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인
(22/118)
22. 제인
(22/118)
#22. 제인
2022.07.14.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스케줄이 있는 날엔 대부분 그렇듯 강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탑승한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바로 아래층에서 멈추었다.
아랫집에 사는 이웃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문이 열리고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림새가 엄청나게 화려한 그녀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하이, 귿몰닝.”
과한 R사운드의 현란한 억양이 엘리베이터 안에 울려 퍼졌다.
경쾌하게 인사한 그녀는 1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하이힐을 또각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강은 또렷한 한국어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우, 반가워요. 나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
“암 줴인.”
“?”
방금 제가 들은 암줴인이 아이엠 제인(I’m Jane)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가 거리낌 없이 악수를 청해왔다. 기다란 인조손톱 끝에 달린 화려한 큐빅과 스팽글이 시선을 강탈했다.
그런데 강이 그 손을 마주 잡을지, 말지 생각도 하기 전 그녀가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짚었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 마이 가쉬!”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된 제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쉬.”
“…….”
“연예인 서강 아니에요?”
강은 대답 대신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제인은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엄청난 리액션을 선보였다.
“맞죠! 서강!”
“네.”
“세상에! 내가 톱스타랑 네이벌훗이라니! 나이씃유 밑유! 나 진짜 팬이에요!”
억양이 특이한 영어를 쓰며 그녀가 말했다.
뉴질랜드나 호주 사람인가?
어쨌든 살짝 당황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은 팬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에 대한 반응은 보여야 할 것 같아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볍게 대화를 이었다.
“혹시 외국 분이세요?”
제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후후. 나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벗(but) 암(I’m) 뼛속까지 콜위안(korean).”
그녀가 한 손은 제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은 살랑이듯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왠지 칭찬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강은 제인의 제스처와 발음이 평범한 코리안치고는 상당히 과한 경향이 있다고 느꼈지만, 그냥 외국에서 오래 살았나 보다 생각하며 넘겼다.
그런데 눈을 반짝이던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오며 바쁘게 입을 놀렸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시간 없으니까 렛 미 인트로듀스 마이 셀프 짧게 할게요.”
“…….”
“마이 네임 이즈 제인. 앤 아임 트레이너. 앤 마이 에이지 이즈……!”
요란하게 리듬을 타던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곤 말꼬리를 아주 길게 늘였다.
그러더니 북 치는 시늉을 하던 두 손을 턱 아래 모으며 말했다.
“개띠.”
“?”
“왈왈왈!”
풍산개처럼 짖어대던 제인이 깔깔 웃었다.
목젖이 다 보일 만큼 웃어젖히는 그녀의 새빨간 혀에 피어싱이 달랑거렸다.
너무 놀라 굳어버린 강을 바라보며 제인이 윙크했다.
“평범한 자기소개 지루하잖아.”
하마터면 혼이 빠질 뻔했지만, 이내 정중하게 답했다.
“개띠면 저보다 연상이시네요.”
“하하! 잇 더즌 매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우리 친구 될 수 있어.”
적당히 웃어넘기고는 있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텐션이라 도무지 면역력이 생기질 않는다.
아주 조용히 다가와서 사인 요구를 하는 팬들 앞에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마당에 하필 아랫집 이웃이 이런 어마어마한 캐릭터라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녀에게 제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나 요가랑 필라테스 가르치거든요. 그러니까 운동 배우고 싶으면 연락해요. 서강 씨는 공짜로 츄레이닝 해줄게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던 그녀가 명함을 내밀며 덧붙였다.
“나, 꽤 유명해요. 실력 믿어봐도 괜찮아.”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휴대폰이 울었다.
“오우! 그럼 나 먼저 실례.”
제인이 그녀를 향해 바이(Bye)라고 속삭이곤 끈적한 윙크와 손 키스를 남긴 채 바쁘게 떠났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강은 그녀가 주고 간 명함을 들여다봤다.
화려함의 결정판인 명함에는 그녀의 영문 이름이 적혀 있었고, 강은 뒤늦게 제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보면 쉽게 잊힐 캐릭터는 아닌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헤집는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
차에 탄 뒤에도 손 키스를 날리며 사라지던 제인의 모습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강은 연신 그녀 생각뿐이었다.
개성이 강해서 한 번만 봐도 각인 될 캐릭터인데, 어디서 만났던 건지, 왜 그녀의 얼굴이 낯익은 건지에 대한 건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검색해보면 나오려나?’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문득 운전 중인 삼영을 보았다.
어쩌면 그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응?”
“혹시 제인이라고 알아?”
“제인?”
“응. 요가랑 필라테스 강사라는데, 혹시 아나 해서.”
“……아아!”
요란한 감탄사를 내뱉던 삼영이 열심히 손짓, 발짓하며 제인의 외모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 까무잡잡한 피부에 핑크색 브릿지 넣은 포니테일 머리? 부채만 한 속눈썹이랑 울버린만큼 손톱 기르고 다니는 화려한 여자!”
울버린은 조금 오버지만, 어쨌든.
“맞아.”
“요즘 엄청 핫하잖아. 아마 SNS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걸?”
“그렇게 유명해?”
“유명하지. 근데 제인은 갑자기 왜?”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어.”
“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어떻게?”
“아래층으로 이사 왔대.”
“이사?”
고개를 끄덕이자, 반쯤 감겨있던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야! 돈 많이 벌긴 벌었나 보다.”
순수하게 감탄하던 삼영은 신이 나서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마구 쏟아냈다.
“보니까 본업은 강사라던데, SNS에서 이것저것 물건도 많이 팔더라고. 아주 만물상이 따로 없다니까? 없는 거 빼고 다 있어요.”
“그래?”
“어. 화장품은 기본이고, 영양제랑 마늘 빻는 절구랑 마스크 팩 같은 것도 팔더라.”
……중간에 함정 하나가 끼어 있었던 거 같은데?
“아주 별 희한한 거 다 판다니까? EDM에 리듬 타면서 레깅스 차림으로 마늘 빻는데, 그 영상 엄청 유명해. 절구 완판됐잖아.”
제가 뭘 들은 건가 싶긴 한데, 더 웃긴 건 상상해도 그림이 썩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 요즘엔 너튜브도 하더라.”
너튜브라는 말에 그제야 그녀를 어디서 본 건지가 떠올랐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가끔 알고리즘 때문에 뜨는 너튜브 영상에서 봤던 것도 같다.
삼영이 오두방정을 떠는 사이,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산이 물었다.
“뭐 이상한 건 없었어?”
“뭐가?”
“그 여자 말이야.”
“글쎄. 좀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인사 정도?”
아직 잘은 모르지만, 텐션 하나는 확실히 높은 것 같다며 강은 그녀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들려주었다.
“교포 같던데? 말하는 거 보니까 우리말 좀 서툰 것 같더라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삼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왜 그래?”
“제인 충청도 토박이야.”
……미국 사람 아니었어?
“고향이 어디라더라? 온양이랬나, 당진이랬나. 아무튼 그쪽 어디였다고 한 거 같은데.”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아니고?
충격으로 굳은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 그럼 외국 생활을 오래 했나 보다.”
“외국 생활은 무슨. 태어나서 비행기 딱 한 번 타봤다던데. 그것도 양양 갈 때 국내선 타본 게 다래.”
“양양?”
“어. 강원도 속초 옆에 양양.”
“근데 말투가 꼭 외국 살다 온 사람 같던데? 쉬운 단어인데도 막 영어 섞어 쓰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초반에 욕 무진장 먹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다들 재미있어하는 분위기더라고. 할리우드 진출이 꿈이라 나름 영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나 봐.”
제인은 정말 알면 알수록 별난 사람같았다.
물론 좀 많이 시끄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꽤 재미있는 이웃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산은 이번에도 뉴페이스의 등장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조심해.”
“뭐를?”
“불현듯 나타나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람.”
“…….”
“위험하잖아.”
그 말에 강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처럼?”
하지만 그도 지지 않았다.
“그래. 나처럼.”
.
.
.
그날 이후.
스케줄이 있어 집을 나설 땐 가끔 산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오기도 했고, 퇴근할 땐 매번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제인과 셋이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인을 아예 안 마주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대부분 강이 혼자 있을 때 아파트 입구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곤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라 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친화력이 좋은 제인은 늘 에너지가 넘쳤고, 가끔은 협찬으로 얻은 것들이라며 이것저것 나눠주기도 했다.
친구라기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유쾌한 이웃.
강에게 제인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오늘 비가 온다고 했나?”
창문을 연 강이 작게 혼잣말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심상찮았다.
공기는 눅눅했고, 바람도 제법 불었다.
아무래도 우산을 챙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이 있는 날은 늘 숍을 가는 게 첫 번째 일정이었다.
원장은 늘 그렇듯 밝은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1차 손질을 마친 머리에 볼륨을 고정하기 위해 핀을 꽂아놓고, 익숙한 자리에서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요, 원장님.”
강은 그동안 묻지 않고 있던 사실에 대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 복귀하고 첫날 만났던 헤어 쌤이요.”
“누구? 아! 지은 쌤?”
“네. 그날 이후로 안 보이던데, 혹시 그만뒀어요?”
그녀의 물음에 원장이 진저리를 쳤다.
“말도 마. 그날 일하던 중간에 도망갔어.”
“도망이요?”
“그래. 잠깐 볼일 보고 오겠다고 나가더니 그대로 줄행랑 쳐버려서는 전화도 안 받고, 잠수 타버렸다니까?”
“설마요. 어디 아팠다거나,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고요?”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고 걱정 엄청 했는데, 3일 뒤엔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만둔다고 문자 하나 달랑 보내더라고.”
“통화는 안 하셨고요?”
“통화도 했지. 목소리 다 죽어가길래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건 아니라는데, 아무튼 몰라. 한 달도 안 돼서 그만둬버렸어.”
사실 물으려면 진작 물어볼 수 있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던 건,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어쩐지 그 이유가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저를 처음 만난 그날, 그만뒀다는 거죠?”
“응. 그날이었지. 그런데 왜? 자기 혹시 지은 쌤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원장은 그 이후에도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지만,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강은 그날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뒤늦게 제 머리를 감겨주던 지은이 중간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나선 쫓기는 사람처럼 샴푸를 끝내던 것과 메이크업을 받으러 가는 제게 안내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른 척 상황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이제 더 모른 척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녀도 역시,
‘……몽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