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라고 바랐던
(11/118)
11. 바라고 바랐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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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라고 바랐던
2022.06.05.
“강아.”
“…….”
“다 울었어?”
강은 젖은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눈앞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몽롱했다.
물속에 잠긴 채 수면 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거두어가는 온기가 이토록 생생한데, 정신은 아직도 경계의 어딘가를 헤매는 것만 같았다.
눈앞의 그는 제 간절함이 불러온 환상인 걸까?
아니면 환상 같은 현실을 보고 있는 건가.
“이거…… 꿈이야?”
넋두리처럼 흘러나온 그녀의 물음에 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꿈이야.”
“…….”
“자고 나면 사라질.”
그가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소리 내자, 엉망으로 변해 있던 모든 것들이 곧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강은 반쯤 넋을 놓은 채,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산산이 조각났던 유리창과 깨진 집기, 이리저리 튄 파편들이 거짓말처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것을.
전쟁터 같던 공간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곳에 이질적으로 담겨 있는 산을 바라보며, 그녀는 모든 게 곧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돼.”
“…….”
“꿈에서 날 자각하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무리 없이 부를 수 있을 거야.”
손을 뻗은 그가 강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얌전히 산의 손길을 받아냈다.
그러다 그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상체를 바로 세웠을 때, 조용히 되물었다.
“부르기 전에 와줄 순 없는 거야?”
“…….”
“잠들기 전부터 그냥 같이 있어 주면 되잖아.”
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곤란하겠지.
현실과 꿈속의 자신을 분리해줬으면 하는 마음일 텐데, 제 요청을 들어주려면 정체부터 밝혀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꿈에서 당신이 했던 말을,
‘너의 꿈을 먹고 싶어.’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 꿈을 먹으러 오는 거지?”
원하는 걸 이룰 수만 있다면.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남기지 말고 전부 먹어줘.”
“…….”
“내가 어설프게 악몽을 꾸는 일 따위 없게.”
그가 인간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악몽을 없앨 수 있다는 걸 안 이상, 우리의 이해관계는 서로에게 필요한 건 내어주는 ‘거래’로 성립될 테니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산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샜다.
“남김없이 먹어달라고?”
그것은 한숨 같기도 했고, 웃음 같기도 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는 잠시 후, 꽤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왜? 그냥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나달라는…….”
“그러다 너까지 먹고 싶어지면?”
“…….”
“그때 가서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거야?”
느리지만 또박또박 박혀오는 목소리에 강은 몇 달 전 사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고에 대해 산이 뭐라고 했었는지도.
그는 분명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금기를 깨는 일보다 식욕을 참는 게 더 어려웠던 하급 잡귀가 너의 목숨을 노린 일’이라고.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 정체가 뭐냐고 물었지.”
한산의 정체는,
“인간은 나 같은 존재를 ‘몽마’라고 불러.”
“…….”
“나 역시 네 악몽을 원하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지.”
바로, 인간의 공포를 먹고 사는 존재였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 다가온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몽마는 본능에 충실한 존재라, 자제력 같은 건 잘 안 키워.”
그러니 먹고 싶은 것 앞에서 천지의 규칙을 깨는 일 정도는 일상에서 숨을 쉬는 일만큼이나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왜 네 꿈을 아껴먹는다고 생각해?”
서서히 내려온 산의 입술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귓가에 흘리듯 속삭였다.
“널 살려두기 위해서야.”
“…….”
“전부 먹어 치우려다 눈이라도 돌면 그땐 정말 끝이니까.”
그러니까 지내 온 대로 지내면 그만일 일이다.
어차피 꿈속의 너는 꿈속의 내가, 현실의 너는 현실의 내가 지킨다고 여기면 될 테니.
강은 그렇게 말하는 그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담담히 말했다.
“자제력이 필요 없었던 건.”
“…….”
“그만큼 네가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발코니로 향했다.
산은 제자리에 선 채 강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분명히 말했다.
“내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살게 해줘.”
원하는 건 확고했고,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를 만났으니, 어떻게든 얻어낼 생각이었다.
물론 물리적 힘으로 그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약점은 확실히 알았으니까.
“거부하면 피차 곤란해질 거야.”
한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적어도 그가 멋대로 꿈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할 유일한 방법.
“앞으로 내 꿈엔 발도 못 들이게 될 테니까.”
바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코니에 놓인 스툴을 밟고 올라섰다. 그러고는 난간 위에 오른 뒤 벽을 짚고 섰다.
매서운 바람이 당장이라도 저를 까마득한 아래로 끌어당길 것처럼 불어왔다.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덜덜 떨렸지만, 꿋꿋이 고개를 돌려 한산의 반응을 살폈다.
바람에 나부끼는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화가 난 거겠지.
하지만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몇 번이라도 해낼 용의가 있었다.
“내가 오늘까지 버텨온 건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앞으로도 영원히 없는 거라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겠지.”
“내려와. 장난치지 말고.”
“장난인 거 같아?”
“그럼 넌 내가 손 놓고 구경이나 하고 있을 것 같아?”
“네가 나 하나쯤 마음대로 하는 건 일도 아닐 거라는 거 알아. 넌 인간이 아니니까.”
“…….”
“하지만 이건 내 의지를 보이는 일이야. 내 꿈의 주권을 주장하는 일이고.”
죽을 것처럼 살아오던 숱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번에 내가 운이 좋아 살아난다면, 나는 매 순간 다시 나를 죽일 거야.”
내 심장에 칼을 꽂아서라도.
몇 번이고 몸을 던져서라고.
아무것도 안 된다면 굶어서라도.
“그러니까 너도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강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무감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며 그대로 몸을 던졌다.
후웅-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뒤집힌 세상이 빠르게 멀어졌다.
어느덧 난간 위로 올라선 산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가속도가 붙은 몸이 벌써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몸이 지면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코앞까지 당도한 순간.
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 한 조각이 번졌다.
내내 지켜만 보고 있던 그의 발이 미련 없이 난간에서 멀어진 것도 그때였다.
내리꽂히듯 추락하던 산의 손이 땅보다 먼저 강에게 닿았다.
터억!
단단한 두 팔이 여린 몸을 안정감 있게 받쳐 들었고, 그녀는 중력을 거스른 그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 냄새.’
동시에 꿈에서 그에게 안길 때마다 희미하게 느꼈던 바람 냄새가 온몸에 퍼져나갔다.
천천히 눈을 뜬 강이 시선을 들었고, 어두운 밤만큼이나 짙고 고요한 눈동자가 강을 마주했다.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는데, 짤막한 한 마디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겁도 없이.”
“…….”
“목숨이 꽤 여러 갠가 보지?”
그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돌아온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실낱같은 숨을 뱉었다.
“이제 부탁을 들어줄 의향이 좀 생겼어?”
제 어깨를 잡은 손끝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어온 떨림을 느끼며 산도 짧게 웃었다.
“그래. 이게 네 각오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어.”
어쩌면 이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 없이도 견뎌왔던 너의 시간이 새하얗게 지워지도록, 이제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
설령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내 존재가 뭐든 너는 정말로 아랑곳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나는 그걸 기다렸던 거다.
“다 알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네 의지를 드러내거나 나를 협박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부드러운 미소가 상냥한 압박을 가해온다.
“네가 죽으면.”
“…….”
“내가 오랫동안 바라고 염원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거든.”
목적이 사라지는 건 제게 인간의 물리적 죽음과도 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살아.”
산은 담백하게 부탁했다.
서강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인물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기에.
* * *
침실로 돌아온 후.
산은 비틀거리는 강을 부축해 그녀가 침대에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도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내리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강은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몸을 연신 떨어댔다.
창백하게 식어버린 손끝에 스민 공포가 고스란히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뼈밖에 없는 가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물어온다.
“근래엔 왜 안 나타난 거야?”
여전히 눈가가 젖어있는 강의 얼굴을 무연히 바라보며 산이 대답했다.
“바빴어. 네 주변에 알짱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씩 찾아내느라.”
꿈을 못 먹어 아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강이 꾸는 악몽과 그녀가 시달리며 내뱉는 숨은 끊기엔 너무 아쉬운 것들이었으니까.
지금도 허기와 갈증 때문에 애가 닳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눈앞의 여자를 통째로 삼키고 싶기도, 아끼며 천천히 녹여 먹고 싶기도 했다.
산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놀란 강이 질끈 눈을 감자, 눈가에 고여있던 물기가 촘촘한 속눈썹 사이사이로 젖어 들었다.
그는 폭발할 듯한 욕망을 누르며 고개를 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열기 어린 입술이 닿았다.
그렇게 산은 그녀의 눈가에 남아 있던 눈물 한 방울을 받아 마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새벽 첫 이슬처럼 순결하고, 고귀한 물기 안에 정신이 나가버릴 듯 달콤한 공포심이 녹아 있었다.
고작 눈물 한 방울인데, 짧은 전율이 흐를 만큼 역시 넌.
“미치겠다.”
너무 맛있어.
제 손을 꽉 움켜잡는 힘에 서강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미식가처럼 그녀의 공포를 음미하던 산은 꾹 참듯 인내하며 멀어졌다.
강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아마 매일 밤 이래야 할 거다.
식후에 사탕 하나 까먹는 일처럼 간단하던 일이 앞으로는 전혀 달라질 거란 얘기다.
아마 참을성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한 움큼 쥐여주고 반나절을 기다렸다가 딱 한 개만 까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겠지.
“하.”
돌아버리겠네,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성큼 다가와 눈을 빛냈다.
“한산.”
“왜.”
“지금 한번 해볼래?”
“뭐를.”
“내 꿈 먹고 싶다며. 지금 한번 먹어봐.”
서강이 처음 보는 얼굴로 웃는다.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남의 속이,
“…….”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