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냥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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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냥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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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냥의 시간
2022.06.12.
“맛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스타일리스트 중에 유독 단 걸 좋아하던 직원이 있었다.
달콤한 게 나라를 구한다던 그녀의 말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그 뜻을 알 것도 같았다.
강은 생생하게 반응하는 미각의 변화에 감탄하며 연신 스무디를 떠먹었다.
입맛이 없던 건 둘째치고, 멀미 때문에 차에서는 음식 냄새도 못 먹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오간 데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먹다 보니 금세 커다란 라지 사이즈 컵 하나가 깔끔히 비워졌다.
“아……, 이거 몇 칼로리지?”
생전 해본 적 없던 칼로리 걱정을 하는 날이 다 온다.
삼영도 저걸 다 비울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지, 텅텅 빈 플라스틱 컵을 보며 기겁을 했다.
어, 어쩌지. 황 대표가 알면 난리 칠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주차장에 익숙한 세단 하나가 들어온다.
양반은 못 되는 황 대표의 차였다.
강이 탄 밴을 알아본 그가 냉큼 그 옆에 주차했다.
“여어! 우리 서강이!”
주차장이 떠나가라 껄껄대던 대표가 반가운 얼굴로 차 문을 열어젖혔다.
어쩔 겨를도 없던 그녀는 놀라서 컵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삼영은 사색이 되었다.
“다들 이제 온 거야? 오늘은 그냥 회사 미팅만 하는 거라 이렇게 일찍 안 와도 되는…….”
침을 튀겨가며 말하던 황 대표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뭐야, 이 살 디룩디룩 찔 것 같은 음료수 컵은?”
솥뚜껑 같은 손을 뻗은 그가 온갖 시럽과 토핑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스무디 컵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눈초리가 그녀를 향했다.
“강아. 너 설마 이거 먹은 거 아니지?”
놀란 삼영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 저기…… 그게 아니고요, 대표님.”
대표의 뾰족한 눈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향했다.
“니가 먹었냐?”
“…….”
“다이어트가 숙명인 여배우한테 이딴 걸 사다 바친 머저리였나 했더니, 더한 놈이었네?”
“죄, 죄송합.”
“어디서 감히 매니저 나부랭이가 배우도 못 먹는 걸 처먹어! 어?”
이때다 싶어진 그가 폭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대가리는 장식이냐? 뇌 대신 우동 사리가 들었어?”
“대표님.”
보다 못한 강이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던 산이 살짝 손을 뻗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대표에게 덤덤히 고했다.
“제가 먹었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아침부터 황 대표의 가래 낀 목소리를 1분 이상 들어줄 여유가 없었을 뿐.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한 실장이 먹었다고?”
“네. 제가 먹었습니다.”
“정말이야?”
“네.”
민망한 정적이 흐른다.
“아이고, 이것 참……. 에스프레소만 마실 것처럼 생겨서, 단 거 좋아하는 줄은 또 몰랐네.”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려던 걸 들킨 기분이라 그는 괜히 말이 많아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강이 옆에서 이런 거 먹는 건 좀 자제해줘. 여배우는 다이어트가 일상인데, 옆에서 이런 거 먹고 그러면 아무래도 곤욕이지 않겠어?”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우리 서로 배려 좀 하면서 살자고.”
황 대표가 두꺼운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산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되묻는 황 대표의 말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표의 입술 옆을 가리켰다.
“여기.”
“…….”
“크림 묻었어요.”
풉!
뒤에 있던 삼영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여기서 웃은 거 걸리면 제삿날이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그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러는 동안 강은 뻔뻔한 대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얼굴이 새빨개진 그가 헛기침을 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아! 이, 이거 치약이야. 치약! 하하! 우리 한 실장이 오해했구나! 하하하!”
“아니요. 이건 누가 봐도 크림…….”
“어이쿠! 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 가자고! 하하하!”
서둘러 자리를 뜨는 대표의 뒤를 산이 묵묵히 따랐다.
차에 남아 있던 강과 삼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뭉클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강아.”
“응?”
“너 산이 전화번호 뭐라고 저장되어 있어?”
“한산.”
“나도 한산이라고 저장되어 있었거든?”
“근데?”
“오늘부로 바꿀 거야.”
이 아저씨가 또 무슨 주접을 떨려고 드릉드릉 시동을 거나 싶었지만, 저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순 없었다.
“……뭐라고 바꿀 건데?”
못 이긴 척 물어봐 준 말에, 삼영이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백마 탄 왕자님.”
“…….”
“아니면 영이의 수호천사도 괜찮을 거 같구.”
“영이는 설마…… 삼영이의 영이야?”
“응.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둘 다 후져. 정신 차려.”
그녀가 냉정히 일갈하며 돌아섰다.
.
.
.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아두라고 명한 대표의 엄포에 사무실에 쌓인 기획서며 대본이 가득했다.
한참 바빠야 할 시기에 본의 아니게 공백기를 가지다 보니, 일이 이만큼이나 쌓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언제 저걸 다 들여다보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말한 순서대로 정리해뒀어?”
대표가 회사 직원 하나를 들들 볶듯 물었다.
“네. 대표님. 당부하신 대로…… 정리해뒀습니다.”
보나 마나 빤했다.
작품성이고, 이미지고 일단 돈 되는 일부터 줄 세워 놨겠지.
하지만 뜻이 맞지 않다면 호락호락 대표의 뜻대로 일을 진행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입지가 굳어진 탓에, 그도 배우 본인의 동의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미팅 시작하죠.”
그녀가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회사를 나섰다.
회의를 거쳐 1차로 추려낸 대본 몇 개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레이나 화보 촬영 있는 거 알지? 새벽에 나와야 하니까, 일찍 자.”
“알겠어. 내일 봐, 오빠.”
“그래. 산이도 조심히 들어가. 오늘 고생 많았어.”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을 내려준 삼영이 손을 흔들며 떠났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강은 자신의 층수를 누르고 바로 위에 버튼도 같이 눌러주었다.
버튼을 누르려다 만 산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강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갑자기 뭐가?”
“어제 제대로 못 잤으면, 이 시간까지 절대 못 버텼을 거야.”
“…….”
“네 덕분이야.”
아무리 공생관계라지만, 어쨌든 그녀 입장은 내어줘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걸 내어주고, 돈으로도 못 살 걸 얻어가는 셈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저로 인해 어떤 이익을 취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에게 고마움이 컸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산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건 네 꿈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몰라서 하는 얘기야.”
“그래, 몰라. 나는 인간이니까.”
“…….”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아.”
짧은 미소를 덧그린 그녀가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아니라는 거.”
자신의 꿈을 먹어 ‘없앨’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산이 유일하다는 걸 안다.
그가 자신의 희망이 된 이유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산의 반응은 건조했다.
“글쎄.”
과연 네가 모든 걸 다 알게 되더라도 그렇게 말해줄까?
당연히 뒷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강에게 특별해져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는 산을 보며 강도 더 이상 꿈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 자신보다 더한 악몽을 꾸는 사람이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건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혹시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잠시 말이 없어진 공간.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가 그녀가 사는 층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기 직전, 강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
“오늘도 잘 부탁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싱긋 웃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 후에 와주면 될 것 같아. 괜찮지?”
“뜻대로.”
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제야 강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릴 수 있었다.
그녀가 뒤돌아 인사했다.
“좀 이따 봐.”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애인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라, 재미있었다.
요즘 인간들 말로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지.
서강에게는 그만큼 악몽을 꾸지 않게 된 현실이 고마웠을 것이다.
산은 그 마음이 제게 유용한 도구로 쓰일 것임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기꺼이 이용해줄 생각이었다.
옅은 미소를 띤 그가 다시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을 눌렀다.
빈속으로 갔다가 어제처럼 호되게 당할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래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로등 불빛이 점멸하는 골목이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등진 채 펼쳐졌다.
그의 눈이 희미한 붉은 빛을 띠며 악몽을 감지하기 위한 모든 감각이 기민해지기 시작했다.
스산한 기운이 골목마다 내려앉았고, 산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집으로 돌아온 강은 목욕을 마친 뒤, 가져온 대본 몇 개를 훑어봤다.
그러다 곧 밀려오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냉장고를 열었다.
삼영이 준비해준 샐러드 한 통을 깔끔히 비웠지만, 아쉬움에 숟가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밥이 왜 이렇게 맛있지?”
……진짜 큰일이네.
살찔 걱정을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탓에 적잖은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결국 휴대폰으로 새벽 배송이 가능한 앱을 켜 장을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알 사람은 다 아는 국민 떡볶이?”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 제품의 후기가 궁금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다 개인 방송까지 클릭하고는 어느덧 먹방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깜짝 놀라 그녀가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안 돼. 정신 차리자, 서강.”
강은 제 뺨을 착착 두드리고는, 다시 장바구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덜어낸다고 덜어냈는데, 결국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재료를 구매해버렸다.
그녀는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다이어트 식단 몇 개를 찾아보다가 두유와 두부면을 이용해 만든 크림파스타 영상을 발견했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동안 딱히 요리할 일이 없었지만, 모르는 거야 삼영에게 조언을 구하면 될 일이었다.
다 만들어진 음식 영상을 보고 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며 입에 군침이 돌았다.
홀리듯 주방으로 향한 강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고구마로 만든 저염 비스킷 한 봉지가 보여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회사에서 가져온 대본을 마저 살피며 비스킷을 먹었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버렸다.
슬슬 잠이 밀려와 시간을 확인해보니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든 필요해지면 이름을 부르라던 산의 말이 생각났지만, 전화를 두고 아무 때나 남발하기엔 좀 민망한 방식인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전화가 어디 있더라.”
소파에서 막 일어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밖에는 헤어질 때 그대로의 모습인 산이 서 있었다.
“옷 안 갈아입었네?”
“…….”
“어디 다녀왔어?”
물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저 강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