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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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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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꿈의 가치
2022.07.07.
“반아!”
강은 산에게 부축받아 나오는 반을 발견하고는 곧장 달려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그의 모습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얼굴……!”
오른쪽 눈두덩이 찢어져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좀 봐봐. 얼마나 다친 거야?”
“별거 아니야.”
손길을 가볍게 피한 그가 바로 되물었다.
“너는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지금 누가 누굴…….”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흐르는 피 때문에 한쪽 눈은 아예 뜨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제 걱정을 하는 반이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녀는 핸드백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황급히 그의 한쪽 얼굴을 덮어주었다.
“빨리 지혈해.”
“알았어. 내가 할게.”
반이 주변을 의식한 듯 직접 손수건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산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로를 참 끔찍이도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유약한 인간이 달리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마음을 써줄 수밖에.
혼자만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말했다.
“우린 이쯤에서 자리 뜨죠. 계속 있어 봐야 골치만 아파질 것 같은데.”
그 말에 반이 동의했다.
“그래. 두 사람은 얼른 가 봐.”
“다친 사람 두고 어떻게 가.”
“괜찮아.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뭘.”
구급차도 와 있고, 지혈만 되면 운전에 지장도 없다며 그는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강은 병원에 함께 가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해도, 알아볼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두 사람을 향해 반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거예요.”
산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그는 잠시 눈을 맞추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곤,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강을 태운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 화려한 도시의 야경에 섞였다.
돌아오는 차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산은 말없이 운전만 했고, 그녀는 놀란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아, 자꾸만 손을 떨었다.
“히터 틀어줄까.”
그가 건넨 말에 강이 고개를 저었다.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어쩐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다가 집에 거의 다 와서야 어렵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남자…….”
“몽마야.”
예상했지만,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던 답이 돌아왔다.
“동선으로 봤을 때, 노리고 접근했을 가능성이 커. 그래서 나도 따라 들어갔던 거고.”
그제야 산이 왜 바 안에 들어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악몽도 안 꾸는데, 왜…….”
왜 자꾸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게 끝이긴 할까?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날뛰는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아 말이 자꾸만 끊겨 나왔다.
강은 결국 입을 다문 채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대신 산이 말을 이었다.
“안 꾸는 게 아니라, 네가 기억을 못 하는 거야.”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어째서?”
“내가 지워버리니까.”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됐다는 사실에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사실이었다.
악몽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뿐이라니.
“향기가 진한 꽃일수록 벌레가 많이 꼬이잖아.”
“……뭐?”
“지금 네가 딱 그런 상태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더 많은 몽마들이 그녀를 노리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겪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와 방식으로 너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거라고.
“악몽은 끔찍하고, 오래될수록 진한 향기를 풍기거든.”
저번에 있었던 그 ‘사고’가 몽마의 입장에서 얻어걸린 경우였다면, 앞으로는 강의 존재를 인식하고 계획적으로 접근하는 놈들이 생겨날 거란 얘기였다.
그것은 오래된 술의 가치가 올라가고, 귀한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20년이나 악몽을 꾸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
“그게 네 꿈의 가치야.”
산의 말에 모든 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 * *
강은 어떻게 차에서 내려 집에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만큼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집 앞까지 동행해주었다.
강은 떨리는 손으로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자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둠과 적요가 파도처럼 쏟아져나왔다.
두려웠다.
발끝에 닿은 어둠이 삽시간에 공포가 되어 자신을 삼킬 것만 같아서.
등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어지며, 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잘 준비되면 불러.”
“잠깐만……!”
강은 저도 모르게 그만 돌아서려던 그를 붙들었다.
옷깃이 잡힌 산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지 마.”
“…….”
“내 옆에 있어줘.”
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탁했다.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겨우 외투만 벗고 욕실 앞에 서 있는 강은 무척이나 이 순간이 버거워 보였다.
문고리를 잡은 떨리는 손이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다리가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씻을 수는 있겠어?”
“…….”
“힘들면 내가 같이 들어가 주고.”
“그 정도는 아니야.”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짧게 답하고는,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산은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은 채 조용히 강을 기다렸다.
사위는 어둡고, 광야처럼 넓은 집은 고요했다.
하지만 인간보다 월등히 발달한 청각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물줄기 소리마저 잡아냈다.
솨아아-
감미로운 음악이라도 감상하듯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리였다.
잠시 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핏줄이 고스란히 비칠 정도로 투명한 목덜미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강이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이리 가까이 와줘.”
그녀의 손짓에 산이 순순히 응했다.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눈만 빼꼼 내민 강이 먼저 손을 뻗어 산의 손을 잡았다.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자꾸만 손을 고쳐 잡았다.
“못 자겠어.”
“왜.”
“무서운 꿈 꿀 것 같아서.”
“너는 언제나 꿨어. 오늘도 꿀 거고.”
“그런 뜻이 아니라.”
“…….”
“그냥 불안하다는 얘기야.”
그가 제 악몽을 먹어 치워주는 덕에, 끔찍한 꿈 속을 헤매지 않게 됐다는 걸 안다.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이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라는 것도 이미 들었고.
하지만 오늘은 왠지 아주 지독한 악몽에 시달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현실이 악몽보다 더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걸지도 모른다.
그건 전부 허상이 아닐 테니까.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산이 상체를 조금 숙였다. 그러고는 보드라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며 답해주었다.
“내가 있는데, 뭐가 불안해.”
“그건 그렇지만.”
“내가 실수라도 할까 봐?”
“…….”
“그래서 네가 꿈속의 끔찍한 장면이라도 마주하게 될까 봐?”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럴 일은 없어.”
편히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라는 위로에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은 제게 남은 불안을 지우기 위해 잠드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댔다.
“근데 아까 술 마시지 않았어?”
“받아만 놓고, 안 마셨어.”
“몽마도 술에 취해?”
“취해. 그걸 즐기는 몽마들도 있고.”
“그렇구나. 신기하네…….”
잠이 오는지 그녀의 눈꺼풀이 느리게 한 번 감겼다 뜨였다.
“산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너는 주량이 어떻게 돼?”
“몰라.”
“왜 몰라?”
“취할 만큼 안 마셔봤으니까.”
돌아온 대답에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흘렀다.
“그럼 다음에 나랑 한번…….”
마셔.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강이 스르륵 눈꺼풀을 내렸다.
산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악몽이 발현되며, 희미한 보랏빛 연기 같은 게 강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와 그에게로 흘러들었다.
돌아오는 내내 공포에 질려 있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끔찍한 하루를 겪었을 강의 꿈은 다른 때보다 더 훌륭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는 술처럼.
풍미는 나날이 깊어지고, 만족감은 무서울 정도로 높아졌다.
틈틈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주워 먹는 악몽들과는 감히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과연 누굴까?
그녀의 삶에 불행을 심고, 이토록 희귀한 악몽을 만든 것들이.
하지만 확실한 건 이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하나, 둘 정도의 몽마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서강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몽마들이 강의 인생을 스쳐 가고, 사라지고, 또한 공을 들였을까.
위협이 되는 정도만 아니라면, 악몽의 질을 위해 모른 척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불리 악몽을 삼킨 그가 창백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불쌍한 서강.”
강은 자신이 제 불행을 거두어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저가 내민 손길이 구원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구속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 예상했을 거다.
그때의 서강은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 만큼 절박했고, 자신이 아니면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넌 그때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너한테 답은 오직 나뿐이니까.
조용히 미소 짓던 그가 그녀의 하얀 손등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 * *
강이 잠에서 깼을 땐 어스름한 푸른 빛이 막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깜빡이던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제 손등을 덮고 있는 남자의 커다란 손을.
“안 갔어?”
강의 목소리에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엎드려있던 산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옆에 있어 달라며.”
“그래도 몇 시간 동안이나 그러고 있으려면 안 힘들어?”
걱정하는 강을 보며 그가 되물었다.
“왜. 신경 쓰여?”
“……미안하니까 그러지.”
그녀의 말에 산이 매트 위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괬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웃으며 방안을 제시했다.
“그럼 다음엔 옆자리를 좀 내주는 게 어때?”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는데, 강은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니.
무언가를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 같기도 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 같아.”
……뭐?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