?”
“…….”
“잠금장치는 멀쩡하던가요?”
묻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건 핀잔에 가까웠다.
멀쩡할 리가 없지.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 라는 속뜻이 담긴.
민망해진 그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멋쩍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산을 지나쳐 평상 위에 앉았다.
“오셨으니 일단…… 앉으시죠.”
그에 싱긋 미소 지은 산이 평상 위에 묵직한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삼영은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움찔거리다 이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빈손으로 오긴 좀 그래서요.”
웬 한자가 적혀 있어?
“명품 한…….”
커다랗게 적힌 名品이라는 글자를 읽은 그가 침침한 눈을 몇 번 끔뻑대다 이내 기함했다.
“하, 한우?!”
경계심 가득하던 삼영의 얼굴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삽시간에 풀어진 순간이었다.
이게 뭐야.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소고기를 사 왔다고?
그것도 한우를?
내장 골고루 섞은 순대랑 떡볶이 소스에 버무린 튀김이 아니라, 정말로 한우를?
오늘이 만우절인가?
명절이야?
아니면 내 생일?
표정 관리에 실패한 그가 튀어 오르듯 일어나 포장을 뜯었다.
“……!”
족히 50만 원은 될 것 같은 한우가 부위별로 나란히 줄 서 있었다.
최고급 살치살을 겹겹이 포개 만든 한우 장미의 영롱한 자태를 마주했을 땐 그만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빛보다 빠른 태세 전환이다.
“아이고! 뭘 이런 걸 사 와요?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삼영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귀빈 모시듯 산을 대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거 집이 누추해서 어쩌나. 유자차 좋아해요?”
“아무거나 잘 마십니다.”
“아유, 이슬만 먹고 자란 귀공자처럼 생겨서 소탈하기도 하지.”
잠깐만 기다려보라며 일어선 그가 금세 장미가 그려진 싸구려 커피잔에 유자차를 타왔다.
“감사합니다.”
“어때요? 향이 아주 진하죠? 그거 내가 직접 담근 거예요!”
“정말요? 솜씨가 좋으시네요.”
“하하! 쑥스럽지만, 손맛은 타고났달까? 오죽하면 우리 대표님도 내가 타준 커피 아니면 마시질 못합니다.”
삼영의 주접에 너그럽게 웃어준 산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어쩜.
그의 손에 있으니 다이따에서 산 2천 원짜리 장미 컵도 프랑스 왕실에서 대대로 내려온 찻잔이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하얗게 올라오는 차의 김이 해무처럼 그의 얼굴에 번졌을 땐,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소고기 때문이 아니다.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귀티 나는 건 귀티 나는 거니까.
나 이삼영. 인정할 땐 인정하는 쿨한 남자.
한우 세트에 경계심이 풀린 삼영은 그렇게 자위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다.
“근데 뭐 때문에 왔다고 했죠?”
그의 질문에 산이 느릿하게 시선을 굴렸다.
“인사차 왔습니다.”
우아하게 벌어지는 입술이 최면이라도 걸듯 삼영의 귓가에 나른한 음성을 흘려 넣었다.
“자주 보게 될 테니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
“잘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공간에 초겨울의 한기 같은 바람이 스쳐 갔다.
달무리처럼 번진 안개가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풍경에 번져 들었다.
멍하니 그의 눈과 입술을 바라보던 삼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을 향해 다가온 구름이 빛을 가리기 직전.
까만 흑요석 같던 산의 눈에 묽은 포도주 빛깔을 떠올리게 하는 이체가 맴돌았다.
그러다 구름에 완전히 가려진 달이 다시 드러났을 땐, 어둑한 새벽의 숲처럼 검푸르게 빛났다.
핏빛처럼 붉고, 새벽처럼 짙푸른.
사람의 것이라기엔 묘하게 이질적인 그 눈빛이 빛에 따라 다른 색을 드러내며 시선을 묶었다.
“우리, 잘 지낼 수 있겠죠?”
그가 묻자, 삼영이 반쯤 풀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
“우린 둘도 없는 최고의 파트너가 될 겁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
.
.
산이 다녀간 그날 이후.
강은 단 한 번도 숙면에 들지 못한 채 며칠을 흘려보냈다.
모습을 감춰버린 남자가 다시 자신을 위해 꿈에 나와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버틸 만큼 버텼고, 얕은 잠이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의식이 멀어질 때면,
“아아악!”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그 끔찍하고, 탐욕스러운 어둠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킨 채 게걸스럽게 영혼을 먹어 치웠다.
발끝으로 조금씩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풀처럼.
당신이 없던 시간을 나는 어떻게 버텨왔을까.
원점으로 돌아온 삶은 그렇게 매일 엉망이 되어갔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을까요?’
‘글쎄요.’
‘…….’
‘나는 서강 씨를 TV에서 본 기억밖에 없는데.’
제대로 시도조차 못 해보고 끝난 대화는 여전히 미련처럼 남아 귓가를 맴돌았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길 벌써 몇 번째.
산이 남기고 간 번호를 보며 다시 연락해볼까도 싶었지만, 곧 포기했다.
“관두자.”
만약 이 모든 게 자신의 망상이었다면, 그에게 자신은 그저 정신 나간 의뢰인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각인처럼 박힌 열한 개의 숫자를 애써 지우며 액정 위에 인터넷 창을 띄웠다.
회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강의 SNS 계정이 얼마 전 업로드됐다.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는 근황과 신중히 차기작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소식을 퍼 나르기 시작했고, 연예면은 곧 그녀의 복귀설로 도배됐다.
그중 하나를 클릭한 강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회사에서 SNS를 통해 올린 제 사진이 기사에 그대로 실려 있었다.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사진 속 제 얼굴이 낯설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거울 속엔 며칠째 잠을 못 자 푸석해진 얼굴이 있었다.
위이잉 -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소음만이 적막으로 가득 찬 주방을 울렸다.
강은 언제나처럼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리고, 약을 삼키듯 그것을 마신 채 밤을 맞이했다.
.
.
.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자는 둥 마는 둥 새벽 내내 뒤척이던 그녀는 간신히 침대를 벗어났다.
카펫 위로 내디딘 발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무기력함을 겨우 떨쳐내고 집을 나섰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서늘했다.
쉬는 사이에 변해버린 계절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밴의 문을 열자 우렁찬 삼영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좋은 아침!”
공백이 무색할 만큼 평소와 같은 인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강의 신경을 앗아간 인물은 따로 있었다.
몇 날 며칠, 온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잘 잤어요?”
바로 그 한산.
뒷좌석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나긋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해사하기 그지없었다.
적잖이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강의 표정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졌다.
잘 잤냐고?
아니. 못 잤어.
당신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속으로만 대답하며 차에 올랐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산아. 나 커피 사러 갈 건데, 아메리카노 마시니?”
“네.”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게.”
“제가 사 올게요.”
“아니야, 아니야. 형이 사 올게.”
둘의 대화를 들은 강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난데없이 사근사근해진 말투와 낯간지러운 호칭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두 남자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기류를 분명히 기억하는데 말이다.
말은 또 언제 놓은 거야?
그녀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차는 늘 가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삼영이 커피를 사기 위해 차에서 내리자, 강이 곧장 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요?”
“둘이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 아니었잖아요.”
눈길도 주지 않고 답하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아. 그거.”
턱을 비스듬히 괸 채 혼잣말하던 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따로 한번 만났어요.”
“…….”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대답을 들었지만, 찜찜함만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된 회사 사람들과도 여전히 상호 공대하는 사람이 삼영이었다.
게다가 그가 산에게 의도치 않게 날을 세웠던 것도 기억했다.
그러니 ‘친해지려고 따로 한번 만났다.’라는 남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따를 수밖에.
“혹시 찾아가서 협박이라도 했어요? 거슬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녀의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산이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서강과 이삼영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굉장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 중인 것 같았다.
“대표님도 그렇고, 삼영 오빠도 그렇고. 둘 다 그렇게 쉽게 구워삶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당신한테만큼은 이상할 만큼 모든 게 쉬워.”
“…….”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마치 취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강의 추궁에도 산은 들으라는 듯 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홀렸나 보지.”
무심히 흘러나온 말에 놀란 그녀의 시선이 도로 그를 향했다.
태평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산은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잔잔히 웃었다.
제 대답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이.
그래서인지 강은 조금 전 흘러나온 그의 대답이 전혀 농담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터무니없는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홀렸나 보지.’
그 어이없는 말이 너무나도 신빙성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