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아름다운 안녕
(32/118)
32. 아름다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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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름다운 안녕
2022.08.18.
“어딜 도망가.”
「……!」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았잖아?”
산의 얼굴에 번진 선득한 미소에 놈이 기겁했다.
「자, 잠깐……!」
후웅!
애원할 새도 없이 날아간 몸이 목제로 된 옷장에 처박혔다.
쿠당탕탕!
고통에 신음하던 놈의 시야로 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엔 제 몸에서 뜯겨나간 발목 한쪽이 들려 있었다.
녀석이 황급히 시선을 내렸고,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엉망이 된 다리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너, 너 이 자식……!」
피도 눈물도 없는 저 잔인한 놈은 애초에 저를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돼! 어서 이사오 님을 찾아가야 해!’
어떻게든 도망만 쳐보자는 심정으로 녀석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졌고, 산은 들고 있던 발목 한쪽을 던져버리곤 곧바로 손바닥에서 검을 뽑아냈다.
하지만 빠르게 그의 뒤를 빼앗은 녀석이 산의 몸을 끌어안고 포박했다.
‘됐다!’
이대로 온몸의 뼈와 장기를 으스러트려 죽일 셈이었다.
「내가 쭈구렁 할망구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살아온 세월이 몇백 년이야. 고작 너 같은 핏덩이가 우습게 볼 만한……!」
콰직!
……어?
너무나도 쉽게 팔을 뻗어 올린 그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버렸다.
그대로 경추가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고, 놈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또 한번 바닥에 처박혀야 했다.
콰당탕!
「하악……!」
곧바로 날아든 구둣발이 얼굴을 짓뭉갰다.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칼날이 제 눈앞의 바닥을 내리찍은 후였다.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
“앞으로도 대답할 용의는 없어 보이고.”
서늘한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박혀왔다.
꽉 막혀있던 숨을 내뱉은 녀석이 팔다리를 덜덜 떨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만 것이다.
죽음을 예감한 녀석은 곧 끈적한 핏물을 질질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불행한 애들한테 불행 좀 얻어먹으면서 살아보겠다는데, 정체도 모를 놈이 나타나서 모든 걸 망쳐놓는구나.」
“…….”
「미련한 놈 같으니. 어차피 혼자서 다 먹지도 못할 거…… 네 몫만 챙기고 조용히 살았으면, 허억…… 모두가…… 평화로웠을 것을.」
“몽마한테 평화가 어디 있어.”
「…….」
“날 때부터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지.”
푸욱!
그는 미련 없이 녀석의 반만 남은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키에에에엑……!」
짐승의 단말마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비튼 칼날을 뽑자,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검은 재가 날리며,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몽마의 몸은 곧 인간의 형상을 한 감영희가 되었고, 그것은 곧 힘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비처럼 쏟아지던 선혈이 붉은 꽃잎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놈이 완전히 숨을 거두자 보이지 않던 장막이 걷혔고, 사방에 튀어있던 핏물은 곧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부서지고 깨진 모든 흔적도 남김없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산은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놈의 시신을 말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생기를 잃은 무채색의 건물이 멀어졌다.
달빛조차 제대로 스미지 않는 숲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다음 날.
강은 숙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네, 이모.”
- 강아…….
무겁게 잠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직감했다.
무언가 또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에게 전해진 건,
“…….”
감 원장의 사망 소식이었다.
심장마비가 사인이었다고 전하는 숙희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멀어지기 시작했다.
강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가 그대로 전화기를 바닥에 떨구었다.
.
.
.
영희의 장례는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발인을 위한 장지에 검은 옷을 입은 강과 삼영, 산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보육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지내고 있는 아이들과 직원들.
몇몇 재단과 센터에서 나온 사람들이 영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나타났다.
비가 많이 내렸다.
검은 플로피를 쓴 채 멍하니 정면만 보던 강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바로 전날까지도 괜찮으셨잖아…….”
“강아.”
“심장질환 같은 거 없으셨잖아…….”
아직도 이 모든 게 실감 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침통한 표정으로 곁을 지키던 삼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산은 쏟아지는 비 사이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영희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참혹하게 죽임당한 놈의 보잘것없는 마지막이 실체가 가려진 진실 너머에선 이토록 성스러운 죽음이 되기도 한다.
이미 많은 몽마들이 몽마로 태어나 인간의 형상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직접 본 몽마의 장례식 현장은 그저 기이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엔 놈이 남기고 간 말이 계속 맴돌았다.
「네가 지금 너무 흥분해서…… 이, 잊었나 본데, 내 실체를 알게 되면 누구보다 절망에 빠지는 건 서강이 될 거야.」
「가뜩이나 괴롭던 그 아이의 인생이 더 괴로워질 거라고. 설마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몽마의 본질적 성향은 몽마였던 자신이 가장 잘 알 문제가 아닌가.
인간도 아닌 제게 도대체 무얼 기대했기에, 그런 감정적 호소를 한 걸까.
죽음이 두려웠던 거라면, 차라리 대놓고 목숨을 구걸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몽마들이 더 이상 서로를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고, 인간과 공존하며 살 수 있는 평화롭고 편리한 세상을 바랐다던 녀석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마 인간의 형상을 하고, 너무 오랫동안 인간과 어울린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그저 놈이 별종이었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의 시선이 조금 더 옆을 향했다.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권숙희가 울다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곁에 있던 인간들이 우르르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산이 그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퍼붓는 비였지만, 그의 머릿속 번잡한 상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
장례식에 다녀온 후.
강은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아마도 예상치 못한 이별이 심한 스트레스가 되어 몸에 영향을 미친 것일 거다.
그녀의 건강이 염려된 황 대표도 모든 일정을 멈춘 채 강이 회복에 힘쓸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을 앞둔 작품이며 광고가 줄줄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괜히 탈이라도 났다간 어렵게 이뤄낸 복귀가 무산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은 몸을 사리는 게 우선이었다.
“강아. 일어나 봐. 약 조금만 먹어보자.”
병원에 다녀온 후에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강 때문에 삼영이 내내 곁을 지켰다.
산은 멀찌감치 떨어진 채 그저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진실이 드러나게 되면 제게는 더욱 근사한 꿈을 얻을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반대로 서강은 걷잡을 수 없는 절망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 감영희가 떠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만약 그의 정체가 자신의 꿈을 노리던 몽마였다는 걸 알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들까?
이번에도 버텨낼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뭐 하나 섣불리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휴. 이제 좀 열이 떨어지기 시작하네.”
삼영이 체온계를 보며 가슴을 쓸었다.
그러다 집에 갈 채비를 하며 산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산아. 나 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 강이 좀 돌봐줄래?”
“그럴게요.”
“죽 끓여놓은 거 냄비에 그대로 있거든? 먹을 때 물만 조금 더 부어서 데우면 돼. 약은 시간 맞춰 꼭 챙겨주고. 알았지?”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병원 데리고 가거나, 나한테 연락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가 돌아간 후.
산은 강이 고열을 앓느라 정신이 혼미하게 잠긴 틈을 타 그녀의 악몽을 흡수하고, 몸에 새겨진 문과 기억을 지웠다.
강은 높을 열 때문에 조금 힘들어하긴 했지만, 삼영과 있을 때보단 훨씬 평온한 얼굴이 됐다.
악몽을 꾸긴 꿨지만, 제가 그것을 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앓다 겨우 눈을 떴다.
강이 곁에 있던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리게 입술을 뗐다.
“계속 옆에 있었어?”
“응.”
“내 악몽 어땠어?”
“…….”
말을 아끼는 그를 보며 그녀가 제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꿈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몸이 너무 아파.”
“몸살 기운 때문에 그럴 거야.”
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던 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약 먹게 뭐라도 좀 먹어. 죽 데워 올게.”
그런데 손을 뻗은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고개를 내려보니 창백한 강의 얼굴이 보였다.
“있잖아, 산아.”
“…….”
“혹시 감 원장님도 몽마는 아니었을까?”
산은 그렇게 묻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처럼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고, 아니라는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이 힘없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긴. 그랬다면 네가 제일 먼저 말해줬을 텐데.”
“…….”
“그냥.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해서…… 불안했어.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너무 끔찍할 거 같아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니면 혹시나 네가 나 생각하느라, 혹시나 내가 너무 힘들까 봐 얘길 안 해주는 건가 싶기도 했고.”
“몽마는 선의가 없어.”
“…….”
“네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네가 끔찍하게 여길 일이었다면, 나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얘기해줬을 거야.”
“그럼 그런 걸 바라고, 반대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몽마들은 인간의 불행을 바라니까.
그리고 너도, 몽마니까.
조용히 이어진 강의 말에 그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 했네.”
“…….”
“원장님이 사실은 몽마였다고, 거짓말이라도 할걸 그랬어.”
산이 조용히 웃었다.
몽마에게는 선의가 없다.
있다면 혼종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그저, 날 때부터 혼종이었던 저의 존재를 또다시 확인하게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걸, 애써 더 나은 결과를 위한 선택이라 믿기로 했다.
지금의 서강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유리처럼 위태로웠으니까.
그녀의 악몽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진실은 그렇게 덮였다.
산은 485번의 인간적 죽음이 부디 자신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안녕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