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변하지 않는 것 (29/118)


#29. 변하지 않는 것
2022.08.07.



 
감영희, 권숙희.

그리고 최갑훈.

꿈의 문은 새긴 이가 죽거나 빈사 상태에 이르지 않는 한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사망한 걸로 알려진 선대 원장까지 의심한 건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는 몽마들이 의심 없이 흔적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죽음’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감 원장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강아!”

작고 왜소한 몸에 70이 다 된 노인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강이 바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원장님.”

“그래그래.”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잘 지냈지. 너는 잘 지냈니? 정말 오랜만이구나.”

영희가 그녀의 앙상한 팔을 주무르며 걱정스레 말을 덧붙였다.


“못 본 사이에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졌어? 응?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 요즘 진짜 잘 자고, 잘 먹거든요.”

“그래?”

“네. 원장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강이 말했지만, 감 원장은 영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휴. 아무리 봐도 너무 말랐는데. 한 7~8kg 정도만 더 찌우면 딱 좋으련만.”

황 대표가 들었다가는 노발대발할 말이었다.

그때, 곁에 있던 삼영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아아. 삼영이 자네, 오랜만이구먼! 잘 있었나?”

“네, 잘 지냈습니다. 원장님은 또 어디가 편찮으셨어요.”

“아, 팔이랑 어깨가 좀 아파서 정형외과에 다녀오는 길이네.”

“저번엔 무릎이더니 이번엔 팔이랑 어깨예요? 아이고, 나이 드셨으면 힘든 일 그만하시고 이제 편하게 좀 지내세요.”

“노인네가 다 그렇지 뭐. 나이 먹으니까 안 아픈 데가 없어.”

삼영의 걱정 어린 타박에 그녀가 주름진 눈가를 휘며 웃었다.

영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산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그런데 저기 뒤에 총각은 누군가?”

곁에 있던 강이 대답했다.


“아. 제 경호원이에요.”

“경호원?”

“네.”

산과 영희의 시선이 잠시 맞닿았다.

그가 먼저 묵례했고, 그녀도 이내 마주 웃으며 화답했다.


“반가워요. 우리 강이 잘 부탁해요.”

산이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고, 두 사람의 인사는 그렇게 짧게 매듭지어졌다.


“그래, 안 그래도 내가 뉴스 보고 네 걱정 많이 했다. 이제 괜찮은 거니?”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녀가 애써 웃으며 영희를 진정시켰다.


“그럼 왔으니 간만에 둘이 오붓하게 시간 좀 보낼까?”

“네. 그동안 원장님 어떻게 지내셨는지 듣고 싶어요.”

“나도 늘 네 안부가 궁금했단다.”

그렇게 말한 영희가 삼영에게 물었다.


“괜찮겠나?”

“그럼요. 그러려고 온 건데요.”

“고맙네.”

“그럼 뭐 더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손이야 늘 필요하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숙희를 불렀다.


“최 선생. 여기 두 분 좀 안내해줄래요?”

“네, 원장님.”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나르던 그녀가 냉큼 달려와 삼영을 안내했고, 졸지에 산까지 따라나서야 했다.

숙희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이불을 한가득 넣고는 두 사람에게 빨래를 부탁했다.


“선생님. 야외에서 이불 빨래하기엔 날씨가 너무 춥지 않을까요?”

“오늘은 볕이 좋아 괜찮아요. 저희는 초겨울까지도 하는걸요.”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 빨래를 본 삼영이 뒤늦게 엄살을 부려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사이.

뒤에 서 있던 산은 묵묵히 바지를 걷고 대야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삼영도 마지 못해 양말을 벗고 발을 헹군 후 들어갔다.


“요즘엔 세탁기도 그렇고 건조기도 잘 나와서 이렇게 밟아 빨지 않아도 되는데…….”

“이불은 밟아 빠는 게 최고예요.”

“그래도 기계로 하는 게…….”

“미세먼지도 없고, 해 쨍쨍할 때 해야 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숙희가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반박을 하는 바람에 그도 더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완연하게 가을이 물든 아름다운 정원.

울긋불긋한 돌담 아래에서 강이 영희를 부축한 채 걸었다.

산은 일을 도우면서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우, 발 시려!”

“…….”

“산아. 이따 우리 집에서 강이랑 셋이 삼겹살 구워 먹을래?”

“…….”

“산아?”

그 때문에 곁에서 삼영이 뭐라고 떠들던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한산!”

결국 그가 손을 뻗어 시야 앞을 휘휘 젓고 나서야 산이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긴. 내 말 듣긴 들었어?”

“무슨 말이요?”

“저녁에 우리 집에서 삼겹살 먹자고. 강이랑 같이.”

황 대표가 들으면 이 역시도 삼영의 멱살을 짤짤 털어댈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황 대표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다.

……상사가 어떤 사람이든, 곁에서 긴 시간 버틸 수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라는 걸 삼영을 보며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좋죠.”

산이 담백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 모습을 삼영이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 말했다.


“크으. 너 지금 완전 CF 한 장면 같았던 거 알아?”

푸르고 알록달록한 초가을의 정원.

부서지는 햇살을 등진 훤칠한 남자의 상큼한 미소.

새하얀 셔츠까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광고 모델이 따로 없었다.


“너희 어머니는 안 드셔도 배부르시겠다.”

“…….”

“이렇게 훤칠한 아들을 두셨으니, 얼마나 뿌듯하시겠니.”

삼영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산은 말없이 미소만 덧그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도 나랑 밥 먹을 때마다 자주 숟가락을 내려놓으시곤 했지.”

“…….”

“나만 보면 자꾸 입맛이 없어지신대.”

자주 헛배가 부르신 것 같다며 그가 연신 실없는 소리를 해댔지만, 그 이후의 말은 사실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산아.’

그릴 듯 생생한 어머니의 모습만 눈앞에 잠시 아른거릴 뿐이었다.


 

.
.
.



“그럼 얼굴 뵀으니 이만 가볼게요.”

짧은 만남을 마친 강이 말했다.

감 원장은 못내 아쉬워했다.


“벌써 가게?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그러니.”

“다음에 또 올게요. 원장님도 쉬셔야죠.”

“그래. 바쁜 시간 내서 와주어 고맙다.”

“더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전달해준 후원금도 잘 쓰마.”

그녀가 거듭 웃어주었다.

곁에 있던 삼영도 인사를 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원장님. 근데 치료 제대로 받으신 거 맞아요? 아까 보니까 팔이랑 어깨 계속 주무르시던데.”

“아휴, 이게 하루아침에 낫나. 더 안 심해지면 다행이지”

“의사가 영 돌팔이 같으면 빨리 옮기세요. 제가 잘하는 병원 소개해드릴게요.”

그의 말에 영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알겠네. 내 꼭 그리하겠네.”

세 사람이 차에 올라탄 뒤, 뒷좌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뒤늦게 나타난 숙희가 강에게 인사를 건네려 상체를 숙였다.


“조심히 가렴. 또 놀러 오고.”

“네, 이모. 이모도 건강 조심하세요.”

“나는 건강하니 걱정 안 해도 돼.”

“이번에 무릎 수술하셨다면서요. 원장님께 들었어요.”

“참……, 원장님께서 별말씀을 다 하셨구나.”

“재활 열심히 하세요. 무릎 수술은 재활이 정말 중요하대요.”

70이나 된 영희에 비해선 젊은 편이었지만, 옛날부터 궂은일을 많이 한 탓에 숙희의 몸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후유증이 남을 만큼 큰 수술을 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기에 더 걱정이었다.

가볍게 화답한 숙희가 시선을 옮겨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서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요.”

산이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자 숙희가 연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강이. 잘 부탁드려요.”

“염려 마십시오.”

“그래요. 조심히 가요.”

그녀는 삼영에게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이내 물러섰다.

영희는 한참이나 자리를 지키고 선 채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곁엔 숙희가 그녀의 불편한 몸을 부축한 채 함께 서 있었다.

작은 룸미러 속.

나란히 선 두 여자의 모습은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삼영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육원에도 든든한 남자 직원 좀 더 뽑으면 좋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보육원에 남자라고는 경비 겸 가끔 차량 운행을 도와주는 직원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감 원장과 나이 차가 없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우연인지는 몰라도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 중에서도 남자아이들보단 여자아이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초등학생 이하의 어린이였다.

차는 곧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우거진 숲을 빠져나와, 해성 보육원이라고 적힌 간판을 지나쳤다.

산은 그걸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탓이다.

얼마를 더 내려가자, 가을에 흠뻑 젖은 풍성한 가지들이 이내 보육원의 건물을 완전히 가렸다.


“강아.”

“응?”

“오늘 옥탑방에서 산이랑 셋이 삼겹살 어때?”

“나 안 그래도 그 생각 했었어. 좋아.”

삼영의 물음에 강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운전 중이던 산이 룸미러로 힐끗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다이어트 중이잖아. 괜찮겠어?”

그 말에 삼영과 강이 동시에 대답했다.


“먹고 운동하면 되지!”

“먹고 운동하면 돼.”

짠 것처럼 반응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산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부쩍 먹는 것에 진심이 되어버린 강과 원래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삼영이 저렇게 똘똘 뭉쳐버리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나란히 삼영의 옥탑방으로 향했다.

삼영의 집은 오래된 구축 빌라였지만, 그가 나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탓에 훌륭한 감성 포차 못지않은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강은 매번 올 때마다 같은 말을 하곤 했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고. 도대체 왜 이사 안 가는 거야?”

그러자 삼영이 파란색 바가지에 쌈 채소를 담아내며 말했다.


“나는 이 집이 정말 좋거든.”

“정말 좋은 집을 봐도 그 말이 나올까?”

“그럼.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여기가 펜트하우스고, 5성 호텔이야.”

그 역시 늘 그렇듯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겨울 한파에 이 집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을 그칠 수 없었다.


“오빠. 곧 겨울이야. 작년에도 보일러 터져서 엄청 고생했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내년 봄엔 꼭 이사 간다며 이를 박박 갈던 그였다.

하지만 그러다 날이 풀려 살 만 해지면 이만한 곳이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 역시 그였다.

그게 벌써 10년째.

강이 삼영을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그는 이 집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애정 어린 타박에 조용히 웃던 삼영이 입을 열었다.


“강아.”

“왜.”

“오빠는 여기 절대 뜰 생각 없어.”

“그러니까 왜?”

단순히 집에 정이 들어서, 혹은 귀찮아서라는 이유로는 납득이 잘 가지 않았지만 결국 언제나 그랬든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이 집이 좋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집에 무슨 대단한 속사정이 있는 걸까.

강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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