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산
(10/118)
10.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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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산
2022.06.02.
넓은 복도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는 한동안 못 박힌 듯 자리를 지켰다.
‘잘 자요.’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미친 소리에 그저 웃어주던 산의 얼굴이 잔상처럼 맴돈다.
아마도 그는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지만,
“진실은 늘 밝혀지니까.”
적어도 산이 자신과 엮인 이상,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그의 정체든. 아니면 우리 사이에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든.
강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걸음을 돌렸다.
대리석 위로 내디딘 구두가 묵직한 울림을 내며 점점 사그라졌다.
도어록이 해제되고 육중한 문이 열리자, 집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적막이 그녀를 반겼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마저도 썩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던 묵은 피로가 사라진 몸이 무척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30분도 채 안 잔 것 같은데, 이렇게 개운하다니.”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강은 한층 부드러워진 어깨를 주물렀다.
수면의 질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오랜만에 느긋한 목욕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입욕제를 잔뜩 푼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풍성한 거품으로 채워진 욕실 안에서 짙은 장미 향이 퍼져나갔다.
긴장이 풀린 몸이 금방이라도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노곤함을 즐기던 강은 거치대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별생각 없이 인터넷을 둘러보는 중에 문득 얼마 전 서점에서 봤던 책이 떠올랐다.
『당신이 모르는 꿈에 관하여』
기억에 선명히 박혔지만, 어디에도 흔적이 없던 그 책.
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책의 제목을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어?”
그때는 나오지 않던 포스팅 하나가 보란 듯이 나왔다.
당신이 모르는 꿈에 관하여, 라는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형식이었다.
그녀는 끌리듯 제목을 클릭했다.
시작은 무척 담백했다. 아니, 싱거울 정도였다.
그 흔한 인사치레도, 작은 이모티콘이나 스티커도 없는 글.
반듯하고도 정갈한 문체는 어쩐지 조금 딱딱한 느낌마저 들었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리니 책 일부를 그대로 찍어 옮긴 듯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몽마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악몽을 꿀 때 느끼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태초에 그들은 땅 아래 깊은 곳에서 태어났으며, 언제나 인간과 함께 공존해왔다.
강은 글자 하나하나를 눈에 박아넣듯 온 신경을 집중해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또한 천인들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인간의 꿈(길몽, 흉몽, 예지몽, 태몽을 비롯한 모든 꿈)을 관장한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함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인의 흉몽과 몽마의 악몽은 확연히 다른 영역이다. 꿈의 결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것을 심어놓는 이들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책에 적힌 장황하고 추상적인 이론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다시 말해, 꿈에 관여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
인간에게 악몽을 꾸게 하고, 악몽을 꾸는 순간 느끼는 공포심을 잡아먹는 존재가 ‘몽마’이며.
역시 인간에게 꿈을 꾸게 하지만, 그저 인간이 꾸는 다양한 형태의 꿈을 관장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존재한다는 또 다른 무리를 ‘천인’이라 부른다고.
시선을 내리니 말미에 작은 별 표시와 함께 천인이란 하늘의 일을 도맡아 하는 신의 사자를 뜻한다는 짤막한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머릿속에 불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퍼즐을 맞춰가듯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게 터무니없는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을 숱하게 겪는 중이고, 무엇보다 20년 전 사고를 겪었던 그 날.
죽음의 끝에서 만났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하니까.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될 거야. 그래도 살고 싶니?”
“좋아. 네게 20년을 벌어주마. 부디 그때까지 죽지 말고 견뎌다오.”
눈물이 나올 것처럼 다정했던 여자의 목소리와 다소 서늘하게 느껴졌던 남자의 낮고 느린 목소리.
그것은 꿈도 아니었고, 환청을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말처럼 매일 악몽을 꾸면서도, 남자의 말처럼 20년 동안이나 악착같이 살아내는 중이니까.
그리고 그가 벌어주겠다던 20년이라는 시간.
그 끝에 기적처럼 한산을 만났다.
그러니 어떻게 이 모든 게 우연일 수가 있겠나.
꽤 오래 상념에 잠긴 사이 휴대폰 액정이 꺼졌다.
화면에 빛을 밝히고 나니, 액정에는 인터넷 창이 아닌 대기 화면이 뜬 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인터넷 창을 켜고 검색해봤지만, 방금 본 포스팅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처음 책을 발견했던 그때와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는 통에 이제 이런 일쯤은 감흥도 없었다.
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조에 담긴 물을 손바닥에 모아 얼굴을 적셨다.
식어버린 물이 몽롱하던 정신을 일깨워줬지만, 글을 읽고 떠오른 의문은 여전히 머리를 맴돌았다.
한산.
바로 그 남자의 존재였다.
불과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당신은 둘 중 어느 쪽이야?”
산의 정체에 관해 묻고 싶었던 질문이 조금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것.
욕조를 빠져나온 그녀는 시원한 물로 몸을 씻은 뒤, 욕실을 나왔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로 향한 강은 작은 조명 하나만 켜둔 채 몸을 누였다.
언제나 그랬듯 두려웠지만, 언제나 그랬듯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남은 건 곧 모든 게 명확해질 일을 맞이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오늘은 나타나 주려나.”
혼잣말 뒤로 다정하게 인사하던 목소리가 멀어진다.
‘잘 자요.’
그렇게 그녀는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긴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시야가 점멸하고, 밀도 높은 압박감이 몸을 휘감으며 강을 깊은 수면의 바다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팟!
마침내 모든 빛을 삼킨 적막의 벽 너머로 신경을 긁어내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왔다.
……끼이익.
희미한 바퀴의 마찰음.
곧바로 이어진 누군가의 비명.
“꺄아악!”
도로를 미끄러지던 익숙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강을 반겼다.
세상이 뒤집히고, 부서지며, 깨지던 주변의 모든 것들.
일곱 살의 기억인데, 여전히 선명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는 또다시 공포에 집어삼켜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목 끝까지 차오른 절망이 눈물과 함께 삐져나왔다.
“흐윽…….”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있던 양부모는 피범벅이 된 채 미동도 없었다.
그 모습이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다가왔다.
또 어떤 끔찍한 장면이 이어질지 모르지만, 눈을 감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내 의식을 잃고 뒤집혀 있던 두 쌍의 눈동자가 휘리릭 돌아 강에게 향했다.
“아아악!”
극도의 공포감에 울부짖었지만, 벨트에 꽁꽁 묶인 몸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우리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네가 죽었어야 맞는데…….”
양부모의 목소리가 칠판을 긁는 마찰음처럼 소름 끼치게 고막을 긁어내렸다.
눈을 감아도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보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저리 가! 사라지란 말이야!”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그 순간이었다.
몸이 쑤욱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며,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악!”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해내던 강이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벌떡 상체를 세워 일어난 그녀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잠들기 직전의 풍경 그대로였다.
공포가 채 사라지지 못한 온몸의 모든 감각과 세포가 날뛰었다.
땀으로 뒤범벅된 피부에 묵직한 숨이 내려앉았다.
“흣…… 하아!”
하아, 하아아.
깨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막혔던 숨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가위에 눌려있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습한 공기와 살갗에 달라붙는 끈적한 공기가 어딘가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랄까.
뭔가 이상했다.
분명 꿈에서 깼을 텐데.
“…….”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직 꿈에서 완전히 깨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가장 편안해야 할 장소가 악몽에 나온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곧 현실이 되었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잔뜩 기민해진 몸은 다시 긴장 상태에 돌입한 채 뻣뻣하게 굳어오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의 공포가 시작될지 모른다.
썩은 뼈다귀에 갑자기 발목이 잡혀 끌려들어 갈지도, 소름 끼치는 손톱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지도, 땅 밑이 꺼지거나, 투박한 손길에 목이 잡힌 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지 모를 일이었다.
“……싫어.”
겁에 질린 강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흘러나왔다.
“……살려주세요.”
언제까지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간절히 애원했다.
꿈속에서 먼저 그를 인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의 절박함은 곧 남자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이때쯤이면 늘 나타나 저를 향해 손 내밀던 모습이 그려졌다.
이리 와. 내가 구해줄게.
말만 하지 말고 제발.
“……도와줘.”
나타나란 말이야.
실체를 드러내라고.
꿈속에서 늘 듣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간절히 산을 불렀다.
마지막 만남을 되짚던 기억이 엘리베이터에서 그가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을 불러요.
당신이 부르면 난 올 수밖에 없으니까.
한산, 한산, 한산.
터져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절박하게 입안에서 맴돌았다.
적막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악몽은 곧 예고도 없이 이어졌다.
쿠구구구!
지진이 나는 듯한 울림과 함께 천장에 블랙홀 같은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어둠을 비집고 나온 새빨갛고 커다란 눈이 자신을 응시했다.
제 얼굴을 감싸 쥔 강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산!”
제 악몽을 지배했던 이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커다란 창문이 차례대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터져나간 유리창이 박살 나며 어마어마한 파열음을 냈다.
와장창창창!
사방으로 튀는 파편에 집은 순식간에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에 귀를 막고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소리쳤지만, 엄청난 굉음에 비명조차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
모든 게 멈추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유리 파편과 집기들이 공중에 뜬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고, 시간이 정지했다.
적막감에 눈을 뜬 그녀가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전쟁통을 연상시키는 집안의 모든 풍경에 스톱 버튼이 눌린 듯 장면이 시야에 박제되었다.
강은 귀를 감싼 채, 커다래진 눈으로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이 시공간 속 유일하게 움직이는 한 남자를.
천천히 다가와 허리를 숙인 그가 소파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익숙한 미소와 체취가 공포심에 발악하던 몸을 차분히 눌러주는 걸 느끼며, 동시에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왜.”
강은 간신히 한 글자를 토해내며 그대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꽉 막혀 있던 숨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희미한 목소리를 흘렸다.
“왜 이제 왔어.”
순순히 끌려와 준 산은 말없이 강을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여린 몸을 깊이 품은 채,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주었다.
기댈 곳이 생기니 마음이 외려 약해진 걸까?
“왜 이제 나타났냐고.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데.”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원망과 서러움과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눈물에 뒤섞여 마구 흘러내렸다.
산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런 강의 투정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한참이나 운 그녀가 안정을 찾자, 그가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시선이 얽혔고, 산은 가만히 강을 바라보다 곧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었다.
“강아.”
젖은 눈가를 훔치는 손길이,
“다 울었어?”
시리고도 뜨겁게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