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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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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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놈 목소리
2022.05.22.
“홀렸나 보지.”
그 말에 강은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남자에게 답을 얻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때마침 커피를 사러 갔던 삼영이 다시 돌아왔다.
세 사람 몫의 커피를 가지고 돌아온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며 밝게 말했다.
“자 여기 강산이들 커피.”
“……누구?”
“우리 강이랑 산이. 히히.”
그새 둘을 묶어 해괴한 애칭을 만든 삼영이 잇몸을 만개하며 웃었다.
강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이, 바깥쪽에 앉아 있던 산이 커피를 받아 한 잔을 그녀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삼영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잘 마실게요.”
“그래.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웃으며 문을 닫으려던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나란히 앉아 있는 강과 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삼영의 모습에, 그녀는 괜히 또 불안해졌다.
뭐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가 감탄을 뱉어냈다.
“이야. 이렇게 놓고 보니까 꼭 내가 연예인 둘 데리고 다니는 거 같다. 그림이 따로 없네.”
저 팔불출!
하루 이틀 겪는 일은 아니지만, 한산이랑 세트로 묶여 저런 소리를 듣자니 손발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든 말든 혼자 만족한 삼영은 휘파람까지 불며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강은 그가 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추궁을 시작했다.
“오빠.”
“응?”
“솔직히 말해봐. 둘이 무슨 일 있었지?”
“일? 무슨 일?”
“한산 씨랑 따로 만났었다며.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그녀의 질문에 삼영이 크게 웃더니 말했다.
“내 약점 잡을 만한 사람은 집주인 아줌마밖에 없어.”
“그럼 어떻게 갑자기 친해진 건데?”
“아아. 산이가 우리 집 놀러 왔었어.”
“쳐들어온 거 아니고?”
그녀가 되물은 말에 그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있던 산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실소했다.
아무래도 서강은 옆에 제가 버젓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게 분명해 보였다.
“말도 마. 무려, 한우를 사 왔더라니까?”
삼영은 그날 밤 산과 한우에 유자차를 나눠마시며 의형제를 맺었노라 말했다.
잘생긴 놈들은 다 얼굴값 하느라 재수 없는 줄만 알았는데, 그와는 왠지 호형호제하며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뭐야, 그게. 결국 소고기에 넘어갔다는 얘기네?”
“오빠는 소고기를 본 게 아니야. 산이의 예쁜 마음을 본 거지.”
산이의 예쁜 마음이라는 말에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산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따로 한번 만났다.’라는 제 입장을 거듭 표하듯.
삼영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강아. 너는 걱정 하지 마. 앞으로 산이랑 나랑 너 잘 보필할게.”
그러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굳이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지? 친구 하면 되겠다.”
“됐어! 안지 얼마나 됐다고 친구를 해?”
“왜. 외로운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지.”
“누가 외롭대?!”
저도 모르게 빽 언성을 높이곤 고개를 돌렸다.
혼자 심각한 저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삼영은 마냥 사람 좋은 얼굴로 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듣고 있으면서도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너무나…….
너무나 평소답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두쇠인 황 대표가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넘어갔던 것보다, 삼영이 선뜻 산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납득가지 않았다.
하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어딘가 억지스럽거나, 불편한 기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헤벌쭉한 얼굴로 산에게 커피를 내밀던 얼굴을 떠올리니 재차 그편이 확실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컵에 입술을 묻고 커피를 홀짝이는데, 삼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산아.”
“네.”
“생각해보니까 너 어제저녁도 굶고 내내 빈속이었다며. 커피 마셔도 괜찮아?”
“괜찮아요.”
강은 여전히 창 너머 풍경에 시선을 고정해둔 상태였지만, 귀는 두 남자의 대화를 향해 쫑긋 서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굶었다’라는 말이 묘하게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그가 재차 물었다.
“숍 근처에 샌드위치 맛있게 하는 곳 있는데, 이따 먹을래?”
“아니요.”
웃는 낯으로 돌아온 대쪽 같은 거절에 삼영은 짐짓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너 입맛 되게 까다롭구나?”
산은 말을 아끼는 대신 조금 웃었다.
“편식해?”
“먹는 건 취향이 확고한 편이라서요.”
“뭐 좋아하는데? 나 요리 잘해.”
삼영의 질문에 그는 느긋하게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정적을 즐겼다.
뭘 좋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꽤 고심해서 답을 고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창틀에 팔꿈치를 댄 채 가볍게 턱을 괸 산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강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실 좋아하는 음식이 하나 있긴 한데.”
“…….”
“근래 그걸 먹을 기회가 없었어요.”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입맛만 까다로워져서요.”
“…….”
“뭘 먹어도 만족이 안 되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저 평범한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건지.
그가 하는 이야기가 음식에 관한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을까?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그 음식이 뭔데.”
삼영이 답을 재촉했지만, 산은 끝끝내 말을 아끼며 뜻 모를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동시에 강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늘 제 꿈에 나타나 속삭이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너의 꿈을 먹고 싶어.’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근래 좋아하는 걸 먹지 못했다던 그의 말이,
“…….”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묶여 있던 시선을 끊어낸 강은 서둘러 창문을 조금 열었다.
“강아. 더워?”
“아니, 그냥.”
삼영이 물은 말에 그녀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더운 뺨을 어루만지곤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시선은 밖을 향해 있었지만, 온 신경은 이미 등 뒤로 쏠려 있었다.
그런 속사정 따위 알 리 없는 삼영만 신이 나 떠들어 댔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같이 한번 먹으러 가자.”
“뭐를요?”
“뭐긴 뭐야. 네가 좋아한다는 그 음식 말이야.”
그의 말에 산은 조금 웃었다.
“남이랑 나눠 먹을 만한 건 아니에요.”
“에이.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거지, 못 나눠 먹을 건 또 뭐 있어.”
“혼자 먹을 때 제일 맛있거든요. 그게 딱히…… 형 취향도 아닐 것 같고.”
“왜? 날음식이야? 난 육지 고기가 더 취향인데.”
날음식이라.
뭐, 굳이 정의하자면 날음식에 가까울 테니.
“네.”
그렇다고 답해도 무리는 없지.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쯤에서 대화를 갈무리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나중에 형 좋아하는 고기나 먹으러 가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야, 너는 왜 자꾸 먹을 걸로 사람 꾀고 그러냐? 마음 약해지게.”
홀랑 넘어간 삼영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차가 한강 다리 위를 건널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도 잠은 밀려왔다.
그녀는 눈꺼풀에 돌이라도 올려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참 정직한 몸이 아닐 수 없다.
“졸리면 좀 자지 그래요?”
산의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깨우며 날아들었다.
강은 여전히 창문에 머리를 댄 채 시선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자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왜요?”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
“근래 좀 괜찮나 싶었는데, 요 며칠 어찌나 호되게 당했는지.”
왜냐고 묻는 무구한 얼굴 위로 그녀가 뼈있는 말을 던졌다.
관련이 있다면 분명 작은 동요라도 보일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표정으로 안타까워했다.
“저런.”
마치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흔하지도 않은 저 얼굴이 꿈과 현실에 따로 존재할 확률은 얼마나 되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삼영이 끼어들었다.
“정말이야?”
“뭐가?”
“근래 좀 괜찮았다는 거. 정말 악몽 안 꾸고 잤나 싶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의 반응에 강이 대답했다.
“안 꾼 건 아닌데, 금방 깼어. 덕분에 잠 좀 자나 했지.”
“진짜야?”
“응. 꿈에 누가 자꾸 나오는데.”
“…….”
“그 사람이 늘 꿈에서 깨도록 도와줬거든.”
그러고 나면 그 이후엔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는 그녀의 대답에 삼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누군데?”
그의 말에 강은 한 번 더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힘을 실어 답했다.
“있어.”
“…….”
“내 편인지 아닌지 모를 수상한 사람.”
풉.
말과 동시에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손으로 입을 반쯤 가린 채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당장이라도 정체가 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꿎은 입술만 깨물던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저 멀리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도로엔 차가 가득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한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사고’ 말인데요.”
사고라는 단어에 삼영과 강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두 사람에겐 저도 모르게 반응할 만큼 예민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이유로 고용된 당사자가 그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그는 둘의 반응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물어왔다.
“좀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 얘기라면 대표님한테 이미 들으신 걸로 아는데요.”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잘라 말했지만, 역시나 적당히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표님이 당사자는 아니죠. 하물며 직접 목격한 사람도 아니었고.”
아니, 그는 외려 낱낱이 파헤칠 준비라도 된 사람처럼 굴었다.
반박할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의 일이 언급된 순간, 기억은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원래 잊고 싶은 과거는 더욱 선명한 상흔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섬찟한 목소리는 여전히 뇌리에 박혀 있었다.
‘너한테서는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 그러니까 한입만…… 제발 한입만 먹게 해줘.’
살갗을 파고든 총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