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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경계태세 (33/118)


#33. 경계태세
2022.08.21.


강이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눈앞이 어지러운 듯 손으로 이마를 짚긴 했지만, 곧 꿋꿋이 상체를 세웠다.


“괜찮아?”

산이 묻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오래 누워 있었나 봐. 몸이 더 찌뿌듯한 거 같아. 산책하고 싶어.”

“지금은 안 돼.”

“왜?”

되묻는 말에 그가 손을 뻗어 강의 이마를 짚었다.


“너 아직 열 안 떨어졌어.”

“못 걸을 정도는 아닌데…….”

“다 나으면, 그때 나가.”

산은 회복이 우선이니 더 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손목시계를 한번 쳐다본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형이 너 시간 맞춰 약 먹이랬어.”

“약 여기에 있는데?”

그녀가 협탁 위에 놓인 약봉지와 물을 가리키자, 산이 말했다.


“빈속이잖아. 뭐라도 먹고 먹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삼영이 끓여놓고 간 죽에 물을 붓고 약한 불로 데우기 시작했다.

냄비의 가장자리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나무 주걱으로 냄비를 몇 번 젓다가 손등에 죽을 조금 덜었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손등에 던 죽을 살짝 맛보았다.


“이 정도면 됐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온도는 적당한 건지, 물이 적어 너무 되직한 건 아닌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다 살짝 현타가 오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나 싶어서.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인간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어이없고, 낯설기만 했다.

산은 이만 불을 끄고 그릇에 데운 죽을 덜어 새로 받은 물과 함께 가져갔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강이 말했다.


“고마워.”

“난 데우기만 했어.”

“그래도.”

그렇게 말한 그녀가 수저로 죽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익숙한 맛에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맛있네.”

건더기도 거의 없는 흰 쌀죽이었지만, 종종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삼영이 끓여주던 죽이라 얼마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인지 모르지 않았다.

비법은 육수였다.

소화 부담을 덜기 위해 건더기는 최소화했지만, 그만큼의 정성을 늘 육수에 쏟아부었다.

마음이 담긴 음식이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강은 그렇게 죽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운 후, 약까지 시간 맞춰 챙겨 먹었다.


“더 잘래?”

그가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도 자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허리도 아프고.”

강이 가볍게 팔, 다리를 늘여 스트레칭을 하곤 곧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침대 주변을 살폈다.


“뭐 찾아?”

“체온계. 어디 갔지?”

마지막으로 삼영이 썼던 건 알겠는데, 어디로 갔는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나?”

무릎을 접은 채 쪼그리고 앉은 강이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지켜보던 산이 가만히 손짓했다.


“이리 와봐.”

그에 벌떡 일어선 그녀가 총총거리며 다가갔다.

거리가 좁아지자 그가 손을 뻗어 강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다 손가락을 뒤집어 그녀의 뺨에 가져다 댔다.

모호했다.

안 되겠는지, 산이 다른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체온이 비슷했다.

그가 그렇게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동안, 강은 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살짝 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녀는 곧 허락을 구했다.


“어때? 산책해도 되겠어?”

 

 
마치 보호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가 외투와 모자를 챙기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손끝이 분주했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죽여봤자, 영희 생각만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곱씹고, 그녀와의 이별을 떠올리고, 아파하고, 또 아파하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히다 문득 어제의 일처럼 생생해지는 기억에 울다 잠들길 반복하겠지.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드레스룸 안에서 강은 목 안에 고여 있던 슬픔을 삼켰다.

동시에 영희를 가슴에 묻었다.

삶은 언제나 이별의 연속이었음을 상기하며.

* * *

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강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후드까지 뒤집어쓴 채 외투를 걸친 상태라 거의 눈만 보이는 상태였고, 산은 흰 면티에 검은 항공 점퍼를 걸친 채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딱 한 층을 더 내려가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둘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높이 올려 묶은 포니테일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레오파드 프린트의 원피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차림을 한 여자.

바로 제인이었다.


“오! 롱 타임 노 씨! 강!”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그녀였지만, 이내 걱정에 물든 얼굴이 됐다.

강이 뭐라고 화답을 하기도 전에 다가온 제인이 다짜고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기사 봐쒀. 강이 아끼는 사람 떠나서, 강이 슬퍼한 사진 봐쒀.”

“아…….”

“아이 필 쏴리. 이 말밖에 해줄 수 없어 유감이야.”

“위로, 고마워요.”

옴짝달싹 못 하게 안긴 강이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산의 시선은 곧 제인의 목덜미로 향했다.

정확히는 머리카락 바로 아래.

경추에 새겨진 여섯 개의 숫자를.

591111.

시선을 느낀 제인이 돌아보고는 곧 강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근데 저 섹시하고 무서운 오빠는 누구야?”

“경호원이에요.”

“경호원? 같이 살아?”

“아니요. 사정이 있어서 위층에…….”

말꼬리를 늘이고 있는데, 산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 핸섬. 나이스 투 미츄.”

그녀가 곧바로 손가락을 차례로 까닥이며 요염하게 화답했다.


“문신이 특이하네요.”

거두절미하고 꺼낸 문신 얘기에 제인이 제 목 뒤를 슥슥 문질렀다.


“아, 이궈? 우리 엄마 생일. 박만금 여사님 59년생 돼지띠. 11월 11일. 과래뚹 데이.”

과래뚹이 뭔지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호탕하게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식구가 나랑 우리 엄마랑 둘이거든. 나한테는 맘이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 새겼어요.”

“그랬군요.”

산이 큰 동요 없이 담백하게 답했다.

하지만 제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 팔꿈치 위와 허벅지를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나 몸에 문신 JONNA 많아. 요즘은 문신도 패션이니까.”

그는 이번엔 대답 대신 입꼬리만 약간 당겨 웃어 보였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그녀는 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힘들면 언제든쥐 연락해.”

“그럴게요.”

“바이, 허니.”

강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제인이 곧 산에게도 윙크를 날렸다.


“바이. 핫 가이.”

요란했던 등장만큼이나 요란한 퇴장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제인이 먼저 빠져나간 로비 입구를 향해 걸었다.


“내가 저번에 말한 이웃이야. 제인이라고, 기억나지?”

“응.”

강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산이 이어서 말했다.


“아마 제대로 알아보긴 힘들겠지만.”

“응?”

“몸에 숫자 적힌 사람들 조심해.”

“왜?”

“몽마는 태어난 순서대로 몸에 숫자가 새겨지거든. 그게 걔들 진짜 이름이고.”

……‘걔들’이라고?

자신도 몽마면서 마치 다른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강은 산의 몸에 새겨진 숫자는 뭔지, 그의 진짜 이름이 궁금해졌지만, 보여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진작 보여주며 설명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딱히 그것에 대한 언급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몸에 새겨진 숫자는 불씨처럼 빛나기도 해 하지만 인간들 틈에 섞여 있을 땐 평범한 문신인 것처럼 충분히 위장할 수 있을 거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이내 다시 물었다.


“산이 네가 보기엔 어떤데?”

“뭐가?”

“제인이 몽마 같아?”

강이 묻는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

너무 빨리 돌아온 답에 오히려 강이 조금 더 당황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그냥?”

“느낌이 그래.”

아직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순전히 감이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대답했다.

느낌이 별로인 건 둘째치더라도, 경계를 낮춰 좋을 게 없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한번씩 상기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내 쓰게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그렇지. 웬일로 친구가 다 생기나 했어.”

확실한 게 없더라도, 일단은 산의 경고를 무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은 언제나,


“아무래도 내 팔자엔 동성 친구 같은 건 없나 봐.”

경계가 느슨해질 때 찾아오니까.

.
.
.

강이 제인을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검토 중인 차기작 대본이 추려지기 시작했고, 복귀를 위해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돌입한 때였다.

운동의 강도를 높이고, 식단조절에 들어간 탓에 이제 옥탑방 삼겹살도 당분간은 멀리해야 했다.


“하아, 하아!”

한강을 뛰는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웨이트는 짐에서 했지만, 유산소는 가능하면 실내보단 실외에서 하는 걸 선호했다.

무엇보다 영희의 일이 있고 난 후, 강은 의식적으로 더 몸 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움직이고, 바쁘게 일하며 가능한 상념이 짙어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절정에 달한 순간.


“Hey.”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엄마야!”

깜짝 놀란 강은 순간 발이 꼬여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제 어깨를 잡아챘던 사람이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아준 덕에 뒤통수가 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엔 저만큼이나 놀란 듯한 제인이 있었다.


“……허니, 궨차나?”

“아, 네.”

“계속 불렀는데, 음악 때문에 못 듣는 거 같아숴…… 애니웨이, 놀라게 해서 미안훼.”

“괜찮아요. 안 다쳤으니 됐죠.”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하고 있었지만, 실은 굉장히 놀랐다.

금요일 저녁의 한강.

이 개미떼 같은 인파 속에서, 눈만 빼고 다 가린 자신을 어떻게 알아봤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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