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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림자처럼 (18/118)


#18. 그림자처럼
2022.06.30.



 


[밥 한번 먹자. 할 얘기도 있고.]

[무슨 얘기?]

[그건 만나서 할게. 언제가 괜찮아?]

만나서 할 얘기라는 말에 강은 더 묻지 못하고, 스케줄 앱을 뒤적였다.

마침 오늘 오후 일정이 비어 있어, 딱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마침 저녁에 시간 비긴 하는데, 너는 어때? 너무 갑작스럽나?]

작성을 마치고 막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

문득 산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일까.

아마도 반을 별로 내켜 하지 않던 것 같은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제 꿈을 독차지하고 싶은 몽마의 입장에서는 주변의 모두가 적으로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상대가 굳이 반이 아니라 누구였다고 해도, 의심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긴 마찬가지였을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가 뭘 걱정하는 거야.”

어울리지도 않게 와플 같은 걸 사 오는 모습에 잠시 사고가 멈춘 게 분명했다.

고개를 저은 강이 전송 버튼을 꾹 눌렀다.

보내기가 무섭게 빠른 답장이 돌아왔다.


[이따 집으로 데리러 갈게.]

 

.
.
.

회사를 빠져나온 건 간단한 외부 미팅을 마치고,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즘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

삼영이 룸미러를 보며 말했다.


“일도 일찍 끝났는데, 간만에 옥상에서 삼겹살 구워 먹을래? 산이랑 셋이.”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삼영과 강은 종종 함께 집밥을 먹곤 했다.

물론 배불리 먹일 수도, 먹을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해준 음식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본가를 대신해, 제집 드나들듯 옥탑방을 가곤 했다.

그리고 그건 강이 데뷔를 하기 전부터 이어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강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나 오늘은 약속 있는데.”

“약속? 누구랑?”

“반이.”

“아아…….”

아쉬움에 말꼬리를 늘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삼겹살은 조만간 꼭 먹자.”

“알겠어. 안 그래도 조만간 한번 가고 싶었는데, 날 잡아서 꼭 갈게.”

아마 오늘 선약이 잡히지 않았다면 신이 나서 놀러 갔을 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삼영이 다시 물었다.


“근데 어디서 보기로 했어?”

“반이 작업실 근처에 괜찮은 와인 바가 있대.”

당분간 외출하지 말라던 황 대표가 알면 잔소리를 퍼부을 일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말하는 ‘당분간’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도 모를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언제까지 숨어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외출이 아직 걱정스러운 건 삼영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그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걱정 안 해도 될 만한 장소지?”

“처음 밥 먹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걱정을 해. 어련히 잘 골랐겠지.”

강도 그런 삼영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 있던 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제 강이 뭐라고 했던 것들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다.

삼영이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 반이가 이따 데리러 온다고 했어.”

“그럼 올 때 데리러 갈까? 밴 놓고, 내 차로 갈게.”

“오빠 차 아직 살아 있어?”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일단.”

“…….”

“굴러는 가.”

오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저번에도 굴러갔다고 대답했던 거 같다.

……언덕에서 뒤로 굴러가는 바람에 내려서 밀었다고.

아무래도 다음 삼영의 생일엔 차를 한 대 선물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에, 옆에 있던 산이 말했다.


“제가 갈게요.”

“산이 네가?”

“네. 혼자 보낼 순 없으니까, 근처에 있으려고요.”

그는 삼영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강에게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고, 산은 이내 직접 허락을 구했다.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을게. 괜찮지?”

“그래, 뭐. 방해만 안 하면.”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의 동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혼자 나섰다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에게 걱정거리를 안기는 일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혹시 모를 상황에 황 대표한테도 구실이 생길 것이다.

반이 주차장에 도착했다고 연락을 해온 건 약속했던 것보다 조금 빠른 시간이었다.

강은 가벼운 코트 차림에 검은색 버킷햇을 눌러 쓰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지하로 가니, 익숙한 벤틀리가 보였다.

그녀가 반쯤 열려 있던 조수석 창문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일찍 왔네?”

“일이 빨리 끝났어.”

그가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가볍게 미소 지은 강이 차에 오르기 직전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산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는 거 맞아?’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아서 따라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던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 또한 괜한 우려였다.

빛 아래서 그림자가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제게 산의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자나 마찬가지였다.

.
.
.

반이 예약해뒀다는 와인바는 서울의 유명한 부촌 근처로 꽤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곳이었다.

여기에 이런 데가 있었다고?

알고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연히 발견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핀 조명이 달린 좁고 어둑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꽤 근사한 와인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베이스에 전체적으로 톤 다운된 내부 인테리어는 반이 좋아할 분위기였지만, 강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무엇보다 어둡고, 조용하다는 게 가장 좋았다.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잔잔하게 틀어놓은 음악이 전부였으니까.

테이블 간의 간격도 꽤 떨어져 있던 터라 밖에 앉아도 될 것 같았지만, 그는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따로 룸을 예약해두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사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안내했다.

몇 개의 테이블을 지나 좁은 복도로 된 곳에 들어서자 작고 프라이빗한 룸이 나왔다.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반과 짧은 대화를 마친 사장이 룸을 나섰다.

그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약해 둔 와인과 바비큐 플래터가 세팅되었다.

잘 구워진 고기와 소시지는 한입 베어 물면 육즙이 터져 나올 듯 먹음직스러웠고, 그릴에 구운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옆으로 입맛을 돋우어 줄 토마토 절임이 놓여 있었다.

비주얼과 냄새만으로 금세 입안에 침이 고였다.


“와, 맛있겠다.”

작게 감탄을 뱉는 그녀의 모습을 반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소식이 일상이던 강이 음식에 저렇게나 감흥을 보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 굶었어?”

“아니? 왜?”

“그냥. 배가 많이 고픈 것 같아서.”

그의 반응에 강이 멋쩍게 웃었다.


“아……, 그래 보였어?”

반이 그를 따라 조용히 웃었다.


“음식 입에 맞으면 또 오자. 여기 연어 파피요트도 잘하거든.”

그녀가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본격적인 식사를 앞두고 강이 일어섰다.

손도 씻을 겸, 밖을 한번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산이 내부까지 들어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 확인차 살피려던 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산이 가까이 있는 걸 확인해야, 마음 놓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를 공격한 게 인간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나니, 최소한의 보호장치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간 그녀가 발소리를 죽여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란 바(BAR)에 익숙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산이었다.


 
길쭉하고 늘씬한 팔다리에 슈트를 걸친 그의 모습은 그녀가 봐도 무척 근사했다.

주변에 관심을 잘 두지 않던 사람들도 힐끔대며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확실히 이목을 끌기 충분한 아우라와 외모의 소유자라 경호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이렇게 은밀히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엔 더 그렇고.

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니, 이미 그런 거엔 너무나 익숙해진 모습 같았다.

잠시 멈춰선 동안 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봤고, 곧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강은 일절 알은체 없이,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저렇게 떡하니 들어올 거면서, 눈에 안 띄는 곳에 있겠다고?”

룸까지 쳐들어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라는 뜻인가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엔 그가 다녀간 흔적처럼 사용하던 잔만 놓인 채였다.

내용물이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거의 입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갔지?’

순간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계속 두리번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이 말했다.


“음식 식겠다. 얼른 와.”

그의 재촉에 얼른 자리에 앉은 그녀가 눈을 빛내며 포크를 들었다.


“잘 먹을게.”

고인 침이 목으로 꿀꺽 넘어갔다.

양손에 들린 포크와 나이프가 바쁘게 움직이며, 접시 위의 음식들이 빠르게 소진됐다.

이제껏 봐온 중에 가장 맛있게 음식을 먹는 강을 보며 반이 말했다.


“진짜 별일이네.”

“왜?”

“너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봐서.”

본인도 식탐이 없어 소식하는 편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식욕감퇴 먹방의 일인자라고 느낄 만큼 음식과 친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광경이 그저 신기할 수밖에.

강이 버섯 한 조각을 포크로 찍으며 대답했다.


“요즘 너무 잘 자서 그런가, 입맛이 막 돌더라고.”

“불면증이 그렇게 심했었어?”

악몽에 시달린다는 건 삼영과 황 대표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그녀가 적당히 웃어넘겼다.


“자주는 아닌데, 내가 좀 예민하잖아.”

“지금은 괜찮고?”

“응. 많이 좋아졌어.”

강의 대답에 반이 다행이라 말하고는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하긴. 사람한테 잠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

“맞아. 식욕은 참겠는데, 잠은 막을 방법이 없더라.”

“…….”

“오오! 근데 이 와인 뭐야?”

입안을 가득 채운 풍부한 향을 음미하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맛있지?”

“어. 완전 내 취향이야.”

“좋아할 줄 알았어.”

반이 조용히 웃고는 잔을 도로 채워주었다.

한동안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다.

언제나 그랬듯 딱히 바쁜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고 즐거운 자리였다.

솔직히 그와 저녁 약속을 잡았을 때, 한 번 정도는 산에 관해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어쨌든 반의 입장에서는 촬영장에서의 산의 태도가 불쾌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전혀 산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 문제는 물론이고, 계절이 바뀌기 전에 벌어졌던 사고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오랜만에 만나 가벼운 안부 묻듯이 했던 ‘지금은 괜찮아졌냐. 다행이다.’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래. 너는 그런 애였지.

무심한 듯하지만, 알고 보면 늘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땐 둘 다 말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의외로 잘 맞는 구석이 있고, 무엇보다 함께 있으면 편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반의 성향 때문에 강은 종종 그가 동갑이지만 연상같이 느껴지고는 했다.

술과 음식이 반쯤 비워졌을 때였다.

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할 얘기라는 게 뭐야?”

“아, 그거.”

손등으로 가볍게 입술을 훔친 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부탁? 무슨 일인데?”

“겨울에 작은 개인전을 하나 열려고 계획 중이거든.”

“사진?”

“응.”

고개를 끄덕인 그가 습관처럼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이내 못다 한 말을 이었다.


“네 사진을 찍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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