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암전
(19/118)
19. 암전
(19/118)
#19. 암전
2022.07.03.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부탁? 무슨 일인데?”
“겨울에 작은 개인전을 하나 열려고 계획 중이거든.”
“사진전?”
“응.”
고개를 끄덕인 그가 습관처럼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눈을 맞추며 부탁했다.
“네 사진을 찍고 싶어.”
예상했던 일은 아니라,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사진?”
“전시 기획서야. 집에 가서 한번 검토해봐.”
개인적 친분으로 부탁하는 거긴 했지만, 회사를 먼저 통하지 않은 건 강의 의사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반이 집에 가서 보라고 건넨 기획서를 앉은 자리에서 바로 훑어보았다.
“인물사진전이네?”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인물 사진을 주로 찍었는데 연령이나 성별, 직업, 인종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걸어온 삶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강의 집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대형 사진도 그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이번 전시회는 다양한 일상 곳곳에 담긴 인물의 모습을 생생히 담는다는 취지였고, 사진은 전부 흑백으로 전시될 예정이라고 했다.
“오오. 수익금 전액 기부.”
강이 기획안 마지막에 작게 명시된 부분을 일부러 소리 내어 읽자, 반이 난색을 표했다.
“……집에 가서 보라고 했잖아.”
그녀는 처음 하는 일도 아니면서, 그가 새삼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반은 남몰래 꾸준히 봉사와 기부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다.
강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어쨌든 이번 기회를 통해 동참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좋은 와인을 사주나 했더니, 뇌물이었어?”
“뭐, 그런 셈이지.”
“하하.”
그녀가 시원하게 웃자, 그가 재촉해왔다.
“대답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승낙?”
“그럼요. 함께하게 돼서 영광이에요, 작가님.”
두 손을 모아 얼굴 옆에 붙인 강이 잘 부탁드린다며, 과장된 콧소리를 냈다.
어쩌다 한번 보는 그녀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에 반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잘 먹고, 잘 잔다더니 기분도 부쩍 좋은 모양이다.
“사진은 스튜디오 촬영으로?”
“아직 모르겠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일하고 있는 배우 서강의 모습을 담으려는 목적이긴 했지만, 반은 그동안 작업해온 방식과는 다르게 좀 더 다양한 환경에서 일하는 강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허락된다면 당분간은 그녀의 일정에 맞춰 움직일 생각이었다.
모든 건 기획안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고, 다행히 강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회사에는 내가 한 번 더 정리해서 연락해둘게.”
“아니, 아니. 내가 말할게.”
황 대표가 알면 좋은 취지고 나발이고 대뜸 계산기부터 두드려댈 일이다.
그는 친분을 떠나 공짜는 없다는 주의였으니까.
“그럼 회사용으로 기획안 다시 보내줄까?”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너희 회사 대표한테는 안 충분할 거 같은데.”
“그 부분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개인전 준비나 잘해.”
든든한 그녀의 서포트에 그도 담백하게 화답했다.
“고맙다.”
“올해 안에 여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일단 계획은 그렇게 잡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 이슈 없이 진행되면 겨울일 거고, 늦으면 내년 봄으로 넘어갈 수도 있어.”
“그래. 알겠어.”
“그만 일어날까?”
볼일 끝났으니, 정리하자며 먼저 짐을 챙기는 반의 모습에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목적 달성했으니, 집에 간다 이거야?”
“지난주 내내 못 쉬었더니, 피곤해.”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같이 웃었다.
반과 만나면 이게 좋았다.
즐겁게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피곤해지기 전에 자리가 정리됐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와인 한 병을 반 정도 비우고 일어서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다.
“대리 불러서 데려다줄게.”
“아니야. 누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
“누가? 매니저님?”
“아니, 그…….”
“혹시 촬영장에서 봤던 새로 온 경호원?”
“아, 응.”
하여간. 눈치 빠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피식 웃은 그가 작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매니저에, 경호원에, 기사까지 아주 멀티네.”
“대표님이 깐깐하게 뽑은 사람이라, 좀 빈틈이 없긴 해.”
“네가 많이 힘들겠다.”
강의 성격을 잘 알던 반이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근처에 있으니, 자리가 정리되면 가게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산의 연락이었다.
‘얘는 취하지도 않나? 아까 바에 앉아 있던 거 내가 분명 봤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함께 룸을 나서는데, 밖이 꽤 소란스러웠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고성을 지르고 있었고, 그를 상대하고 있는 직원의 표정을 보니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맛 먼저 보고 구매하든 말든 결정하겠다는데 그게 왜 안 되냐니까?”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는 따로 구매하지 않은 와인에 대해 시음을 도와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먹어보고 입맛에 안 맞으면 환불해줄 거야? 아니잖아! 이거 완전 도둑놈 심보네!”
취객의 진상으로 인해 가게 분위기가 한순간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불쾌함을 느낀 일부 손님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억지를 부리던 남자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장이 나섰지만,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뭐? 영업방해?”
아무래도 경찰을 불러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몹시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야! 불러! 경찰이고 나발이고 어디 한번 불러봐! 이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 나가자.”
반이 강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나가는 길에 신고라도 해줄 요량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내가 우습냐? 어?”
흥분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컵을 집어 들더니 힘껏 집어던졌다.
날아온 유리컵이 아슬하게 강과 반의 앞을 스쳐 벽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벽에 붙어 있던 조명의 전구가 유리컵과 부딪쳐 파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꺄아악!”
근처에 있던 여성 손님들의 비명이 뒤엉켰고, 놀란 반이 그녀를 끌어안아 보호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강은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괜찮아?”
그가 물었고, 품속에 있던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난 사장이 소리쳤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테이블을 엎으려는 남자에게 그가 즉각 달려들었지만, 상황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비슷한 체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괴력을 발휘한 남자가 곁에 있던 직원들을 차례로 바닥에 내리꽂으며 난동을 피웠다.
“나가자! 빨리!”
반이 강의 손목을 잡아끌 때였다.
그런데 순간, 광분한 남자가 갑자기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야! 거기 안 서?”
그는 정확히 강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나가면 안 되지!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얼굴도 잘 알아보기 힘든 환경에서 혹시나 남자가 강을 알아봤나 싶었지만, 반은 돌아보지 말고 계속 가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테이블 위로 올라와 막무가내로 소파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물은 더 이상 가게의 직원이나 사장이 아닌 듯했다.
남자의 얼굴에 심상치 않은 광기가 어리던 그 순간이었다.
지직. 지지직. 파직-!
가게 곳곳에 설치된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줄줄이 전원이 나가기 시작했다.
팟! 파바밧! 퍼엉!
마지막 조명의 전구가 터지는 소음과 함께 주변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였다.
“아악! 사람 살려!”
“도와주세요!”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구로 몰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
누구 하나가 벽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퍼억! 우당탕!
“악! 아악!”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더 놀란 손님들이 뒤엉켜 넘어지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순간 반의 손을 놓친 강이 크게 휘청였다.
“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이리 와.”
그녀를 구한 건 산이었다.
익숙하고도 차가운 피부의 감촉이 손목을 감는 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면 바로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알았어?”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이끌었다.
그는 좀비처럼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안정적으로 강을 보호했다.
그런데 순간, 사람들의 비명 속에 찢어질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고막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소리에 그녀가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면서, 소름이 끼쳤다.
몇 달 전 겪었던 사고의 기억이 파도에 떠밀린 잔해처럼 순식간에 뇌리를 잠식한 것이다.
산이 단단한 팔로 강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강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탓에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는 망설임 없이 강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입구로 가 단번에 출입구 문을 찾아 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열린 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사방에서 헤매던 사람들도 제각각 방향을 틀었다.
“나가, 빨리.”
“잠깐만! 반이……! 반이가 아직 안에 있어!”
“알았으니까 너부터 올라가라고.”
산이 제 등 뒤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을 막으며 입구를 터주었다.
등이 떠밀린 그녀가 어쩌지 못해 계단을 올랐고, 강의 몸이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간 걸 확인한 산이 그제야 인파 속에 묻히듯 모습을 감추었다.
앞다퉈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왔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들이 때맞춰 가게 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
안으로 진입한 경찰들에 의해 난동을 부리던 남자가 끌려 나왔다.
제압이 쉽지 않았는지, 남자 한 명에 꽤 여럿의 경찰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놔! 놓으라고!”
짐승처럼 포효하던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끌려갔다.
그 뒤로 가게 직원들과 사장, 손님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고 일부는 다쳤는지 얼굴과 몸 곳곳을 감싼 채 신음하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숨을 죽이고 있던 강이 분주하게 시선을 굴렸다.
왜 이렇게 안 나와.
설마 다친 거 아니겠지?
차마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거리던 와중이었다.
키가 큰 두 남자가 엉켜 마지막으로 입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산과 반이었다.
그런데 산에게 부축을 받은 채 축 늘어진 반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반아!”
그녀가 소리치며,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