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숨바꼭질 (25/118)


#25. 숨바꼭질
202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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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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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옆자리 내어달라고 했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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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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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좋은 생각인 거 같다고 그랬었잖아.”

어둑한 거실.

발소리조차 죽어버린 고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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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침실로 향하는 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커다란 통창으로 쏟아지는 은색 달빛이 새하얀 침대 위로 내려앉았고, 강의 몸에서는 보랏빛 연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산이 온몸으로 악몽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연기는 곧 엉킨 실타래처럼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끼이익 -

저절로 닫힌 문이 그와 그녀를 온전히 침실 안에 가두고, 산은 깊은 잠에 빠진 강을 얌전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 옆에 누워 턱을 괸 채,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점점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꿈의 기운이 끝도 없이 그에게로 흘러들었다.

빨아들이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연기의 형상을 띤 악몽은 멀리서 보기에 산의 몸에 덩굴처럼 얽혀들어 그를 포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의식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렴풋이나마 강이 꾸고 있는 악몽의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무의식에 완전히 침투하면, 그녀의 꿈을 생생히 엿보는 게 가능했다.

사실 산은 아까 강의 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인물 중 하나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뭐, 중간에 그녀가 전화하는 바람에 결국 돌아와야 했지만.

그래서 오늘은 강의 무의식에 다시 한번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아마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조만간 그녀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고, 악몽을 먹어 치우던 존재를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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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너도 내 존재를 눈치챘을 테니까.”

사이좋게 꿈을 나눠 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시일 내에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몽마는 잠든 인간의 곁에 찾아와 그들이 꾸는 악몽과 공포심을 흡수하지만, 소수의 상급 몽마들은 물리적 접촉 없이도 인간의 꿈에 침투해 그들의 악몽을 먹는다.

게다가 그들이 더욱 끔찍한 꿈을 꾸도록 직접 악몽의 세계를 구축하거나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 목적은 대부분 인간에게 나쁜 기억을 심기 위함이었고, 강에게 말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농부가 비옥한 땅을 경작해 좋은 열매를 얻는 이치였다.

한 마디로 삶 자체를 지배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거였다.

그렇게 특별한 악몽을 꾸는 인간들은 그 수가 아주 적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은 그 피폐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지 못해 단명(短命)했다.

그리고 강은 그 모든 걸 견뎌내고 있던 유일한 인간이었다.

어찌 보면 독하다고 느껴질 만큼 대단했고, 한편으로는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산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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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도 다들 믿을 수가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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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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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강이 스스로 행복해질 권리를 내세우며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던 날을 떠올렸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대로 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던 그녀의 오기와 패기도 결국 삶에 대한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

산은 강이 추구하는 행복의 정의가 어떤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결국엔 그가 무의식적으로 좇던 자신의 목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에게도 위협당하지 않고, 타고난 운명에 맞서며, 제가 살아갈 길을 주도하는 것.

그게 그녀가 바라는 거였고, 또한 자신도 바라는 거였다.

그걸 위해 강은 이 지독한 악몽을 끊어내야 했고, 산은 그녀의 악몽을 취해 누구도 대항 못 할 힘을 얻어야 했다.

결국엔 ‘살기’ 위해서.

허기를 달래지 못하고 강의 악몽을 취하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아무리 취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서 괴로웠고, 그래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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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떻게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거지?”

서강은 고귀하고, 특별했다.

아름답고, 맛있는 데다, 영양분까지 높은 훌륭한 인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끔 잠든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강이 오래오래 죽지 않고, 견뎌주어, 제가 원하는 걸 내어줬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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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천천히 그녀의 악몽을 흡수하던 산이 고개를 내려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의 감상은 이쯤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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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만나자.”

이젠 계획한 일을 이행할 시간이었다.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운 그가 단단히 붙들고 있던 강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며 수면 상태에 돌입했다.

몽마가 인간의 꿈에 침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산이 그러하듯 인간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무의식에 들어가는 경우.

두 번째는 인간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고, 물리적 접촉이나 거리에 제한 없이 그 문을 통해 꿈에 침투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경우 모두, 몽마 역시 수면 상태가 된다.

산의 의식이 현실을 벗어나 깊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무의식 진입에 성공한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녀의 꿈속은 늘 이토록 어둡고 무거웠다.

현실 세계보다 몇 배는 더한 중력감이 온몸을 끌어당기고, 어깨를 누르는 것만 같았다.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길을 걷고 있자니, 저 멀리 잠든 강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커다란 수조 안에 갇힌 것처럼 공중에 뜬 채 깊은 잠에 빠진 채였다.

강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바다를 유영하는 인어처럼 넘실댔다.

심장 근처엔 푸르고 붉은 연기가 저들끼리 뒤엉켜 보랏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두 가지 색으로 나뉘어 흩어지길 반복했다.

산이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가니 물에 빠지는 것처럼 몸이 쑤욱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그녀에게 손끝이 닿았고, 두 사람은 함께 악몽에 삼켜졌다.

깊이, 조금 더 깊이.

가라앉기 시작한 그의 의식이 완전한 꿈의 세계에 당도했다.

희뿌옇게만 보이던 강의 악몽은 하루가 지날수록 선명해졌다.

꿈을 이루는 모든 구조가 빠르게 진화해 엉망이었던 형체를 다듬고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바닥이 질퍽했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미했던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솨아아 -

어둑한 안개가 걷히며 검은 숲이 나타났다.

가려진 나무들 사이에 오래된 폐건물이 하나 보였다.

해성 보육원.

네 살 때 친모에게 버림받아 놀이공원에 유기된 강이 자라온 곳이었다.

그녀의 집이었던 동시에 지옥이기도 했던 곳.

바닥에 떨어진 오래된 나무 간판을 발견한 그가 막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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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천지를 뒤흔들 듯 찢어지는 비명이 검은 하늘을 울렸다.

강이었다.

산은 곧장 몸을 움직여 빠르게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있는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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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윽……!”

난장이 된 보육원 건물 복도에 목이 틀어 잡힌 강이 있었다.

커다란 덩어리의 형상을 띤 검은 안개가 두 개의 붉은빛을 번쩍이며 형형하게 빛났다.

순식간에 그것에게 접근한 산이 붉게 빛나는 구멍을 향해 손을 찔러넣었다.

그러고는 물컹하게 만져지는 무언가를 터트릴 듯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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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아아악!」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던 괴물의 일부가 쩍 벌어지며 새빨간 혀가 날름거렸다.

가시덤불처럼 뻗어 나온 그것이 산의 측면을 향해 날아갔지만, 그전에 그가 움켜쥐고 있던 것을 터트린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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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악!」

퍼엉!

짐승의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검은 형상이 물풍선 터지듯 터져나갔다.

퍼버벅!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 튄 검붉은 선혈이 건물 전체에 뒤덮여 비처럼 흘러내렸다.

튕겨 나간 강이 복도 끝까지 밀려 나갔다.

산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기도 전에 땅이 흔들리더니, 지축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지면을 디딘 그가 솟아나는 바닥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고,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더니 넝쿨 같은 검은 연기가 뻗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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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그것은 강의 발목을 휘감아 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속절없이 끌려가 버렸다.

중간에 튀어나온 벽의 기둥을 붙들고 버티던 강이 힘껏 저를 묶고 있는 것에 반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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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가! 놔!”

그걸 본 산이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고, 이내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던 검은 넝쿨 일부가 잘려 나갔다.

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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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아악!」

짐승의 비명이 짧게 들렸다가 사그라지고, 몸이 자유로워진 강이 재빨리 일어났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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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산을 알아보지 못하는 강의 눈빛이 공포에 흠뻑 젖은 채 흔들렸다.

저번에는 알아보는 것 같더니, 아직 완전히 자신을 자각하진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곧 전력을 다해 그에게로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강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방향에 맞춰 방해물이 될 만한 것들을 전부 부수거나 날려버렸다.

그녀 역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와의 거리는 단 1cm도 좁혀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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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줘!”

강이 외치던 순간이었다.

등 뒤의 커다란 구명에서 튀어나온 검은 인간의 형상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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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어딜 가. 넌 내 거야.」

그것은 으레 꿈속에 나타나는 것들이 그러하듯 검은 연기를 뭉쳐놓은 것 같았지만, 그동안 본 것 중 가장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처녀 귀신처럼 긴 머리를 풀어 헤쳐 반쯤 얼굴을 가린 놈이 붉은 눈을 빛내며 짐승의 송곳니를 드러냈다.

놈은 길게 찢어진 입 안에서 새빨간 혀를 내밀더니 그녀의 목덜미와 귀를 길게 핥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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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기겁을 한 강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와 그녀의 몸에 얽혀있던 형체가 엄청난 힘에 의해 앞으로 당겨졌다.

정확히는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았다.

헉 소리도 내지 못한 찰나.

산의 손바닥에 얼굴이 통째로 틀어 잡힌 괴물이 괴로운 비명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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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으…… 윽!」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표정으로 그것과 강을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강의 몸을 더욱 세게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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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익! 너 뭐야!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화가 난 녀석이 따지고 들었지만, 산은 대꾸 없이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퍼억!

펄떡대는 심장이 그의 손아귀에 감싸였고, 녀석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온몸을 퍼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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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살려……!」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내뱉은 말에 산이 움켜쥔 것을 강하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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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심장과 함께 그의 코앞까지 당겨진 그것의 눈이 붉게 빛났다.

서늘하게 눈을 맞추고 있던 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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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 거라고?”

짧은 질문과 함께 그가 쥐고 있던 것을 산채로 뜯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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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할 틈도 없이 반쯤 심장이 날아간 녀석이 공포에 몸부림치며 반쯤 뒤집어 까진 눈으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피거품을 문 채 발끝을 덜덜 떠는 게 인간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은 조금 전 뜯어낸 심장에서 튄 피를 얼굴에 묻힌 채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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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보낸 놈한테 가서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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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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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은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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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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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적대다 잡히면 곱게 못 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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