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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감각의 온도 (27/118)


#27. 감각의 온도
2022.07.31.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뻔했다고!


「학…… 하악……!」

사무치도록 후회하던 녀석이 숨을 헐떡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냉소적인 시선에 목이 졸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침묵을 못 견딘 놈이 간신히 입을 뗐다.


「이…… 사오 님.」

“꼴이 엉망이네.”

「…….」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일 만큼.”

내내 말이 없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껏 움츠러든 녀석의 고개는 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면목 없습니다.」

“꿈은.”

「그것도…… 뺏겼습니다.」

놈의 대답에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이사오가 묵직한 한숨을 흘렸다.


“굶어 죽으라는 거군.”

그의 반응에 바닥에 꿇어 앉아있던 녀석은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이미 충분히 죽을 것 같은데, 더 죽을 것 같았다.


「죽여주십시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놈이 진심을 담아 외쳤지만, 그는 시큰둥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참을 두려움에 떨다가 슬쩍 고개를 들자, 아득하게 높은 곳에 선 왕이 보였다.


“되찾아와.”

「……예?」

당황스러운 마음에 되물었지만, 답은 두 번 돌아오지 않았다.

놈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리는 놈을 향해 그가 물러가라 손짓했다.

부리나케 걸음을 물리려던 녀석의 뒤로 나긋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마지막 기회야.”

움직임을 멈춘 놈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턱을 괸 채 녀석을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 위로 선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또 실패하는 날엔.”

「…….」

“넌 오늘 죽지 못할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반밖에 남지 않은 심장이 지구 핵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뒈질 수 있을 때, 뒈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걸.

놈은 뒤늦게 깨달았다.

.
.
.



“다 울었어?”

산이 티슈를 건네며 물었다.

코끝이 빨개진 강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강이 지금의 삶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무서운 거 하나도 없을 것 같던 서강이 저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구니 말이다.

잠시 후.

강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듯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있잖아.”

“…….”

“오늘 꾼 꿈은 무슨 내용이었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해성 보육원.”

“…….”

“보육원 복도에서 네가 목이 졸린 채 있었어.”

그 말에 강의 표정이 다시 굳어버렸다.

산이 나타나기 전, 그녀가 꿈의 내용을 기억할 때도 늘 잊을만하면 나오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꾸는 모든 꿈의 내용은 현실과 늘 밀접하게 연결된 형태였다.

고로 직접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악몽이 재현된다는 거였다.


“이전에도 가끔 그런 꿈을 꿨었어.”

제 양쪽 팔을 감싼 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화재로 죽은 선대 원장이 툭하면 폭력을 일삼았거든.”

강이 처음 보육원에 들어갔던 4세부터, 파양을 당하고 다시 돌아와 19세가 될 때까지.

해성 보육원의 1대 원장이었던 최갑훈은 자애로운 신부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는 아주 악랄했고, 지능적이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멀리서 보기엔 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외부에 알려진 그의 천사 같은 모습 뒤로 끔찍한 양면성이 있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최갑훈은 서둘러 해외 도피를 준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육원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고, 그때의 사고로 원생 6명과 보육교사 2명, 그를 포함해 총 9명의 인원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부재로 부원장이었던 감영희가 2대 원장이 되었다.


“선대 원장은 죽은 게 확실해?”

“응.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아주 끔찍하게 타 죽었어.”

비록 그 끔찍한 모습을 하고 이따금씩 꿈에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최갑훈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사이 다시 물었다.


“그럼 보육원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랑은 계속 연락하고?”

“제일 친하게 지냈던 한 살 아래 동생이 있었는데…….”

“…….”

“그때 사고로 죽었어.”

이호정.

사망 당시 18세.

움푹 파인 보조개가 사랑스러웠던 밝고 씩씩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보육원에서 학대를 당하거나, 놀이공원에 버려지던 순간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게 바로 그때의 장면이 꿈에 나올 때였다.


‘언니!’

치솟는 불길 너머로 애타게 자신을 불러대던 호정의 얼굴이 꿈에서 깨고 난 뒤에도 자꾸 생각나서.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면서도, 죽은 그 아이가 꿈에 나와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원망하는 걸 볼 때면 늘 무너지곤 했다.


“그럼 지금은 거기랑 아예 접점이 없는 건가?”

“지금 남아있는 사람 중엔 2대 원장님이랑 제일 오래 계신 보육 선생님 한 분만 알아.”

“2대 원장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내가 중학생 때 부임해오신 분인데, 그분 덕분에 그래도 견딜 만했어.”

갑훈과 달리 영희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늘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폭력과 가스라이팅으로 제대로 입도 못 열던 아이들의 피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 것도 그녀였고, 갑훈의 실체를 용기 있게 세상에 알린 것도 그녀였다.

그뿐 아니라, 영희는 화재로 무너진 보육원을 재건하고, 70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아, 그분은 내가 보육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계시던 분인데, 원래는 식사만 담당해주시던 분이었어. 그러다 재건 후에 원장님 권유로 보육 일 시작하셨고.”

강과 보육원이라는 연결 고리 안에 접점 있는 인간이 죽은 선대 원장까지 총 셋.

산은 그동안 봐온 그녀의 꿈에서 봤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미리 말을 못 했는데.”

“…….”

“실은 오늘 삼영 오빠랑 보육원에 가기로 약속했었어.”

“원장님 만나러?”

“응. 1년에 한 번씩은 꼭 찾아뵀었는데, 올해는 한번도 못 갔거든.”

그렇게 말한 강이 바로 제안했다.


“너도 같이 갈래?”

그 말에 산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가 어젯밤 찾아가려고 했던 곳도 해성 보육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장소라 그곳에 무언가 실마리가 있지는 않을까 해서.

다만 강에게 섣불리 무언가를 털어놓기엔 시기상조라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로 했다.


“그래. 같이 가.”

산의 답에 그녀도 안심한 듯 조금 웃어 보였다.


“그럼 좀 이따 다시 올게.”

시계를 확인한 그가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잠깐만.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은 강 때문에, 도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너 말고 다른 몽마들은 어떻게 내 꿈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거야?”

손가락을 교차해 가볍게 깍지를 낀 산이 무릎 위에 손을 걸쳤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그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몽마가 인간의 꿈속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

“첫 번째는 나처럼 물리적 접촉을 통해 들어가는 경우고, 두 번째는 네 몸에 미리 새겨둔 문을 통해 들어오는 거야.”

“문?”

“그래. 몽마들은 그걸 꿈의 문이라고 불러.”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황급히 제 몸을 살폈다.

입술에 부름의 문을 새겼다는 걸 들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인간 눈에는 안 보여.”

“그럼 너는? 넌 볼 수 있어?”

“접촉하면 볼 수 있어.”

“…….”

“아직 못 찾았고.”

“아직……?”

“네 몸 어딘가에 있겠지만, 멋대로 들여다보고 만질 순 없으니까.”

일단 눈에 쉽게 띄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산은 계속해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몽마가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할 때, 그들은 인간과 똑같이 수면 상태가 되고, 한번 새겨진 문은 새긴 이가 죽거나 빈사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동시에 여러 개의 문이 새겨질 수 있지만, 몽마들은 나눠 먹는 걸 안 좋아해. 힘 있는 상급 몽마들일수록 더 그러지.”

“그럼 내 몸에도 문이 여러 개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하나겠지만, 이전에 새겨졌다 지워진 흔적은 꽤 있어.”

천천히 팔을 뻗은 산이 손끝으로 그녀의 손등과 손목 그리고 팔을 짚어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닿은 자리엔 제각각 특유의 문양을 띤 흔적이 불씨가 붙은 것처럼 빛을 냈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당연히 인간인 강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것은 마치 몸에 새긴 문신 자국을 인두로 지져 없앤 것처럼 모양새가 거칠었다.

아마 현재 그녀의 꿈을 지배하는 몽마가 이전에 문을 새긴 몽마를 모두 죽여 없앤 뒤, 악몽을 독식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강은 산의 손가락이 지나간 팔 위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포기했다.

정말 인간의 눈엔 보이지 않는 건지, 작은 흉터 하나,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문이라는 건 어떻게 새기는 건데?”

“물리적 접촉으로. 아마 화상 입은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을 거고,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을 거야.”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통증.

며칠간 이어지는 고열.

언젠가 산이 제 입술에 이름을 새겨뒀다고 했을 때,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 외에 뭔가 뚜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고열에 시달린 적은 있었지만, 몸이 안 좋거나 독한 감기에 걸릴 때도 으레 나타나는 증상이었으니까.


“어쨌든 그걸 새길 때만큼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

“너는 접촉으로 그걸 발견할 수 있는 거고.”

“…….”

어딘가 모르게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한 그녀의 눈빛에 그는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은 곧 재차 확인하는 게 의미 없는 일이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보이는 데만 우선 찾아봐 줄래?”

그의 앞에서 옷을 발가벗을 수는 없지만, 꿈의 문을 발견하면 적어도 저를 위협하는 존재의 실체를 더 빨리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강과 산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요청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천천히 그녀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걸음이 멈춘 곳은 강의 등 뒤였다.


“머리 좀 올려봐.”

귓가에 나긋하게 떨어지는 요청에 그녀가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모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가늘고 하얀 목선과 어깨 일부가 드러났다.

다가간 산의 손끝이 강의 목덜미에 닿았고, 이내 척추를 따라 스르륵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리가 사라진 새벽.

저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을 물게 되는 감촉에 온몸의 감각이 기민해졌다.


 
그러던 중이었다.

툭.

맨살을 훑던 그의 검지 끝이 옷자락에 걸렸다.


“…….”

“…….”

둘 중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않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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