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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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빛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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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빛과 어둠
2022.06.19.
차는 경기도의 한 실내 스튜디오로 향했다.
강이 전속모델로 활동 중인 주얼리 브랜드 ‘레이나’의 신상 화보 촬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를 마친 후, 세 사람은 나란히 건물 안으로 향했다.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삼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 전화 좀 받고 들어갈게. 둘이 먼저 들어갈래?”
삼영이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지하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고는, 곧장 전화를 받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예, 대표님. 그럼요. 잘 도착했습니다.”
굽은 상체가 바닥까지 내려가려는 걸 보니 황 대표의 전화인 듯했다.
로비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산과 강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먼저 내렸다.
복도를 따라 걷는 강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경쾌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산이 묻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웃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 볼 생각하니까 좋아서.”
“반가운 얼굴?”
“응. 오늘 촬영 진행해줄 포토그래퍼가 내 친구거든.”
……잠을 잘 자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강에게 삼영 외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의외였다.
건물은 지하 전체가 스튜디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던 그녀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촬영장 한쪽에서 보고 싶었던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이반!”
이름을 외친 강이 신이 나서 달려갔다.
막 통화를 마친 남자는 흰 셔츠에 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채 그녀를 반겼다.
“오랜만이다.”
사진작가 이반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비해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강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어 꽤 여러 번 작업해 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몇 없는 친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잘 지냈어?”
그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물어온 말에 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래. 좋아 보인다.”
간단한 안부를 묻던 반은 이내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들어갈까?”
그러고는 들고 있던 파일을 보며 바로 일 얘기를 꺼냈다.
“콘셉트 파일은 확인했지?”
“응.”
한두 번 호흡을 맞춰본 게 아니라, 일이 척척 진행됐다.
간단히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걸음을 돌리던 반의 시선이 스치듯 산을 향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산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누구인지 따로 묻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딱히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 그의 존재 자체를 주의 깊게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 산은 반의 모든 행동을 면밀하게 주시했다.
강과 대화를 나눌 때의 표정, 몸짓,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의 그가 일일이 세트를 점검하고, 카메라를 정비하는 모습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결국 반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진 벽에 기대어 있던 산과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 서 있던 반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그 모습이 마치 빛과 어둠 같았다.
“…….”
“…….”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두 남자의 시선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향해 있었다.
잠시 후.
강은 몸의 라인이 우아하게 드러나는 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 차림에 아래로 깔끔하게 묶은 헤어스타일로 등장했다.
멀찌감치 지켜보던 레이나 직원들과 스튜디오 스태프들이 동시에 감탄을 흘렸다.
“와. 나, 서강 실물은 처음 보는데 예쁘긴 진짜 예쁘다.”
“그러게. 카메라가 실물을 다 못 담네.”
주얼리 화보인 만큼 액세서리가 돋보여야 했기에 스타일링이 과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강의 매력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산도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옆으로 온 삼영이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우리 강이 너무 예쁘지.”
“네.”
묻기가 무섭게 영혼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태도라 진정성이 의심됐지만,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찬양을 이어갔다.
“아유, 쟤는 어떻게 된 게 매일 봐도 미모가 빛을 안 잃어.”
얼마나 웃고 있었는지 잇몸이 말라, 말려 들어간 입술이 끼일 정도였다.
급히 사막화된 잇몸에 수분을 공급한 그가 팔불출 같은 칭찬을 이어갔다.
“근데 그거 알아? 우리 강이는 손도 예뻐. 보통 손이 부각 되는 광고는 부분 모델을 따로 쓰기도 하거든? 근데 강이는 그런 거 필요 없어. 부분 모델만큼 손이 예쁘니까.”
“다 가졌네요.”
돌아온 반응이 아까보다 만족스러워 삼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지?”
“네.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쟤는 장기도 예쁘게 생겼을 거야.”
“그럴 거 같네요.”
꿈도 맛있고.
완벽해요.
뒷말을 삼킨 산이 피식 웃었다.
그때. 레이나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이반이 강에게 다가갔다.
“준비 다 했어?”
“응.”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하자.”
그가 말과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쇄골 아래에 떨어져 있던 작은 깃털을 떼어주었다.
이반의 손가락이 강의 몸에 닿는 장면을 멀리 있던 산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슬쩍 미간을 구긴 그가 삼영에게 물었다.
“여배우 몸에 저렇게 함부로 손을 대도 되나요?”
“응?”
“스타일리스트가 괜히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런 걸 손수 정리해주나 해서요.”
“아, 뭐 저 정도야. 둘이 친하니까.”
“친분으로 가능한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요. 머리나 팔도 아니고.”
“…….”
대답이 돌아오질 않는다.
산이 팔짱을 끼고 기대선 채 한참을 노려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놀려먹고 말겠다는 음흉하고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삼영이 보인다.
깜짝이야.
마음의 준비도 없이 괴상망측한 얼굴을 마주한 그가 놀라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그러자 삼영이 입매를 씨익 늘이며 말했다.
“지는.”
……지는?
“꿈 핑계로 손 한번 잡아보겠다고, 개수작 부리던 건 까먹었나 봐.”
……개수작?
상상도 못 한 망언을 들은 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내가 경고하는데.”
“…….”
“우리 강이한테 흑심 품지 마. 니네를 애초에 친구로 묶어버린 것도 다 내 큰 그림이었으니까.”
아이고 저런.
어쩌죠? 밤마다 찾아가서 잠까지 재워주는 사이인데.
속으로 맞받아친 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대답 안 하네?”
“자신 없는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뭐야?”
“농담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서강을 여자로 볼 일은 없으니까.”
밥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이번엔 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이 좀 그렇다? 우리 강이가 어때서, 여자로 볼 일이 없어?”
“…….”
“자신 없는 약속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흑심 품지 말랬다가, 여자로 볼 일이 왜 없냐고 따지고 들면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라는 말인가.
“흑심은 품으면 안 되지만, 여자로 보긴 봐야 하는 거라면 뭐 나보고 짝사랑이라도 하라는 건가?”
산이 꼬집은 말에 삼영의 입이 합죽이가 됐다.
제가 한 말이었지만 확실히 어폐가 있는 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궁지에 몰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산이 아예 삼영을 떠밀어버릴 듯 몰아붙였다.
“그리고 개수작 부리는 거 알면서 왜 그냥 뒀어요? 아니, 오히려 기가 센 사람이 어쩌구 하면서 부추겼잖아요.”
“그, 그건! 내가 괜히 찬물 끼얹었다가 셋 다 어색해지고 그러면 어? 막, 분위기 개판 되고! 어? 그럼 이상하게 껄끄러워질 수도 있고! 어? 너 말이야!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야! 어?”
“쓸데없는 일에 그렇게까지 관대하신 줄은 몰랐네요. 서강만 끔찍이 여기시는 줄 알았는데.”
“너한테만 관대한 거거든? 다른 놈이 그딴 수작 부렸으면 손모가지를 날려버렸어!”
씩씩대는 삼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이 눈가를 구겼다.
“왜 나한테만 관대한 건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얼굴은 왜 빨개지지?”
“갱년기라 그런다!”
당황한 그가 아무 말이나 던지고는 결국 자리를 피해버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산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강의 앞에 나타나기 전, 제일 먼저 한 일이 서강의 회사 사람들에게 모두 손을 써두는 일이었다.
완전히 의식을 지배할 수는 없지만, 제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정도의 최면은 편의를 위해서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삼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황 대표나 다른 직원들이 제게 홀려 있는 상태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디 남의 말에 잘 휘둘리거나, 의심이 없는 사람. 혹은 기가 약하거나 마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최면에 더 잘 걸리긴 한다.
그래서 삼영을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그가 황 대표보다 구워삶기 편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알다가도 모르겠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최면에 걸리긴 한 건지, 아닌 건지.
아니면 최면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신이 그의 취향인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목적을 떠나서 수컷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 * *
한창 촬영이 이어지던 중.
“잠깐만 끊었다 갈게요.”
이반이 촬영을 멈추곤 강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거리낌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수 정돈해주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달려오려고 했지만,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안 오셔도 됩니다. 끝났어요.”
이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강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컨디션 좋아 보인다?”
“응.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다행이네. 그 일 있고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제 괜찮아졌어. 고마워, 걱정해줘서.”
그 말에 가볍게 미소 지은 반이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다시 멀어졌다.
멀리 있던 산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터치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지며 팔찌, 목걸이, 귀걸이, 시계 등 착용해야 할 액세서리가 바뀔 때마다 여러 번 촬영을 멈추고 와서 직접 각도와 포즈를 만져가며 재정비해주었다.
먼지 하나 떼어주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쯤 되니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기척을 감추는 데 능한 것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서강의 주변에 포진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끼어들자니…….’
그 또한 자칫 일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라 쉽지 않았다.
그렇게 1차 촬영이 끝났다.
장시간 이어지는 촬영은 실내의 강한 조명 때문에 메이크업 수정이 필수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강의 화장을 수정하는 사이, 반이 다가가서 종이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조명 때문에 덥지?”
“촬영장이 다 그렇지 뭐.”
“실내 온도 좀 낮춰줄까?”
“아니, 괜찮아. 촬영도 거의 끝났고.”
그런데 그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곁으로 산이 다가왔다.
그의 손엔 어디에서 구한 건지 모를 얇은 파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산은 한쪽만 팔짱을 낀 채 파일을 쥐고 있던 손을 우아하게 들었다.
그러고는 곧 반을 빤히 바라보며, 강에게 부채질을 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