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모두에게 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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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모두에게 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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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모두에게 극호
2022.06.16.
“옷 안 갈아입었네?”
“…….”
“어디 다녀왔어?”
강이 물었다.
하지만 산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빈속에 너를 덮쳤다가 온전히 살려둘 거라는 보장이 없어, 배를 좀 채우고 오는 길이라는 복잡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사냥.
-이라고 하면 기겁하겠지.
인간의 방식대로 밥 좀 먹고 왔다는 말도 이상했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하던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냥. 허기 좀 달래려고 나갔다가.”
“?”
“입맛만 버리고 왔어.”
산의 대답에 강이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잠깐만. 내가 잘 몰라서 묻는 건데.”
“…….”
“지금 말하는 허기가 위장 쪽이야? 아니면…….”
그녀의 손이 자신의 배 근처를 배회하다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멈추었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그가 곧장 답을 들려주었다.
“몽마한테 인간의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 같은 거야.”
그 말에 강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럼 지금…… 다른 꿈을 먹고 오는 길이라는 거야?”
“폭식했다가 또 탈 날까 봐.”
“어땠어?”
“뭐가?”
“밖에서 다른 꿈 먹고 왔다며.”
“…….”
“맛있었어?”
저를 잡아먹을 듯 물어오는 그녀의 반응이 퍽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
“더럽게 맛없었어.”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강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러고는 곧 웃음을 참는 것처럼 슬쩍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첫 번째로는 밖에서 먹고 온 꿈이 더럽게 맛없었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제 꿈을 먹기 위해서는 제법 자제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새삼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만큼 제 악몽이 값어치를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20년간 자신을 괴롭힌 악몽이 이런 식으로 귀한 쓰임을 받을 줄은 몰랐다.
강은 뒤늦게 들어오라며 비켜서 주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끝내고 들어가서 쉬어.”
퍽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어제보다 한층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다.
“근데 악몽은 어디서 먹고 온 거야?”
자연스럽게 제 할 일을 하면서도 일상의 안부를 묻듯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런 강의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며, 산이 대답했다.
“먹을 곳 천지지.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니까.”
“아. 먹을 곳 천지인데, 그래도 우리 집이 미슐랭 맛집이구나.”
“미슐…… 뭐?”
“아니야. 네가 먹고 온 꿈이 맛없어서 다행이라고.”
서강이 생긋 웃는다.
그녀가 뭘 걱정했던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구 때문에 입맛만 까다로워졌다고 이미 여러 차례 말했건만, 아마 잘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인간이 뭘 알겠나.
제 꿈을 먹어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엉겁결에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내내 강은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악몽을 먹어주는 제가 고마운 건 알겠는데, 완전히 경계를 푼 모습이라든지, 말을 놓는 게 자연스러워진 걸 보면 저를 진짜 특별한 친구로라도 여기는 모양이었다.
특히 저 눈.
저건 황 대표가 서강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쳐다보는 듯한 눈빛.
원하는 걸 가져다주는 네가 고맙고 소중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
전에도 느꼈지만, 산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꽤 재밌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니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 옆에 먹다 만 비스킷이 보였다.
“이 시간에 저런 거 먹어도 돼?”
정곡을 찔렸는지 서강이 어깨를 움찔거린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은 척 새초롬한 대꾸를 이었다.
“저녁 대신이야.”
“입맛이 꽤 도나 본데?”
놀리듯 던진 말에 결국 강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살찌게 생겼다고.”
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잡아먹기 좋겠네.”
그의 능청에 그녀의 눈초리는 한층 더 뾰족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닭 보듯 쳐다보지 말아줄래?”
“닭?”
“네 눈빛이 지금 딱 그렇잖아.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닭 쳐다보는 것 같다고.”
그 말에 산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저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갈무리 한 그가 이만 오라며 침대 위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잠이나 자. 늦었어.”
잽싸게 비스킷을 치운 강이 쪼르르 달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이불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 먼저 잔다. 너도 잘 자.”
미리 인사를 건넨 그녀가 산의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무심히 걸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길래 다시 눈을 떠보니, 그가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럼?”
“어제 해봤는데, 새끼손가락은 닿는 면적이 너무 작아. 이건 10분짜리 낮잠용이야.”
“면적이 중요해?”
“닿는 면적으로 흡수되니까.”
“허…….”
당황한 강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럼 어떻게 해? 손이라도 잡을까?”
“손이나 손가락이나.”
“그럼 팔짱?”
“팔짱 같은 소리.”
“……그럼 뭐 어떻게 하자고.”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면적은 서서히 늘려가기로 해. 친해지는 만큼.”
그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버텨볼게.”
그제야 강은 무언가 말하려던 걸 체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잘 자. 서강.”
“너도 잘 자, 산아.”
뱉고 보니 어딘가 어색한 인사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을 정정했다.
“아니, 맛있게 먹어.”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곧 의식이 멀어졌다.
산은 강이 잠에 빠지자마자, 꿈을 흡수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지못해 먹은 것과는 결이 다른 악몽의 맛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이런 훌륭한 꿈을 쌀알 세듯 천천히 오랫동안 먹어야 한다는 거다.
음미하듯 한입을 먹고, 날뛰고 싶은 본능을 한 번 눌러주고.
격동하던 심장이 원래의 박동을 되찾으면, 다시 조심스럽게 한입을 먹고.
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먹는 방식과 시간의 문제라는 걸, 어제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산은 제가 짐승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네발 달린 짐승에게 수저와 포크를 쥐여주고, 밥상머리 예절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다 안전한 방법을 택하려면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제가 식욕보다 강력한 절제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은 강의 꿈속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그는 수면을 통해 그녀의 무의식에 진입할 수 있었다.
강의 얼굴이 완전히 평온해지자, 산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가, 미끄러지듯 손바닥을 훑고 들어가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제 팔을 벤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빠지듯 그녀의 무의식을 두드렸다.
소리도, 감촉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에서 산은 허공에 뜬 채 깊이 잠든 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그녀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커다란 물방울 속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강의 옷자락과 손끝,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너울거렸다.
붉고, 푸른 빛이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서 춤추듯 맴돌았다.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던 그 빛은 이내 하나로 합쳐져 보랏빛을 띠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너한테 제일 맛있는 악몽을 선물해줄게.’
기억 너머의 아버지 목소리가 몇 번이나 맴돌았다.
‘산아. 잘 봐두렴. 너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어머니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그는 잠든 강의 앞에 선 채 그녀가 있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말없이.
.
.
.
다음 날.
삼영과 산을 만나 함께 회사로 가는 일은 이제 익숙해졌다.
몇 번 함께하진 않았지만, 인간이란 원래 적응의 동물이었으므로.
“커피 마실래?”
“나는 루이보스.”
삼영의 물음에 강이 답했다.
어제 먹은 게 있어서 오늘은 가볍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산이 말했다.
“오늘은 제가 사 올게요.”
“어, 그럴래?”
“네. 어떤 거 드실래요.”
“그럼 난 시원한 아메리카노.”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여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삼영이 외쳤다.
“시럽 네 번!”
산이 알겠다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삼영은 이내 그에게 음료를 사 오게 한 일을 후회했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거리에 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내리자마자 따라붙은 사람들의 시선은 그가 음료를 사고, 카페를 나와 차까지 돌아오는 내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예 가던 길까지 멈추고 서서 산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던 건 그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주변의 다양한 빛깔이 죽어버리는 듯한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삼영이 말했다.
“강아.”
“응?”
“나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쟤는 저 얼굴로 왜 연예인을 안 할까?”
그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끼가 없나 보지.”
그러자 삼영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쟤 끼 부리는 거 장난 아니야.”
“…….”
“나한테도 소고기로 끼 부렸단 말이야.”
“…….”
“아닌가? 소고기 문제가 아니었나? 나 잘생긴 남자 좋아하나? 아니면 그냥 예쁜 건 다 좋은 건가?”
그가 알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강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예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닐까?”
“슬프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하지만 꼭 그게 아니어도 뭐에 단단히 홀린 건 확실해. 오빠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한산한테만 관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가 한 말에 삼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는 왜 빼?”
“뭐가?”
“너도 산이한테 꽤 급속도로 관대해졌잖아.”
“그건…….”
쟤가 내 악몽을 먹어주니까.
쟤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강은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사이, 음료를 사서 돌아온 산이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삼영에게 하나를 내밀고 강에게 그녀의 몫을 내밀었다.
“네 건 왜 없어?”
“나는 물이면 돼.”
그의 대꾸에 음료 한 모금을 마신 강이 물었다.
“어제도 과식했어?”
“…….”
“과식했구나.”
“나도 내가 식탐 있는지 몰랐어.”
덤덤히 흘러나온 한마디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자신이 아쉬운 만큼 산 역시 제게 목메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심 다행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