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취한 밤
(24/118)
24. 취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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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취한 밤
2022.07.21.
“이름을 부른다는 건, 부르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일이야.”
“…….”
“간절할수록 큰 힘을 발휘하지.”
“그러니까 언제부터 그런 게 가능했던 건데?”
산의 오묘한 눈동자가 그녀의 붉은 입술로 향했다.
“네 입술에 내 이름을 새겨넣었을 때부터.”
이름에 힘을 실어둔 건 강이 예상치 못한 위험에 처했을 때를 위해서였다.
언제든 그녀가 부르면 갈 수 있도록.
하지만 강은 그의 시선이 닿았던 제 입술을 방어하듯 누르며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렀다.
“새겨? 언제…… 아니, 어떻게?”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멋대로 몸에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영 꺼림칙한 듯한 표정이었다.
산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었다.
“내가 맨 처음 네 꿈에 나타났던 날.”
“…….”
“기억 안 나?”
한산. 내 이름이야.
정신없이 지나가 안개처럼 흐릿했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꿈에서 만난 산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곧 만나자.
그녀는 제 입술을 훔치던 엄지 끝의 감촉을 떠올렸다.
불길이 지나간 듯 강렬한 감각이 꿈인 것치고는 무척이나 생생했던 기억이 난다.
맞아.
그날. 그렇게 꿈에서 깨고 난 후,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었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거웠고, 찬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도 열이 식지 않아 다음 날까지 끙끙 앓았었지.
한층 또렷해진 기억 너머로 그와 현실에서 처음 마주하던 날이 겹쳤다.
‘한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왜 잊었을까.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너는 몇 번이나 네 이름을 알려줬었는데.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강은 여전히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그래서 산은 그녀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인간의 불행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몽마들에게 그런 삶을 사는 인간들은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해.”
“인간의 꿈은 심리가 반영되니까?”
“비유하자면 비옥한 땅 같은 거지. 땅이 좋으면 심어놓은 불행은 더 풍성한 공포와 불안을 생산해낼 테니까.”
“…….”
“불행한 인간 하나만 제대로 골라도, 포식하는 거야.”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악몽을 꾸게 하는 건, 열매를 얻기 위해 씨앗을 심고 가꾸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리고 악몽은 오래되고 지독할수록 몽마에게 풍부한 영양을 공급해.”
그렇게 얻은 생명력은 곧 힘이 되고, 힘은 곧 권력이, 권력은 곧 생존과 직결된다.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은 현존하는 인간 중 가장 지독한 꿈을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꿔온 인간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받은 이유고, 산이 그녀의 곁에 머무는 이유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은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
“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내리는 빗소리만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산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지금 불행해?”
그의 대답에 강은 짧게 고민했다.
그러다 곧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살 만해.”
“…….”
“행복한 건 아직 모르겠고.”
악몽을 꾸지 않게 됐을 때만 해도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을 판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더 이상 꿈에서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끔찍한 것들이 현실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제 악몽을 가져간 눈앞의 몽마와는…… 자유를 나눠 가진 기분이랄까?
서로가 원하는 걸 주고받는 대가로 사이좋게 수갑이라도 차고 사는 느낌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일이지만, 달갑지만은 않은 일.
고맙지만 불편하고, 싫은 건 아니지만, 반갑지도 않은 일.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더니,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뭘 그리 욕심냈나 싶어 억울해지기도 한다.
그저 평범한 삶을 원했을 뿐인데.
강에게는 그 평범함이 너무나 어려웠다.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
문득 떠오른 질문이 막을 새도 없이 그녀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서 곧장 말을 덧붙였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잖아.”
“…….”
“예를 들어 내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너랑 남편 사이에 끼어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퍽 진지한 강의 모습에 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냐. 나는 진지한데.”
“글쎄. 너무 먼일 같아서 상상이 잘 안 가네.”
“멀기는 뭐가 멀어? 나 결혼 일찍 할 건데?”
발끈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웃는 낯으로 충고했다.
“그때까지 죽지나 마.”
살아있어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하지.
안 그래?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지만, 강은 산이 한 말에서 새삼 그 말의 뜻이 가진 무게를 실감했다.
죽을힘을 다해 살고 싶었던 이유.
행복하기 위해서다.
타고난 운명이나 불행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당당히 맞서고 싶어서.
강이 결의를 다지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술을 털어 넣은 뒤, 재차 물었다.
“근데 몽마들은 왜 그렇게 나를 못 죽여 안달인 거야? 아무리 인간의 공포를 먹는다고 해도, 내가 죽어버리면 다 끝이잖아.”
몽마들이란 본디 자제력이 약해, 철저히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을 노려 금기를 깨는 게 식욕을 참는 것보다 어려울 거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인간의 공포가 극한에 달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을 직감한 순간이라 그런 걸까?
손끝에서 놀던 잔을 입에다 가져다 댄 산이 천천히 내용물을 비워냈다.
그러고는 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꿈보다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건 바로 그 악몽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혼이거든.”
그래서 몽마들은 종종 자살한 인간들의 원귀를 먹어 치운다고 했다.
운명을 거슬러 죽음을 앞당기는 인간의 죽음은 명(命)을 관장하는 하늘에서도 예측 불가한 변수라 늘 빠른 대처를 하기 어렵다고.
그리고 몽마들에게는 그것이 곧 인간을 직접 죽이는 금기를 깨지 않고도, 고도의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결국 몽마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사실상 깨져버린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몽마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든지 간에 결국 저를 지켜줄 수 있는 건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남은 건, 아주 원초적인 질문뿐이었다.
“그럼 너는?”
그의 정체만큼이나 궁금했던 것.
“너는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건데? 그냥 꿈만 먹으면 되는 거야?”
바로 그의 목적이었다.
산은 고요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 꿈을 독식하길 원해.”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들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네가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게 하는 일.
그게 먼저다.
“궁극적인 목표가 그거야? 원하는 거나 더 바라는 건 없고?”
그에 산이 조용히 답했다.
“현존하는 가장 좋은 악몽을 독식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정점에 서는 날도 오겠지. 아무도 나를 위협할 수 없고, 아무도 내 위에 설 수 없게 되는 순간이.”
“…….”
“일단은 그게 목표야.”
“왕이 되겠다는 거네?”
“수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일단은 그래.”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다른 건 더 궁금한 거 없고?”
“많은데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이미 과부하라.”
“그래?”
되묻는 산의 눈매가 묘하게 휘었다. 동시에 한쪽 눈썹이 까딱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뭐야, 그 눈빛은?”
“아니. 난 또 다른 게 궁금할 줄 알았지.”
“다른 거라니?”
“예를 들면 뭐, 내가 왜 그렇게 손가락에 집착하는지 같은 거.”
“……손가락?”
“어. 나는 네 손가락 감촉이 그렇게 좋더라.”
뒤늦게 그가 손끝에 입을 몇 번 맞췄던 걸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산을 흘겨보았다.
“얼굴 안 빨개지네?”
“빨개지면 네가 더 신날 테니까.”
“그런 게 조절이 돼?”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었어?”
그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강은 그 어떤 연기를 할 때보다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산이 외려 김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녀가 결국 되묻고 만 것이다.
“왜 했는데?”
“뭐가?”
“손가락에 입은 왜 맞췄냐고.”
내려갔던 산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유가 궁금하긴 한가 보지?”
결국 말려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더 뭐라고 하진 못했다.
궁금하긴 했으니까.
악의 없이 웃던 산이 대답했다.
“그냥 위로해주고 싶었어.”
“…….”
“나, 여기 있다고.”
그의 대답에 강은 잠시 멍해졌다.
생각해보니 그가 그런 행동을 한 날은 늘 평소보다 강도가 높은 악몽을 꾸거나 신변에 일이 생겨 불안감이 극도로 다다른 날이었다.
접촉으로 꿈을 흡수하며 인간이 느끼는 공포심과 불안, 두려움을 인지하는 걸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것을 양분 삼아 사는 존재가 어떤 방법이든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게.
그녀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산이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자, 강이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뭐해? 안 부딪치고.”
그 말에 그도 못 이긴 척 잔을 가져다 댔다.
짠 -
청량한 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울렸다.
.
.
.
쟁여두었다가 가끔 생각날 때 먹을 거라며 소주 여섯 병이 들어있는 번들을 집어왔었다.
그런데 지금 테이블 위에 줄을 지어 늘어선 병이 넷.
그중에 하나는 채 반도 비우지 못했다.
산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강을 보며 말했다.
“넌 술이랑은 안 맞는 걸로.”
애초에 그녀가 말하기를 저도 제 정확한 주량을 모른다기에 술깨나 마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병을 비웠을 때, 눈이 풀리더니 채 두 병도 비우지 못하고 뻗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랄 건, 술에 재능도 없지만, 주사도 없다는 것.
앞에 제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강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뺨과 코와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서.
그는 턱을 괸 채 잠든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강아.”
그러고는 느긋하게 웃으며 질문했다.
“내가 네 옆자리 내어달라고 했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
“그거 좋은 생각인 거 같다고 그랬었잖아.”
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침실로 향하며 말했다.
“분명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