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입술에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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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입술에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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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입술에 각인
2022.07.17.
‘그동안 스쳐 간 사람 중 과연 몇이나 몽마였을까…….’
강이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전부터였다.
활동을 중단했어야 할 만큼 큰 사건이, 이제는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게 될 거라는 걸 인지하면서부터.
결정적 계기는 아마 와인바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 것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그날의 사고가 상기시켜준 격일 테니.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산은 이런 말을 했었다.
‘이제까지 겪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와 방식으로 너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 거야.’
괜히 겁을 주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나름의 목적을 위해 보호에 애써주겠지만, 당사자인 자신에게도 각오가 필요할 거란 얘기를 하려던 것일 거다.
악몽을 꾸지 않게 된 삶은 실로 신세계였다.
무척이나 행복했지만, 한편으론 태어나서 처음 누려보는 이 안락함이 얼마나 갈까 생각했었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얇은 유리 위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평온함을 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꿈에서나 봤던 일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키고 싶은 게 생겼다는 건, 잃을 게 생겼다는 것이다.
행복하다는 건, 그것을 놓치게 될까 봐 두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
느리고 길게 숨을 뱉었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는 현실을 이제는 맞닥뜨려야 할 때임을 안다.
“다 됐다.”
메이크업을 끝낸 원장이 거울을 보며 웃었다.
“어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컬러인데.”
“좋아요.”
“그치? 잘 어울린다.”
차분한 베이지와 브라운 계열의 색조가 이미지를 부드럽고 온화하게 만들어주었다.
상념이 걷힌 자리.
그곳엔 잘 꾸며진 서강이 있었다.
강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렵게 얻은 안락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진짜 행복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까.
.
.
.
종일 먹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이었다.
내내 무채색이었던 하늘은 해가 지자마자 빗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열어둔 창문을 닫으려는데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부는지 잠깐 사이에 꽤 많은 빗물이 튀었다.
뺨에 한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여름의 끝자락도 다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끈한 국물에 소주 마시기 좋은 날씨네.”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일은 간만에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날씨까지 도와주니 절로 술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소파에 앉은 강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묻고 가만히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했다.
잠을 잘 자지 못했을 땐, 내리는 빗소리만큼 마음이 소란했었다.
천둥, 번개라도 치는 날엔 날 선 예민함이 극에 달해 이틀을 꼬박 앓을 만큼 몸이 아프기도 했었다.
볼륨을 키워놓은 라디오 스피커에서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선율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또 감미로워지기도 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귀가 즐거웠다.
날씨와 잘 어울리는 선곡이라고 생각됐다.
그녀는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져, 산의 번호를 액정에 띄웠다.
그도 사생활이 있을 테니, 예고도 없이 이름을 불러 데려오는 일은 급할 때가 아니면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어쨌든 조만간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좀처럼 타이밍을 못 잡던 중이었는데, 어쩌면 오늘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미뤄만 두기엔 아직 우리 둘 사이엔 풀리지 못한 비밀도, 또 서로에 대해 더 알아야 할 이야기도 너무 많았다.
액정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빗소리에 파묻혀 한 박자 느리게 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인가?
오늘따라 귀로 흘러드는 모든 소리가 감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한 실장님.”
- …….
“지금 어디세요?”
공적인 자리 외엔 잘 안 쓰는 호칭이라 그런지, 그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상상 가, 조금 웃던 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 지금?
“응. 혹시 바로 와줄 수 있어?”
- 어디 갈 건데? 차로 이동해야 해?
“아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야.”
- 그럼 준비되는 대로 내려와. 1층에 있을게.
산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는 걸 보니, 정말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제 악몽을 먹기 전에 배를 채우려고 나간 거겠지.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들었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언제든 자신의 악몽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꿈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엔 작은 불안감으로 자리했다.
잠깐 사이에 퍼붓던 소나기가 조금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 좋은 밤이었다.
강은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파트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니 검은 우산을 쓰고 있는 산이 보였다.
무채색 차림의 그가 비 내리는 풍경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우산 안 가지고 나왔어?”
“네 거 같이 쓰려고 안 가져왔는데? 불편하면 가서 가져올까?”
“어디 갈 건데.”
“가까운데 갈 거야. 요 앞에 편의점.”
“편의점은 왜.”
“소주 사러.”
“…….”
산이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자, 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늦은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네가 먼저 그랬잖아.”
“…….”
“그렇다고 너한테 심부름시킬 수도 없고.”
“…….”
“비 오는 거 간만이라, 바람도 좀 쐬고 싶었고.”
“누가 뭐라고 했어?”
이마 위로 그의 간지러운 바람이 떨어졌다.
더 깊게 눌러썼던 모자의 챙을 조금 들고 바라보니, 웃고 있는 산이 보였다.
“그건 아닌데, 그냥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나 싶어서.”
“안 귀찮아.”
“그럼 안 귀찮은 김에 집에서 소주나 같이 한잔 할래?”
부탁하는 사람치고는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지만 그의 앞에서만큼은 가끔 뻔뻔하게 굴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때다 싶어 밀어붙인 강이 대답도 듣지 않고 냉큼 그의 우산 안으로 뛰어들었다.
산은 얼마 전 강이 주량을 물어보며 다음에 술이나 같이 마시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실 술은 별로였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명분은 둘째치더라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거절할 수가 없다.
대답 대신 내민 팔 한쪽을 덥석 잡은 강이 그와 함께 나란히 발을 뻗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으로 두 사람이 걸어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우산을 기울여주던 산의 어깨가 흠뻑 젖어갔다.
“나, 감기 걸릴까 봐 그래?”
“아프거나 다치면 곤란하니까.”
“왜?”
“네가 건강해야 내가 오래오래 포식하지.”
“감기, 몸살 정도로 안 죽어. 오히려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더 나쁜 악몽을 꿀 수도 있으니까, 너한텐 더 잘 된 거 아니야?”
그러자 시선을 내린 그가 말했다.
“아.”
“…….”
“그 생각을 못 했네.”
어깨를 다 덮을 정도로 기울었던 우산이 가차 없이 수평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본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꼭 붙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 *
두 사람은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본 후 돌아왔다.
편의점을 갈까 했지만, 인스턴트는 먹고 싶지 않았고 요리할 재료를 구하기엔 아무래도 근처 마트가 더 나았다.
강은 산을 아일랜드 식탁에 앉혀놓고, 마트에서 사 온 바지락 한 봉지와 집에 있던 화이트 와인을 꺼냈다.
“뭐 만들어?”
그가 묻는 말에 그녀가 말했다.
“바지락 술찜.”
“요리 좀 하나 봐.”
“못 해. 참고로 이건 처음 만들어보는 거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처음 하는 것 치고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대단한 스킬은 아니어도, 칼질 역시 제법 하는 것 같았다.
강은 냄비를 꺼내 올리브유를 두른 뒤 편으로 썬 마늘과 파를 넣어 기름에 향을 입혔다.
그러고는 씻어둔 바지락을 넣고 볶다가 화이트 와인을 부었다.
온라인 영상을 보며 조리법을 달달 외운 결과였다.
“끝.”
깔끔하게 외친 그녀가 소주와 소주잔 두 개를 가져와 세팅했다.
그러고는 빗소리가 들리게끔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소주를 마시기 딱 좋은 온도와 습도를 만들어줄 바람이 창을 통해 날아들었다.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낮춰놓은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그 사이.
잘 익은 바지락 술찜이 가운데 놓였다.
마지막에 페퍼론치노에 청양고추까지 넣는 바람에 제법 매콤한 향이 올라왔다.
그걸 본 산이 물었다.
“너 다이어트 중인데, 이런 거 먹어도 괜찮아?”
“먹고 운동하지 뭐. 하루쯤은 괜찮아.”
“아니.”
“…….”
“매운 거 먹어도 속 안 버리겠냐고.”
그녀는 뒤늦게 그가 제 살 걱정을 한 게 아니라, 자극적인 음식에 속을 버릴까 걱정했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웃었다.
“괜찮아. 나 매운 거 좋아해.”
그렇게 대담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아, 혹시 매운 거 못 먹어?”
“아니. 나도 좋아해.”
“…….”
“매운 거.”
시선을 맞추며 말하던 그가 잘 익은 바지락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에 간이 잘 배어있었다.
“어때? 괜찮지?”
요리에 자신이 없으면 긴장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말투가 아니었다.
즐기지 않아도 꽤 소질이 있다는 걸 본인도 어느 정도 아는 것같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산도 부담 없이 담백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었다.
“맛있어.”
그래도 칭찬은 좋은지 강의 입가에 숨기지 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 삼영 오빠나 반이 말고 이렇게 둘이 술 마시는 거 네가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묘하게 들떠있었다.
반면 산은 자신이 이반 다음 차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넘어가기로 했다.
그 사이, 강이 능숙하게 소주를 흔들어 땄다.
투명한 액체가 금세 잔 두 개에 가득 찼다.
“마실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광고 노리고 연습 좀 했지.”
강이 시크하게 웃으며 든 술잔에 산이 마지못해 잔을 부딪쳐주었다.
적당한 온도에 빗소리까지 들리니, 술이 아주 달았다.
게다가 내일은 모처럼 온전한 하루를 쉬는 날이라 마음에 부담도 없었다.
“술은 언제 처음 마셔봤어?”
“스무 살.”
강이 물었고, 산이 덤덤히 답했다.
“나는 열여섯 살에 처음 마셔봤는데.”
“날라리였네.”
“그러는 넌? 술 안 마셔도 되는데, 굳이 왜 마셨어?”
“사람들 틈에 섞여 살려면 사람 흉내는 내고 살아야 했으니까.”
“아…….”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렇게 갑자기 와닿곤 한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와 다른 존재들과 섞여 살아간다는 건.
생각해보니 산이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아왔는지.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그가 인간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 건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신중히 말문을 틔웠다.
“있잖아.”
무얼 먼저 물어야 좋을까.
고민해봤지만, 사실 정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래서 강은 그냥 떠오르는 대로 먼저 묻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떠오르게 될 테니까.
“내가 부르는 이름은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야?”
그녀가 묻는 말에 산이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강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느릿하게 올렸다.
“이제 좀 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미안. 20년 동안 밀린 잠자느라, 정신이 없었어.”
적당히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산은 그런 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가 물었던 질문에 대해 답을 들려주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부르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일이야.”
“…….”
“간절할수록 큰 힘을 발휘하지.”
“그러니까 언제부터 그런 게 가능했던 건데?”
그 말에 그가 강의 붉은 입술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네 입술에 내 이름을 새겨넣었을 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