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꿈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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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꿈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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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꿈의 문
2022.08.04.
툭.
맨살을 훑던 검지 끝이 옷자락에 걸렸다.
여린 어깨가 흠칫 떨렸다.
“…….”
“…….”
말이 사라진 공간.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묘한 긴장감.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고인 침을 삼키는 행위조차 조심스러워지던 그때.
잠시 멀어져 있던 산의 손끝이 그녀의 등 어딘가를 콕 짚었다.
“이쯤 어디인 것 같아.”
침묵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막혀 있던 숨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강이 물었다.
“……혹시 옷 때문에 제대로 안 보이는 거야?”
“응.”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민망한 상황을 이어가지 않으려면 다음 행동에 망설임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은 어깨와 등이 훤히 보일 만큼 셔츠를 반 정도 내린 후 말했다.
“제대로 짚어봐.”
고개는 여전히 앞을 향한 채였지만,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산의 시선이 느리게 내려왔다.
새하얀 등은 가루 낸 달빛을 뿌린 듯 시리고 투명한 빛이 났다.
그는 하려던 일도 잊은 채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던 산이 의식적으로 숨을 뱉고는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경추를 지나 척추가 뻗은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직!
불꽃이 튄 것 같은 감각을 느낀 손끝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방향을 틀었다.
문은 척추와 오른쪽 견갑골 사이에 새겨져 있었다.
집중하느라 일자로 맞물려있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그녀의 뒤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찾았다.”
“…….”
“꿈의 문.”
산이 손끝으로 그 부위를 콕 짚자, 순간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번쩍 일었다.
“앗! 뜨거워!”
아주 잠깐이었지만, 머리가 쭈뼛 설만큼 강렬한 고통이라 강의 미간이 바로 일그러졌다.
원형의 가시덩굴 같은 문양은 얼핏 보면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의 형상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불씨처럼 빛을 발했다.
눈매가 가늘어진 산이 손끝으로 문양이 새겨진 곳을 살살 문질렀다.
검은 재가 흩날리는 듯한 환영과 함께 닿았던 손에 열기가 느껴졌다.
반쯤 고개를 돌린 강이 물었다.
“뭐 좀 느껴지는 거 없어?”
“느껴지는 거?”
“네가 아는 몽마들 중에 문을 새긴 장본인이 있을 수도 있잖아.”
“몽마랑 천인들은 작정하고 기를 숨기면 같은 종족들도 알아채기가 힘들어. 교류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
“…….”
“하지만 기운이 읽혔으니, 놈도 곧 모습을 드러낼 거야.”
손을 뒤집어보자, 검지와 중지 끝에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검은 연기와 함께 재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쪽도 꿈에서 나를 봤을 테니까.”
산이 그녀의 악몽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에서도 대놓고 강의 측근에 자리한 건, 나를 죽이러 오라는 의미였다.
놈이 실체를 드러내야, 죽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악몽 속에 나타나 걸레짝이 되어 돌아갔던 그놈.
산은 분명 그 녀석이 매개체일 거라고 확신했다.
.
.
.
푸르른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해가 떠올랐다.
오전 8시 30분.
‘같이 아침 먹고 출발하게 그때 와.’
‘…….’
‘왜 대답이 없어? 뭐 할 거 있어?’
‘딱히 없는데.’
딱히 아침을 먹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이어진 강의 말에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와. 혼자 밥 먹기 지겨우니까.’
그렇게 그녀가 일러준 시간대로 다시 강의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빵을 꺼내 굽고, 주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곁에 다가선 그가 물었다.
“도와줄까?”
“아, 그럼 달걀 프라이만 좀 해줄래?”
강은 거절하는 법 없이 곧장 도움을 요청했다.
주스로 만들 과일과 채소를 손질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였다.
산은 순순히 인덕션으로 가서 미리 꺼내져 있던 달걀을 집었다.
뒤늦게 그의 요리 실력이 걱정된 강이 힐끗 뒤돌아보았다.
‘밥이 주식도 아닌 애한테 너무 큰 걸 바랐나? 에이, 그래도 프라이 정돈데 저것도 못 하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산은 팬이 달구어질 동안 한쪽 손을 바지에 꽂아 넣은 채 서 있었다.
한쪽 다리가 살짝 구부러진 걸 보니, 완전히 힘을 빼고 짝다리를 짚고 선 모양새였다.
그는 곧 같은 자세로 기름을 두르고 한 손에 달걀 두 알을 함께 쥐었다.
그러고는 바지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 손잡이를 잡고 윗부분에 달걀을 차례로 부딪쳐 깬 뒤 팬에 떨어트렸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산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반숙. 완숙.”
미덥지 못한 마음에 훔쳐본 걸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란 강이 말했다.
“바, 반숙!”
“더 조리할 거 있으면 같이 줘.”
그가 손을 뻗으며 하는 말에 그녀가 얼른 베이컨과 아스파라거스를 가져다주었다.
산은 능숙하게 불 조절을 해가며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달걀 프라이와 베이컨, 채소 구이를 완성해냈다.
무심하게 해낸 것치고는 너무도 훌륭한 모양새라 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해?”
“이게 요리의 범주에 들어가나?”
“그래도. 너무 신기하다.”
“라면이라도 끓여냈다간 난리 나겠군.”
의외로 인간의 음식에 진심이라 미식가나 요식업에 종사하는 몽마들도 많다는 이야길 들려주니, 그녀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마치 재미난 전래동화라도 듣는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밥 안 먹어도 상관없는데, 괜히 나 때문에 먹어주는 거 아니야?”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지는 강의 모습에 산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괜찮아.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온 시간이 있어서, 익숙해.”
돌아온 반응에 강은 포크를 쥔 채 손등 위에 제 턱을 괴고 웃었다.
“이야, 한산.”
“…….”
“사람 다 됐네.”
사실 외형만 놓고 봐도 몽마는 평범한 인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산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지만, 이제껏 봐온 몽마들만 봐도 그랬다.
이질감 없는 생김새와 차림새.
인간들 틈에 섞여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고, 그중엔 술과 음식을 즐기는 존재들도 있다고 하니 육안으로 구별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전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까이 알고 지내던, 혹은 지금도 지내고 있는 주변인 중에 몽마가 섞여 있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어서였다.
할 수 있는 건, 부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는 일뿐이었다.
* * *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보육원으로 출발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삼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많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고.
조수석에 앉아 내부를 둘러보던 강이 입을 열었다.
“한 실장님.”
둘만 있을 땐 농담할 때나 꺼내는 호칭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재력이 어느 정도세요?”
“뭐?”
“가만 보니까 차도 그렇고, 평소에 입고, 걸치는 거 다 좋은 것만 쓰는 것 같아서.”
“좋은 거 아니야. 옷걸이가 워낙 부티 나서 그러지.”
산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뭐 부티만 흐르나? 귀티에 우아함에 얼굴은 성별을 떠나서 질투가 날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평범하게 돈 벌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호 일하면서 이만큼이나 번 거야?”
“인간들은 원래 가치에 투자를 아끼지 않으니까.”
돈깨나 있는 사람들 틈에서 알음알음으로 존재해오던 산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조건과 오감은 경호 업무를 하기에 최적화된 재능이었고,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돈으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더욱 귀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완벽한 능력과 희소성.
산은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해 세상에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지 않고도, 부와 악몽을 취할 수 있었다.
대게 부르는 게 값인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들은 늘 그에 상응하는 불안을 안고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의뢰인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배를 채운 건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땐 살기 위해 먹던 거라, 지금 먹는 악몽과는 질 자체가 달랐지만.
“연예인 해볼 생각은 안 했어?”
“안 했어.”
“왜?”
“경호원이 네 곁에 머물기 가장 좋은 직업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일정한 ‘때’가 될 때까지 산에게는 없는 듯 숨어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있었다.
갑자기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 한동안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산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이 없어진 강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그가 묻자, 한참 뒤 강이 입을 뗐다.
“그냥.”
“…….”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 말에 산이 조금 웃었다.
“우리 일찍 만났었어.”
“어?”
놀란 그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있어, 그런 게.”
“뭔데! 왜 너만 알고 있어? 빨리 말해줘.”
“다 왔다.”
재촉해봤지만,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산의 차는 어느새 해성 보육원이라고 적힌 간판을 지나고 있었다.
.
.
.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근처에 살아 먼저 도착한 삼영이 보육원의 선생님들을 도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 강아! 산아! 왔어?”
두 사람을 제일 먼저 발견한 그가 빗자루를 쥔 채 손을 흔들었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가간 강이 주변에 있던 선생님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곤, 삼영에게 물었다.
“원장님은?”
“아, 오늘 병원 다녀오시는 날이라, 곧 오신대.”
“어디가 또 안 좋으시대?”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때.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강아.”
“아, 이모.”
식사를 담당했다가 보육교사가 된 권숙희였다.
강이 보호 종료로 퇴소하기 전까지는 식사를 담당하던 인물이라 이모라는 호칭이 더욱 익숙한.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네. 덕분에요. 이모도 건강하시죠?”
“나야, 뭐. 늘 좋지.”
“다행이에요.”
“그래. 그럼 원장님 오실 시간 다 됐으니, 잠깐 앉아서 기다릴래?”
“그럴게요.”
곁에 있던 산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숙희가 국화차 석 잔을 내주곤 다시 멀어졌다.
별 대화 없이 물러나는 그녀를 보며 곁에 있던 그가 물었다.
“원장보다 알고 지낸 지 오래라고 하지 않았어?”
“원래 좀 무뚝뚝하셔. 말도 많이 없으시고.”
강의 말에 산이 멀어지는 숙희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까 찻잔을 내려놓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인 것 같았다.
걸음걸이 역시 썩 자연스럽지 않았다.
2대 원장이라는 감영희와 보육교사 권숙희.
그리고 화재 사고로 이미 사망한 걸로 알려진 최갑훈까지 셋.
분명 셋 중에 강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긴 장본인이 있을 것이다.
찻잔을 드는 그의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