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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파로(485) (31/118)


#31. 사파로(485)
2022.08.14.



 
불이 들어온 복도는 4층이 유일했다.

8년 전, 화재 사고로 부분 재건을 한 상태였지만, 보육원 자체가 오래된 건물이었기에 곳곳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해가 들던 낮의 정원과는 확연히 상반되는 풍경.

그리고 그 끝에는 감 원장의 방이 있었다.


“……끄응.”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영희가 끙끙대며 일어났다.

곁에서 그녀를 돌보던 숙희가 살짝 잠이 들었다 깬 채 영희의 얼굴을 살폈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아이고. 비라도 오려나 오늘따라 아주 콕콕 쑤셔대는구먼.”

조용히 다가온 그녀가 곁에 있던 물수건을 들어, 감 원장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

“나쁜 꿈이라도 꾸셨어요?”

나긋나긋 물어오는 목소리에 영희가 손사래를 쳤다.


“꿈은 무슨. 아파서 잠도 안 오네.”

“그럼 제가 좀 주물러드릴게요.”

“건들지 말게!”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놀랄 법도 한데, 숙희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가만히 원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큰 소리를 낸 감 원장 본인이었다.


“……미안허이.”

급히 사과한 그녀는 영 스치기만 해도 아파서 그런다며, 제 어깨와 팔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럼 파스라도 붙여드릴까요?”

“됐대두.”

다 싫다는 영희를 보며 숙희가 마른 한숨을 쉬었다.


“난 괜찮으니, 자네까지 잠 설치지 말고 얼른 들어가게.”

“원장님 몸이 이렇게 안 좋으신데, 제가 어떻게 자리를 비워요.”

“그러고 지키고 있으면 뭐, 자네가 대신 아파주기라도 할 텐가?”

식은땀을 흘리던 그녀가 자글자글 주름이 번진 눈가를 휘며 힘겹게 웃었다.

그러고는 곁에 놓인 약봉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꺼내드릴게요. 움직이지 마세요.”

숙희가 얼른 봉투에서 약을 꺼낸 뒤 일 회분을 뜯어 물과 함께 내밀었다.

영희는 그것을 삼킨 뒤, 버석한 입을 뗐다.


“약도 먹었으니 곧 괜찮아질 걸세.”

“…….”

“그러니 늙은이 수발은 이쯤하고, 가서 애들이나 돌보게나. 내 정말 필요해지면 부를 테니.”

더는 버티고 있을 명목이 없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감 원장을 바라보던 숙희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불편해지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그럼세.”

몸을 누인 영희가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팟.

숙희가 나가면서 불을 껐고, 방은 곧 어둠으로 가득 찼다.


“끄으응…….”

밭은 숨소리만 내뱉던 영희가 어깨를 쥔 채 신음했다.


“하이고, 죽겠네…….”

남의 팔을 붙여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굴려보던 몸은 어느 방향으로 누워도 편하질 않았다.

숙희가 하도 버티는 바람에 진통제를 먹기는 했지만, 그런 건 하등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저 아프면 병원을 가고, 치료를 받고, 약을 챙겨 먹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에 묵직한 한숨을 내뱉던 그때였다.


“회복이 더딘 걸 보니, 치명상이긴 했나 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화들짝 놀란 영희가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요!”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전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새까만 벽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움직이자 창을 통해 쏟아진 달빛에 반쯤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 구면이지?”

어둠 속에서 완전히 걸어 나온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산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귀신이라도 본 듯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하지만 말을 뱉기 무섭게 곧장 입이 다물려버렸다.

어느새 다가온 산이 우악스럽게 영희의 얼굴을 틀어쥔 채 말했다.


“왜 이래. 서로 피곤하게.”

“우으읍!”

“어깨 한쪽 날아간 걸로는 성에 안 차?”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새겨진 공포가 순식간에 떠올라 온몸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 이거 좀 놓……!”

겁에 질린 영희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으려 했지만, 이내 어깨를 콱 틀어쥐는 악력에 의해 전화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산은 어깨를 틀어쥔 손에 서서히 힘을 실었고, 곧 비틀었다.


“아악!”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푸른 불꽃이 옷으로 가려진 부위를 반투명하게 비추었고, 가려져 있던 어깨와 팔이 검게 그을린 듯한 형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감 원장의 어깨엔 485라는 붉은 숫자가 쓰여있었다.


“감영희가 아니라.”

“…….”

“485번이었네.”

태어난 순서대로 신체에 번호가 새겨지는 몽마들은 그 숫자의 발음대로 이름이 붙었다.

그러니 감영희의 진짜 이름은 사파로(485)인 셈이었다.

순간 둘 사이에 폭탄이 터지듯 굉음이 났다.

퍼엉!

거리를 두고 물러난 산이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정면을 응시했다.

연기가 걷힌 자리엔 이미 인간의 형체를 상실한 검은 몽마가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산은 보육원에서 감 원장을 마주쳤을 때, 곧장 그녀가 강의 꿈에 나타났던 몽마라는 걸 직감했다.

애쓰긴 했지만, 제게 입은 상처가 너무 큰 탓에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너지? 서강 몸에 꿈의 문을 새긴 게.”

「그, 그래서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뭐겠어.”

그가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드러낸 채 한 걸음 나아왔다.


“먹이다툼하자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놈이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흥! 어디서 하이에나 같은 놈이 나타나서는 꿈도 야무지구만.」

그러고는 칼날 같은 손톱이 박힌 손을 들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재회라 당혹스러웠지만, 질 좋은 악몽만 흡수할 수 있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상처였기 때문에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목표는 승리가 아닌, 생존이었으니까.

그런데 막 공격을 하려던 찰나.


「……!」

그가 사라졌다.

바짝 조여든 동공 옆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어깨너머로 묵직하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푸욱!


「끄윽……!」

오른쪽 가슴을 꿰뚫고 나온 검은 칼날이 위로 치솟았다.

쿠당탕탕!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놈이 데굴데굴 굴러 벽에 부딪힌 후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가 쭈뼛 섰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경황이 없어 당한 거라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이기기는커녕 살아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쳐야 하는데……!’

머리로는 달아나야 한다고 이미 판단을 마쳤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산의 구둣발이 곳곳에 고인 피 웅덩이를 밟으며 걸어갔다.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이런 녀석이 강의 악몽을 내내 독차지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곧 해오던 의심은 그렇게 확신이 됐다.

남은 건,


“배후가 누구야.”

본체를 잡아내는 일뿐이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녀석이 간신히 입을 뗐다.


「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어차피 넌 그분 발끝에도 못 미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이 틀어 잡혔다.


「크윽!」

“사족 붙이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 이봐. 나한테 이래봤자…… 으윽! 나는 그분께 악몽을 가져다 바친 죄밖에 없다고!」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기 시작했다.

꿈을 가져다 바치는 대가로 나도 얻어먹고, 그분도 모두의 평화를 지켜주셨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강이 약간만 희생하면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을 거라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몽마라고 전부 인간을 해할 생각만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피며 살았다고.」

화재 사건 이후 몇몇 아이들은 아직도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감영희는 그런 아이들의 악몽과 강의 꿈의 조각을 얻어먹으며 연명해오던 몽마였다.


「그리고 난 금기를 어기지도 않았어. 아무도 죽지 않고 몽마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랐으니까.」

“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드, 들어봐! 나는 몽마들이 꼭 서로를 죽고 죽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라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그쪽이 훨씬 편하다니까?」

아무래도 녀석은 살려달라는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중인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죽으면 이 보육원도 무너져! 날 믿고 따르던 많은 인간들이 절망할 거라고!」

“그건 걔네 사정이고.”

쿠당탕!


「……악!」

다시 한번 내던져진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가 거리를 좁혀 다가갔고, 놈은 그만큼 뒤로 몸을 물리며 말했다.


「자, 잠깐만!」

“…….”

「네가 지금 너무 흥분해서…… 이, 잊었나 본데, 내 실체를 알게 되면 누구보다 절망에 빠지는 건 서강이 될 거야.」

“그래서?”

「가뜩이나 괴롭던 그 아이의 인생이 더 괴로워질 거라고. 설마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산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너야말로 뭘 착각하고 있나 본데.”

「……!」

“서강의 절망을 누구보다 바라는 게 나야.”

서늘한 목소리가 느리게 이어졌다.


“너나 나나 인간들의 절망과 공포를 먹고 사는 존재들이잖아.”

「!」

“안 그래?”

되묻던 그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칼끝을 녀석의 심장 쪽으로 겨누며 말했다.


“몽마한테 선의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선의를 가진 몽마가 있다면, 그건 새로운 형태의 혼종일 뿐이다.

말을 마친 산이 칼을 치켜들자, 놈은 남은 힘을 쥐어짜 창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격해봤자 명줄만 줄어드는 일이라는 걸 이미 경험을 통해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창문 밖으로 반쯤 빠져나갔던 몸이 더는 나가지 못하고 고전했다.


「윽……!」

뒤를 돌아보니 제 발목을 잡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어딜 도망가.”

「……!」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았잖아?”

산의 얼굴에 선득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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