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을의 계획 (16/118)


#16. 을의 계획
2022.06.23.


산이 다가올 때만 해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부채질하던 걸 멈춘 반이었다.

하지만 그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부채질을 하자, 이내 반도 그를 마주 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각자의 손에 들린 얇은 종이 뭉치와 파일이 팔랑팔랑 바람을 만들어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부채질 배틀인가?

강은 양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려 제대로 두 남자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산이었다.


“이런 건 제가 하겠습니다. 작가님은 촬영 준비하시죠.”

“새로 오신 매니저입니까?”

“경호원입니다.”

“경호원이 왜 이런 것까지 합니까?”

“그럼 작가님은 왜 이런 것까지 합니까?”

말문이 막힌 반이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작게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 친분은 있는 사이라서요.”

“친목은 사석에서 나누시고, 일할 땐 일만 하시는 게 어떨까요.”

두 남자 사이에 오간 말 몇 마디로 금세 분위기가 싸늘해져 버렸다.


“저기, 한 실장님.”

보다 못한 강이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일할 때 스킨십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필요 이상의 액션은 취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아무리 일이라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거든요.”

“저기요.”

“서강 씨 직업 특성상, 외간 남자랑 옷깃만 스쳐도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니 그가 경호원인지, 소속사 대표인지…… 아니면 남자친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치의 물러설 생각도 없는 산의 경계에 반도 더 이상 반박하기를 그만두었다.

대꾸해봤자, 싸움만 될 테니까.

말이 사라진 두 남자 사이에 숨 막히듯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갔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강은 둘째치고, 곁에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마저 바짝 얼어붙어버렸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그녀가 나지막이 중재에 나섰다.


“부채질 안 해줘도 되니까 둘 다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그때.

뒤늦게 나타난 삼영이 근엄하게 말했다.


“인간이라면 자고로 도구를 쓸 줄 알아야지.”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가 등 뒤로 감춰둔 양손을 꺼내 들었다.

분홍색 토끼 귀가 달린 미니 선풍기 두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영이 동시에 버튼을 눌렀고, 조그만 선풍기가 이내 정신없이 돌아갔다.

위이잉-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걸 증명하듯 뿜어져 나온 강력한 바람에 산과 반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강은 이 웃지 못할 상황에 손끝으로 미간을 누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삼영의 깨알 등장에 날카롭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풍기는 제가 들고 있을 테니, 두 분도 각자 업무에 임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경호원은 경호나 하고 포토그래퍼는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는 얘기였다.

그제야 첨예하게 대립하던 산과 반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촬영이 재개됐다.


“왼쪽으로 고개 조금만 더 돌려볼래요?”

반이 요청했고, 강이 각도를 조금 틀었다.


“좋습니다. 그 상태에서 손가락만 조금 더 내릴게요.”

귀걸이 끝에 닿았던 검지가 조금 더 목 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원하는 각도가 아니었는지, 그가 직접 나섰다.


“고개 조금만. 아니, 밑으로.”

“이렇게?”

“어. 손은 움직이지 말고.”

반이 그녀의 턱 끝을 엄지로 살짝 건드리곤, 손가락을 직접 잡고 움직이며 위치를 조절했다.

그런데 한바탕 소동이 있어서였는지, 강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산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밝은 조명 아래 있었던 탓에 어둑한 곳에 있는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공사는 구분하자고 핀잔하던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물론 이게 공사의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산의 반응이 과했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어졌을까 싶기도 하고.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을 텐데, 이게 일로 엉켜버리니까 벌써 골치가 아프고.

당연히 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봤자 한낱 경호원이 일에 끼어드는 것 자체를 기도 안 찬다고 여기는 듯한 모양이었다.

강은 이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이유야 뭐가 됐든 여기서 한 번 더 산이 불만을 제기했다가는 순조로운 촬영은 날아갈 것이고, 그 여파가 너무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는지, 다행히 더는 나서는 일이 없었다.

단지 삼영이 옆에서 부지런히 산을 회유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 간간이 보였고, 그는 눈 한번 깜빡이는 법 없이 무섭게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났다.

웃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기가 쭉 빨린 기분이었다.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하자.”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고.”

반의 인사에 더 반갑게 반응할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도 강의 상태를 파악한 듯 적당히 담백한 인사로 그녀를 배웅했다.

당연히 삼영과는 눈인사를 주고받았고, 산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두 남자 중 어느 쪽도 인사를 나눌 의향은 없어 보였다.

.
.
.

돌아오는 차 안.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냉랭했다.

삼영이 룸미러로 강과 산의 안색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게 뭔 거지 같은 상황인가 끊임없이 되짚어봐도, 왜 제가 사랑싸움이라도 한 듯한 남녀 사이에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창문을 보고 있었고, 먼저 입을 연 건 강이었다.


“너 아까 완전 오버였던 거 알지?”

“뭐가?”

“몰라서 물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으며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도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삐딱한 눈빛이 산이 가진 불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야 할 게 누군데?

도대체 그에게 뭐가 그렇게 거슬렸던 건지 모를 일이다.


“다시는 내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마.”

“…….”

“다른 건 몰라도 일할 때 방해하는 건 못 참으니까.”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더 화가 났지만, 삼영도 있으니 일단 지금은 이쯤 하기로 했다.

산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얘들아.”

차가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고, 삼영이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려주면 둘 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야 해. 알았지? 엘리베이터에서 싸우고 그러면 안 된다? 응?”

“…….”

“…….”

“둘 다 대답 안 할 거야? 그럼 나 집에 안 간다? 셋이 오늘 사이좋게 밤이라도 세울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강이 마지못해 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애도 아닌데 유치하게 뭘 싸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떨리는 주먹을 보지 못한 채 순진무구하게 답했다.


“정말이지? 오빠, 믿고 가도 되지?”

삼영이 우리는 한솥밥 먹는 식구임을 잊지 말라며, 신신당부하곤 두 사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둘은 그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도로 냉랭해져 버리고 말았다.

강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아무래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를 그에게 확실히 일러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실의 너는 현실의 네 일만 하면 돼. 내 경호원으로 고용된 거잖아. 그러니까 경호만 하면 될 일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아니.”

“…….”

“너 완전 선 넘었어. 분위기 개판 될 뻔했다고. 알아?”

“그래서 정중히 이야기한 거잖아.”

“전혀 정중하지 않았거든?”

성격이 고약한 작가한테 걸렸으면 사달이 났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그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녀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산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속으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너에게 차곡차곡 불행의 씨앗을 심어 네 인생을 지뢰밭으로 만든 것들이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운 주변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자신도 전부 예측할 수는 없기에 벌어진 일을, 그리고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

일을 망칠 뻔했던 것에 대한 사과가 우선일까?

산은 가만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팔짱을 끼고 엄지로 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시선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채 정리되지 못한 본심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걱정돼서 그랬어.”

“…….”

“네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아니니까.”

그 말에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뒤로 향했다.


“뭐가 걱정되는데? 이반이 몽마라도 될까 봐? 걘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내 친구라고. 걔랑 나랑 알아 온 시간이 얼만지 알아?”

“알아온 시간이 긴 만큼, 나쁜 짓 하기도 수월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강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애써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래. 그럼 네 말대로 만약에 반이가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치자. 그래서 걔가 나한테 뭔가 못된 짓이라도 하려고 했다고 치자고.”

“…….”

“그럼 그때 네가 나서도 될 일이었어.”

“일이 벌어진 후에 나서봤자 무슨 소용인데.”

“너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잖아. 아파트 꼭대기에서 추락하는 사람도 살려놓고 왜 그런 건 안 된다는 건데?”

그를 이유 없이 타박하려던 건 아닌데, 말하다 보니 자꾸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결국 홧김에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됐으니까 오늘은 오지 마. 어차피 잠도 안 올 거 같으니까.”

강은 그 말은 남긴 채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린 그녀를 산은 그대로 바라만 봐야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오늘 하루 굶게 될 것 때문에 따지고 들었다가는 수틀린 서강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참아야 했다.

강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버리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철저히 약자가 된 생경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산은 여전히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서강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그녀와 함께 있으니, 자꾸만 안 해도 될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런 고민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 젠장.”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산의 뇌리를 강렬히 스치는 어떤 장면이 있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세운 그가 작게 말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확신에 찬 산이 입꼬리를 유려하게 늘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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